49화. 태월과 설희
골목 입구에는 플라스틱 말통을 든 여자가 맨발로 있었는데.
건물 벽에 말통에 든 무언가를 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의 눈은 빨갛다.
그 여자 자체가 귀신이 아니라, 악귀가 빙의 한 것이다.
흔히 말하는 귀신에 씐 거다.
태월은 건널목을 건너자마자, 왼손을 뻗으며 내뱉었다.
8m의 거리임에도 거리낌이 없는 태월이다.
“꺼져라!”
-쉬 아악! 끄어억!
도깨비의 입이 튀어 나가며 그 여자의 몸속 악귀를 삼켜 버렸다.
여가수를 가르치는 보컬 트레이너가 있었다.
원래 꿈은 가수였지만, 여자의 외모를 중시하는 이 시대에서 그녀의 꿈은 그냥 꿈일 뿐이었다.
그래도 실력만큼은,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가창력을 지니고 있는 그녀다.
오늘도 가창력도 없는 인물만 반반한, 여가수 하나를 가르치느라 진이 다 빠졌다.
노래가 좋아서 이 바닥을 뜨지도 못하고, 이룰 수 없는 꿈을 버리지 못한 자신이 못내 불쌍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소주 한 병을 꺼내, 불쌍한 자신의 자화상에 위로주를 건넨다.
술잔을 든 그녀의 얼굴이 설희의 얼굴로 변했다.
“어? 나 또 재능이 들어왔어! 이 손은 왜 잡고 있었던 거야? 괜히 나한테 또 들어왔잖아.”
“응? 뭐, 잘된 거 아냐? 나야 얻을 기회가 많아 괜찮아. 이렇게 우연히라도 너와 있을 때 악귀를 만난 게, 오히려 괜찮은 거 같네.
그런데 이번엔 어떤 재능이야?”
“보컬 트레이너인데? 가창력 끝판왕?”
“와우! 너 그런 쪽 재능과 인연이 있나 보네.”
태월은 그림과 관련된 재능이 두 개밖에 안 되었지만, 스스로 흥미를 느껴 더 발전한 케이스다.
음악 재능은 작곡과 피아노가 있긴 해도, 빛날 정도의 재능은 보이지 못했다.
태월과 설희는 멍하니 벽에 기대 서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여자에게 묻고는 말통에 남은 내용물 냄새를 맡아봤다.
자동차에 넣는 휘발유였다.
“아, 여기가…. 제가 왜 여기 있는 거죠?”
설희가 그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가수 지망생이셨어요?”
“어머? 저를 아세요? TV에 잠깐 한 번 나온 게 전부였는데….”
설희가 귀신의 회상에서 본 얼굴만 반반했다던 그 여자였다.
아마 가창력이 문제가 되어, 정식 가수는 되지 못했었나 보다.
“이 건물과 무슨 연관이 있나요?”
“아 여기는 보컬 연습 받던 곳이었어요.”
“그런 간판은 없는데요?”
“보컬 선생님이 여길 얻었었거든요. 지금은 안 해요. 그런데 여긴 집과 두 정거장 거리인데. 내가 왜 여길….”
“태월? 저기 신발 가게가 있지? 거기서 235 정도 되는 단화 하나 사다 줘.”
신발을 신기고 따뜻한 차를 한 잔 커피숍에서 대접했다.
자신이 휘발유를 건물에 뿌린 걸 알게 되어서인지, 그걸 막아준 설희의 질문엔 성의 있게 대답했다.
말도 편하게 하라고 하니, 설희와 같은 나이의 여동생이 있다며 좋아한다.
설희의 외모를 한참 칭찬하다가, 언니도 이쁘다는 말에 심리적 무장해제가 되어 버렸다.
한 달 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나오는 일이 종종 있었고, 주변에서는 몽유병이 아닌가 의심을 받아왔다고 한다.
그 보컬 트레이너의 귀신이 씐 것이라고 하자,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설희를 쳐다봤다.
“몽유병이 아니라니 다행이긴 하네. 동생은 그걸 어떻게 알아?”
“저희 엄마도 그렇지만, 신기가 좀 있거든요.”
그 여자는 그때부터 설희를 아기보살쯤으로 믿는 눈치다.
이 건물에 살던 보컬 트레이너는 외모 콤플렉스가 심했는데, 무슨 일인지 건물주와 크게 다투었단다.
그리고 그날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세상과 이별 했었다는 이야기였다.
“건물주가 외모 비하 발언이라도 했나 보네요?”
“어? 그건 어떻게 알아? 사실 그 인간이 그런 면이 심하긴 했었어.”
“건물주에게 벌을 줄 것이지, 왜 언니에게 붙었을까.”
“건물주가 올 때마다 내가 보이면 음료도 사주고 가고 그랬거든. 그럴 때면 선생님이 더 날카로워지긴 했고. 아, 그리고 그 건물주는 보름 후 한밤중에 심장마비로 죽었다더라.”
그 여자를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고는, 원래의 목적지인 신촌시장으로 갔다.
“이런 식으로도 원귀가 생기나 보네?”
“원귀긴 한데 질투를 느껴 자기 제자에게까지 붙는 건, 삐뚤어지고 편협한 사고를 생전에 가졌단 의미지.”
“태월은 원귀 경험 많지?”
“응 좀 되긴 하지. 큰스님하고 다닐 때도 좀 많이 봤고.”
시장에 도착하고 보니, 설희가 가려던 집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여긴 안 되겠네. 토요일이라 더 그런가 봐. 돈가스는 좋아해?”
“응, 그것도 잘 먹긴 해. 그럼 그걸로 하자.”
설희를 따라 시장을 나와서 몇 분 정도를 걷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온다.
“저기? 학생! 마스크가 굉장한 매력이 있는데.
혹시 하이틴 모델 쪽 관심은 없어? 연기자나 모델 쪽으로 다 가능할 거 같은데?”
“없는데요?”
“그, 그럼. 여기 명함을 줄 테니, 생각이 바뀌면 연락을 줘.”
억지로 명함을 설희 손에 쥐여주고는, 힐끔대며 돌아서는 30대 남자도 있었다.
설희를 만나고 신촌을 돌아다니다, 똑같은 일을 여러 번 겪는 중인 태월이다.
“말로만 듣던 길거리 캐스팅을 세 번이나 보게 되다니, 이러다 연예계로 가는 거 아냐?”
“호호, 내가 중학생쯤 되는 줄 아나 봐. 아역 탤런트가 아니라 하이틴 모델이라잖아.”
설희가 데려간 곳은 가족들이 많이 오는 그런 경양식 집이었다.
나오는 노래도 피아노곡이 주로 나왔고.
돈가스 정식 두 개를 시켰다.
“너 다음에 우리 집 안 올래? 서울에 친구가 있다니까. 데려오라더라.”
“한 달 후면 여름 방학이니 그때쯤 가지 뭐.
난 방학이 되면 스승님하고 여기저기 다닐 생각인데, 넌 뭐 하려는 계획은 있어?”
“음, 난 취미 겸 노래를 제대로 배워볼까 해. 재능도 생겼으니 괜찮지 않을까?”
“응, 잘 어울릴 거 같네. 트로트도 배우는 거지? 크크.”
“어머? 너 트로트 무시하네? 내가 제대로 배워서 본때를 보여주마. 기다려라, 우주 악당 박태월!”
“헐, 무슨 악당씩이나. 그런데 넌 다른 가족은 없어?”
“음, 이모는 셋이 있어. 그래서 사촌들이 있긴 한데, 다 딸이고 나보다 다들 어려.”
설희가 말하는 이모는, 닌자들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호족들이다.
생모의 둘째 사저와 넷째 사매 그리고 막내 사매.
다행히 직계 사형제 중에 넷이나 생존한 것이다.
그 외 장로들과 방계 사형제들은 전부 그날 세상을 떠났고.
살아남은 사형제들은 후손을 잇기 위해 결혼이라는 것을 했다.
호족들은 부계 혈족이 아니라 모계혈족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그들 호족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호족의 번창을 위해 성별을 가리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딸만 낳고 있다.
“큰이모 하나와 셋째, 넷째 이모가 있는데, 다들 이쁘셔! 우리 엄마가 둘째야.”
설희는 자기 이모들이 친형제가 아닌 걸 모르고 있다.
생모가 호족에 대해 아직까진 밝히지 않았단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직도 아빠에 대해서 엄마가 말을 안 하셔?”
“응, 내가 성인이 되면 말해준다며 기다리라고만 해. 이모들에게도 물어봤는데, 대답을 들을 순 없었어. 뭐 사실 나도 아빠를 꼭 알려고 했던 건 아냐. 단지 다른 집은 다 아빠가 있길래 궁금했을 뿐.”
태월과 설희는 저녁을 먹고 홍익문고에 갔다.
“어머, 사려던 책이 고등학교 검정고시 교재야? 중학교 거는 다 봤나 보네?”
“다 본 건 아니고 방학 전에는 거의 끝날 거 같아. 그래서 미리 사두려고. 넌 뭐 사려고?”
“음악 관련 책들. 음악 기초 이론과 실습, 음악의 계보와 역사 같은 것들이야.
말 그대로 음악에 대한 기본 소양이랄까?
재능을 받은 것에도 그것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직접 읽는 건 다르잖아.”
“그래, 나도 그림은 기초를 따로 배우긴 했었어. 도움이 많이 되더라.”
“내일 시간 돼? 종로에 갈 건데.”
“응? 시간이야 내면 되지만, 거긴 왜?”
“낙원상가에 들러 기타를 살까 하고.”
고양군의 농업고등학교에 있던 악귀에게서, 설희가 얻은 재능 중 하나가 기타였다.
“그래, 그럼 낼 어디서 볼까?”
“나도 지리는 잘 모르니, 낙원상가 앞에서 보면 되지 않을까?”
1969년에 건립된 낙원상가는, 설립 당시 보기 드문 주상복합상가로 주목을 받았었다.
특히 건물의 1층이 자동차 도로로 사용되는 특이한 설계로 지어진 탓도 있었다.
낙원상가, 대일상가, 낙원아파트를 통칭하여 낙원상가라 불렸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88 서울올림픽의 개최 열기와 통행금지 해제 등의 이유로 유흥업이 성황이다.
이에 따라 악사 및 악기에 대한 수요가 증대하여, 낙원상가는 호황을 이루는 중이다
야간 통행금지는 1945년 9월부터 37년간 계속 이어졌었고, 해제된 게 1982년 1월 5일이다.
긴급 사고나 응급 상황에서는 예외적 면이 있긴 했지만,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를 억압하는 비판이 거세서 결국 해제된 것이다.
이 해제된 시기부터 유흥업은 도심의 모습을 바꿔 버렸다.
그리고 88올림픽을 앞둔 요즘은 더 분위기가 올라있다.
***
다음 날 11시경 낙원상가 앞에서, 태월과 설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머, 여기 허리우드 극장이라고 있네?”
“나도 여기는 처음이라 신기하긴 하네.
2층으로 올라가자. 거기서부터 악기 상가인가 보던데?”
“응, 여기 사람 많네. 일요일이라 더 그런 거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이런 상가에서는 안쪽이 젤 싸다고 하더라.”
설희의 수다를 들으며, 진열된 악기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태월이다.
몇 군데를 둘러보다, 기타가 유난히 많아 보이는 가게로 들어가게 되었다.
“기타를 보러 왔어요.”
“오, 중학생들인가 보네? 둘이 닮은 거 보니 오누이?”
“어머, 둘이 친구거든요?”
“아, 그랬다면 미안. 그런데 어떤 종류 기타를 찾는 거야? 어쿠스틱 기타? 일렉트릭 기타?”
“통기타요.”
“통기타는 금속 줄을 사용하는 것이고, 클래식 기타는 나이론 줄을 사용하는 거고.
클래식 기타와 구별하여 포크기타라고 부르는 건데, 이 포크기타를 통기타라 불러.
가끔 착각하는 학생들이 있어서, 이렇게 말해주는 거야.”
“그럼, 포크기타요.”
“요즘은 학생들에게 포크기타가 대세지. 이쪽으로 오게.”
가짓수가 많아서인지 다른 곳과 달리, 꺼내서 보여주진 않고 둘러보게 했다.
11개 정도를 보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게 없었던 설희는 우물쭈물한다.
그냥 나가자니 괜히 미안해서다.
다양한 손님 경험이 많은 주인은, 설희의 표정에서 바로 눈치를 챘는지 다른 말을 꺼낸다.
“음, 좋은 기타가 있는데, 특별히 싸게 줄 테니 함 봐봐.”
안쪽 창고로 들어가더니 가방에 씌워진 기타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꺼내는 기타를 보던 태월은, 자신도 모르게 놀라 목소리가 커졌다.
“아저씨! 이거 사람 죽인 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