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학교생활과 신촌의 휴일
휴식 시간에 벌어진 일이라, 반 모든 학생이 멍청해져 버렸다.
키는 자신들과 비슷하지만 이제 겨우 10살인 애가, 학교짱과 똘마니 둘을 순식간에 날려버린 것이다.
학교짱은 기절해 버렸고, 나머지는 정신을 못차렸다.
그래도 반장이랍시고, 한 아이가 나서서 급하게 처리한다.
두 똘마니를 흔들어 정신 차리게 하고는, 덩치를 데리고 양호실로 가라고 종용했다.
“내가 같이 가줄까요?”
당사자가 가자고 나서니 오히려 겁먹은 똘마니 둘은, 후다닥 덩치를 둘러업고 양호실로 가 버렸다.
반 아이들의 반응은 놀라움 속에 경계심이 반이고, 속 시원함이 반이었다.
“안녕? 정식으로 인사한 적 없지? 난 이현우야. 방금 일은 많이 놀랐어.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운동도 많이 했나 봐? 그런데 어떤 무술이지? 순식간에 셋이 떨어져 나가던데.”
그 반장이란 아이였다.
택견이니 각희니 말해봐야 잘 이해 못 할 듯해서 간단히 했다.
“박태월이에요. 집에서 태권도장을 하거든요.”
“응? 호, 혹시 현대 아파트 맞은편에 있는 태권도장?”
“네,”
“그나저나 도복은? 괜찮겠지?”
“3개월 가입하면 한 벌 준대요.”
“응? 아, 그 말이 아니고…. 아까 그 기절한 친구 이름이 황도복이야. 선생님에겐 먼저 주먹을 날리기에 대응한 거라고 증인 서줄게.
그런데 그대로 엎어지던데 크게 다치진 않았을까? 그 애 아버지가 잘나가는 병원장이거든.”
“힘 조절했기에 그 병원에서 장례식 치를 일은 없을 거예요. 일주일 정도면 멀쩡해질 거구요.”
“하하, 너 사고관이 독특하구나. 보통 이런 일이 벌어지면, 문제 될까 봐 걱정돼야 하는데.
나야 그 집안에 눌릴 일이 없어서 피해는 없지만, 다른 애들은 도복이한테 좀 당했거든.
유도가 주특기인데, 제대로 하지도 못했네.
하여간 속 시원하긴 하다.”
박승철이 아들에게 종종 하던 말이 시비 걸더라도 참는 게 좋고, 한 번 손을 보면 끝을 봐야 깔끔해진다고 했다.
“반장! 저기 운동장 좀 봐봐! 저 미친개가 또 시작했어!”
창가에 있던 한 아이의 말에 다들 우르르 몰려갔다.
태월도 무슨 일인가 싶어 밖을 보게 되었고.
단체 얼차려를 주고 있었는데, 여자애들은 손만 들고 있고 남자애들은 오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소해 보이는 남자애 하나는 땅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 옆에는 선생 하나가 아이의 등에 주전자 물을 붓고 있었고.
잠시 보고 있는데 아이가 옆으로 넘어간다.
뭔가 위험해 보였다.
‘어? 쟤 영혼이 왜 저래?’
혼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넋이 빠져나가려 하고 있다.
사람은 육체와 여러 개의 넋(혼)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15세 이하는 이 육체와 넋의 결합이 불안정한 시기다.
그래서 이 시기에 육체나 정신적 충격이 크면 이와 같은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이럴 때는 넋을 다시 안으로 불러들여야 한다.
넋들임이라는 비는 형식의 의례나 무당의 굿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태월은 급히 4층에서 뛰다시피 해서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학생들이나 선생이 볼 때 단순하게 기절한 것쯤으로 보이겠지만, 단순한 일이 아닌 꽤 심각한 일이다.
흔들어 깨우고 있는 선생을 옆으로 밀어 버리고, 코에 손을 대 아이의 호흡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정수리 위로 솟아오르고 있는 혼을, 영혼 에너지를 두른 왼손으로 눌렀다.
“여기! 여기! 학생 이름이 뭐예요? 누가 빨리 알려줘요!”
다급하게 소리치는 태월의 말에, 다행히 여학생 하나가 호응했다.
“유현수!”
고개를 끄덕여 준 태월은 유현수의 인중혈을 포함한 혈자리 몇 곳을 눌러 정신을 깨웠다.
“유현수! 내가 세 번 외치면 그냥 대답만 해!”
“네.”
“유현수! 넋 들여라!”
“네.”
“유현수! 넋 들여라!”
“네.”
“유현수! 넋 들여라!”
유현수에게 외치며, 태월의 왼손은 넋을 압박하며 집어넣고 있었다.
몸의 주인이 원하고 태월의 영혼 에너지가 압력을 가하자, 유현수의 혼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처음 해보는 것이라 긴장한 탓도 있지만, 태월의 능력으론 오히려 넋을 없애는 게 더 쉽다.
“어이! 박태월? 오냐오냐해주니 이젠 선생을 밀쳐? 정도가 지나친 거 아니야?”
“제가 큰스님 아래서 어릴 때부터 배운 게 있습니다. 이렇게 기절한 건 크게 문제가 안 되지만, 어떤 경우엔 깨어나도 뇌에 문제가 발생하는 케이스가 있습니다.
이 유현수의 몸 반응이 그것과 같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기절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었다.
다만, 천재라고 알려진 태월이 그 말을 하니, 뭔가 그럴듯하고 이번 기절이 달라 보였다.
“그, 그럼 이젠 괜찮아진 거지?”
“네.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만, 이틀은 안정이 필요합니다.”
“‘넋 들여라’가 무슨 뜻이냐?”
“정신이 돌아오라는 진언 같은 것입니다.”
진언이 뭔지 모르는 선생이지만 제자들 앞에서 무지를 드러낼 수 없기에, 자신도 아는 것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태월의 절반만 진실인 해프닝은, 뒤끝 없이 끝이 났다.
그런데 이걸 보았던 학생들이, 자주 써먹는 유행어가 되어 버렸다.
정신 못 차리고 딴짓하거나 산만한 친구에게 ‘넋 들여라’ 하는 게 문제긴 했지만.
70, 80년대에는 왕따나 학생 간 폭력이 적었다고들 여긴다.
그러나 진실은 다른 곳에 있었다.
학교 내 폭력의 주범이 학교 그 자체였었다.
학교가 병영화의 모습을 보이던 시절이었기에,
체벌을 가하지 않는 교사가 드물었다.
학생 간에 괴롭힘이나 싸움이 발견될 시, 단체 얼차려를 받거나 두들겨 맞았다.
그런 체벌로 유지되는 학교 시스템이기에, 학생 간의 폭력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교육 현장에 폭력이 일상화되어, 국가와 사회는 일그러진 학창 시절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나마 구정 국민학교는 강남의 명문화 붐을 받고 있어서 덜한 것이다.
수업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웬 학생이 쪽지를 전해주고 갔다.
“응? 학교 후문 공터서 기다린다고? 사나이라면 나오라고? 누가 보낸 거지?”
발신자도 없기에 그냥 무시해 버리고 집으로 가는 태월이다.
그날 황도복 외에 5명은 두 시간이나 태월을 기다렸다.
황도복은 다음 날 아프다는 핑계로 결석을 했다.
그리고 하교하는 태월을 기다렸고.
“하하, 내가 어제 컨디션이 별로라, 몸이 안 좋아서 당했는데.
오늘 내가 누군지 제대로 알려주마!”
“난 누군지 아는데요? 황도복이라면서요?
알고 있으니, 이만 가도 되죠?”
“하, 이런 시부럴놈이!”
성난 곰처럼 두 팔을 쳐들고 탱크처럼 덮쳐온다.
태월은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척하다가, 전진 점프하며 오히려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무릎을 세워 황도복의 턱을 올려쳐 버린다.
-빠각! 컥! 털썩!
전날과 같이 한 방에 기절이다.
똘마니들을 손보려고 앞으로 더 전진하니, 메뚜기 떼들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국민학생들다운 처신이었다.
그리고 그 황도복은 일주일 후 전학을 갔다.
덕분에 태월에게 시비 거는 사람은 없어졌다.
다른 반 똘마니들도 태월과의 마찰은 피하는 분위기가 되었고.
‘치료비 청구하면 주려고 했는데, 돈이 굳었네. 하긴 병원장 아들이니 필요가 없나.’
오랜만에 태권도장에 들르니, 관원이 많이 보였다.
그런데 성인들이 아니라 체구가 작은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뭐 시간상 직장인들이 올 때는 아니었지만.
“아버지? 관원이 많이 늘었네요?”
“하하하, 너 뭐 하고 다닌 거야? 우리 도장 홍보하고 다녔던데? 아들 덕에 확 늘었어.”
“네? 그런 적 없는데요?”
“에이, 의뭉스럽게 시치미 떼기는, 너 이름 대고 찾아오던데 뭘. 하여간 고맙다.”
황도복을 두 번 기절시켜 얻은, 도장 홍보인 셈이다.
***
토요일이 되어 홍대로 갔다.
설희와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태월은 6학년이지만, 설희는 5학년이 되었다.
3개 학년의 월반은 어렵다고 했다.
“강남에 비하면 여기는 시골이지?”
“아직은 강남도 번화가는 그리 많지 않아.”
“저기 신촌 방향으로 가자. 거기에 1년 반 전에 개관한 극장이 있어. 이화 예술극장이라고.”
“뭐 보려고? 연령제한 있는 거 아냐?”
“SF 영화인데 하워드 덕이라고 어드벤처 & 코미디야. 음, 그런데 중학생 이상 관람가거든. 그런데 미국에선 12세 이상 관람가래.”
“아니 그거든 저거든, 우린 10살인데?”
“너는 10살로 안보이거든? 그리고 내가 오늘 10살로 보여? 아동 영화로 제작된 거라던데, 왜 나이 제한을 둔 건지 모르겠네.”
설희는 조금 화려한 옷을 입어서인지, 중학생은 되어 보였다.
하얀 원피스에 블링블링한 분위기다.
결국 이화 예술극장을 가게 되었다.
“조지 루카스가 감독이 아니고 제작자네? 그리고 감독은 윌라드 휙크? 팝 폭소 감탄 스릴만점, 정말 재미있는 영화! 라고 쓰여있긴 한데. 진짤까? 하여간 표 끊어 올게.”
매표소로 도착했는데, 마침 보고 나온 사람들이 떠들고 있다.
“이 영화 너무 썰렁 유머가 많은 거 아냐?”
“영화가 다 그렇지 뭐. 그래도 그냥 심심하진 않잖아.”
태월이 질겅질겅 껌을 씹고 있는, 매표소 여직원의 눈치를 살짝 보고는 돈을 건넸다.
“중학생 두 장요.”
“학생증 보여야 해.”
“그럼 어른 거로 주세요.”
“얘? 누가 할인 안 해주려고, 학생증 요구하는 줄 아니? 국민학생에게 팔면 안 되니 이러지.”
“저, 이번에 중학교 들어갔는데, 전학 온 거라 아직 학생증을 못 받았어요. 선생님에게 전화해서 바꿔줄까요? 거기 전화기 좀 줘봐요.”
“얘, 이 전화기가 공중전화기인 줄 아니? 아 됐고. 너 진짜 중학생 맞는 거지?”
“네, 일단 한번 믿어 보시라니깐요!”
“너, 이주일 성대모사 하지 마! 연습 좀 하든가. 하여간 그렇다니까. 이 누나가 믿어주마.”
겨우 표 두 장을 구해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지구와 유사한 별에서 TV를 보던 외계인 하워드가 지구에 떨어지며 벌어지는 일이다.
불량배에게 폭행을 당하려는 아가씨를 구출하는 하워드와 록그룹의 여성 리드싱어인 비버리가 만나게 된다.
말하는 오리로 돈을 벌려는 악당들과 싸워나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였다.
“리 톰슨이라는 여배우로 인해 재미가 쏠쏠했어. 오리 인간이 좀 마음에 안 드는 구석도 있었지만, 볼 만은 한 거 같아. 태월은 어땠어?”
“오락 영화로는 괜찮은 것 같네. 그런데 15세 이상인 이유가 중간중간 노출이 좀 있어서 그런 건가 봐. 배고픈데, 뭐 먹으러 갈까?”
“음, 신촌시장 가서 떡볶이랑 오뎅? 그리고 거기 튀김도 맛있어. 또 김밥도 별미야.”
“흐음, 그럼, 거기로 가자. 그리고 오늘 홍익문고도 들러보자. 뭐 좀 살 것이 있거든.”
“응 그럼 잘됐네. 나도 책 사야 하는 게 있는데.”
초저녁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이 다니고 있었다. 시장으로 가는 길에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헐, 설희야 저거 보여? 건널목 오른쪽 골목 입구를 봐봐.”
“어머! 어떡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