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영혼의 울림
사실 태월은 설희가 등장할 때부터, 영혼의 울림이 느껴졌고 가슴이 뛰었다.
영혼을 볼 줄 아는 태월로서는 이상하다고 여기긴 했어도, 아버지인 승철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남자는 이쁜 여자를 보면 가슴이 막 뛰고, 혼이 나가서 멍할 때도 있다고.
조민희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고.
그래서 단지 설희가 이쁘기에, 이런 상황이 온 거겠지 라고 생각한 것이다.
노스님은 두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는 황당해서 사제를 쳐다봤다.
”사제? 저 둘이 이야기가 사실이야?“
“네, 사, 사실입니다. 전에 왔을 때 태월이의 사주를 듣긴 했는데, 참 묘한 우연이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리고 설희는 갓난아이 때부터 봐온 거라서. 사주는 태월과 같은 게 맞습니다.”
“어? 진짜 신기한 일이네요. 사주가 같다니….”
태월이 신기해서 설희를 쳐다보자, 설희 또한 그를 빤히 보았다.
설희도 태월을 처음 볼 때, 기분이 이상했었다. 더구나 사주까지 같다는 소리엔 묘한 흥분도 느꼈고.
태월이가 본 설희의 영혼은 참으로 맑았다.
노스님은 혹시나 하여, 사제를 따로 불러 출생에 관해 물었지만.
쌍둥이는 아니란 말에 우연에 우연이 겹쳤다고 여기며 넘겼다.
전생의 애틋한 인연이려니 하고 말이다.
“이 그림 네가 그렸다며?”
“응, 왜?”
“알 수 없는 기운이 느껴져서….
그런데 무,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편하게 말해봐.”
“너 귀신이 보인다며?”
“헛? 그건 누구에게? 아. 사숙님에게 들었구나. 맞아, 난 어릴 때부터 귀기를 잘 느끼다가 몇 년 전부터 보였어. 영안이 열렸다고 해야 하나? 직접 들으니 무섭지?”
“음, 난 올해 들어서면서 귀신을 볼 수 있게 되었어. 아직 사부님에게는 말 안 했어.”
“잠, 잠깐! 너도 귀신이 보인다고?”
“응, 몇 달 됐어.”
“그 사실을 누가 아는데?”
“엄마밖에 몰라.”
“응? 너희 엄마가 엄청나게 놀라셨겠네? 나도 어릴 때 이거 때문에 엄마가 힘들어하셨거든.”
“뭐? 우리 엄마는 잘했다고 하시던데?”
“엥? 귀신 보는 게 뭐가 잘하는 일이야?”
“우리 엄마도 나처럼 귀신을 보거든….”
“헉! 그럼, 엄마가 무녀나 만신이나 뭐 그런 거야?”
“아니, 그런 거랑은 달라. 영매술사야.”
“아아, 나랑 조금 비슷하구나.
넌 귀신을 보면 뭘 하는데? 푸른 눈이나 빨간 눈도 만났어? 너도 문신 같은 것이 있어?”
“엄마는 그런 걸 못 보는데, 나는 더 크면 볼 수 있을 거래. 영혼까지도 담을 수 있다더라.
그런데 문신은 또 뭐야? 엄마도 그런 말은 없던데?”
이 둘은 생모에게서, 영매력이 누적된 월령주를 흡수하고 영매술을 진언으로 내려받았지만.
차이가 나는 것은 저승의 염라국 탈영병이 준 팔찌 때문이다.
물론 노스님에게서 법문을 배우고 진언을 익히면서 성불을 시키는 걸 하였기에, 태월이 설희보다 다양한 경험을 한 탓도 있기는 했다.
영혼 에너지를 흡수하여 쌓는 것은, 생모의 영매술로도 어느 정도 가능하니까.
그래서 일본의 무녀들이 호족의 영매술을 치열하게 노렸던 것이고.
그러나 팔찌에는 다양한 기능이 있었고, 현재 밝혀진 것은 세 가지다.
첫째는, 흡수되는 영혼 에너지의 정화기능이다. 그래서 오염된 악귀도 가능한 것이다.
둘째는, 그 정화기능으로 정제된 영혼 에너지가, 일정 수치가 넘어버리면 뱉어낸다는 것이다. 아카 같은 영령의 존재로….
셋째는, 영혼 에너지를 매개체로 재능까지도 쉽게 흡수되게 해준다.
더구나 팔찌가 문신으로 변형되면서부터는, 악귀를 집어삼켜 에너지는 물론이고 재능까지도 탈취해 오는 것이다.
생모의 영매술에도 재능을 받아들이는 효능이 있지만, 성공 확률은 희박했다.
더구나 악귀에게서는 에너지 흡수 자체가 불가능하다.
단지 영매술로 받아들여진 에너지로, 신체가 조화롭게 발전하며 영혼의 격이 상승한다.
“엄마에게 너 이야길 해도 돼?”
“그, 글쎄, 우리 엄마는 내가 귀신 보는 걸, 남들이 알까 봐 싫어하셨어. 그건 내가 더 생각해볼게.”
“으응. 그럼 그때까지는 말 안 하고 나만 알고 있을게. 그런데 이 암자에 언제까지 있을 거야? 난 일주일 정도는 여기 있을 거 같던데.”
“나도 그 정도는 있게 될 거야. 며칠 후에 성불시킬 귀신이 있거든.”
“응? 너도 그런 걸 할 줄 알아? 우 와 멋있다. 그런 걸 한 번도 못 봤는데. 나도 따라가서 보면 안 돼?”
설희의 부탁에 잠시 고민을 하는 태월이다.
이번에 맡은 성불은 악령까지는 아니기에, 위험하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
“스님 할아버지가 반대만 안 하면, 데리고 갈게. 대신 좀 떨어져 있어야 해.”
“응, 알았어. 그런데 나도 그림 하나 그려주면 안 돼? 저 그림을 보고 있으면 몸과 마음이 상쾌해져. 아, 저렇게 큰 거 말고, 자, 작은 걸로….”
부끄러워 말끝을 흐리는 설희를 보니, 거절하기가 쉽지 않은 태월이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정말? 고, 고마워. 낼 봐….”
-쪽!
태월의 볼에 뽀뽀를 살짝 해주더니, 숙소로 뛰어가는 설희다.
자신도 부끄러웠는지 달에 비친 얼굴이 분홍빛이다.
뒤에 남은 태월도 멍하니 있었고.
태월은 설희에게 줄 선물로 12호 그림 크기로 결정했다.
치수는 가로 60.6cm에 세로 45.5cm다.
삼베를 말아 화구통에 넣어둔 게 있어서, 그걸 꺼내 여유 있게 맞춰 자른다.
삼베를 펼쳐 그릴 면을 잘 닦은 후, 윗단을 꿰매 봉을 통과시켰다.
그 후, 아교포수한다. 아교포수는 아교를 발라 물감이 잘 먹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화학 물감으로 그릴 땐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만, 천연염료로 그릴 생각이라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다.
닥나무 종이보다 아교의 양은 1.5배 이상 더 든다.
아교포수한 후엔, 삼베에 무게가 생기기에 걸어서 말려야 한다.
집게가 아닌 봉을 써야 올이 전체가 수직으로 가지런하게 된다.
완전히 마르기 전에, 다림질을 한 번 했다.
아교포수한 삼베는 뻣뻣하지만, 다림질할수록 부드러워지는 특성이 있다.
다 말려진 후 12호의 크기에 정확히 맞춰, 여유분을 잘라냈다.
“어머? 그냥 종이에 그리는 거 아녔어?”
“종이로 그린 것은 오래가지 못하잖아. 그리기는 더 쉽긴 하겠지만, 난 천에 주로 그렸기에 이게 더 편해.”
비단 천에 주로 그렸었고, 삼베는 연습할 때 가끔 써보긴 했었다.
비단보다는 투박한 올이지만, 이건 이대로의 멋이 따로 있었다.
커다란 고목 나무의 가지에 두 아이가 나란히 앉아 있다.
그 둘 뒤로 만월이 떠서 세상을 비추고 있다.
아이들 옆 가지엔 부엉이 두 마리가 큰 눈을 껌뻑이고 있고, 기러기 떼가 달을 스치며 저 멀리 날아간다.
반딧불이들이 주변을 서성이며 빛을 모으자, 주변에 피어 있던 꽃들이 그제야 보인다.
빛 속에서 꽃들이 자신들의 꽃 향을, 온 사방으로 다투어 퍼트리기 시작한다.
달의 아이들이 잘 지낸다는 것을, 만월에게 소식을 전하는 기러기. 풍요와 장수를 축원하는 부엉이. 어둠 속에서 둘에게 빛을 뿌려 영혼을 맑게 해주는 반딧불이. 그 후 나무 아래에서 피어난 꽃들의 향연이 이어진다. 꽃 향이 고목 위에 나란히 앉은 둘을 휘감더니, 그림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영혼의 에너지가 팔을 통해 그림에 입혀지고 스며들었다.
화선지를 꺼내 그림 위에 덮은 후, 다림질을 한 번 더 했다.
천수경에 이어 반야심경까지 읊었다.
스며들었던 영혼 에너지들이 일렁인다.
다들 적호도의 신비를 느꼈었지만, 이 그림에서의 또 다른 신묘함에 한 번 더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다 설희가 몰입에서 깨어나며 한마디 한다.
“흰 부엉이인데 눈동자는 황금색이네?”
“응? 눈동자가 황금색인 건 맞는데, 갈색 부엉이를 그린 건데?”
그림 그리는 걸 보고 있던 도명스님이 한마디 한다.
“갈색 부엉이잖아, 그런데 뭐가 희고 또 황금색이야? 눈은 그냥 까만데?”
“스님 할아버지는 어때요?”
“난 부엉이가 하얗긴 한데. 눈동자는 까만데?”
“나는 부엉이가 갈색이고 눈동자도 까매. 도명이와 나만 같네. 다들 왜 다른데?”
태월은 비로소 그동안 몰랐던 그 차이를 알게 된 것이다.
“아, 부엉이 몸을 희게 보는 사람은 영혼이 맑거나 욕심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눈이 황금색으로 보이면, 영혼을 볼 수 있는 거고요. 갈색으로 보이면 병이 없고 건강한 사람이고요. 아마 여긴 없지만, 검게 보이는 사람은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몸에 병이 있어요.”
“험험, 뭐 내가 스님도 아니고 욕심까지 없진 않겠지. 그래도 건강하다니 좋은데?”
“저, 저기. 그런 말씀 하시면 어떻게 해요? 저도 명색이 스님인데….”
도명스님이 원망스러운 눈길을 홍무경에게 보내자, 뭘 보냔 식으로 한마디 한다.
“도명아? 네가 그 욕심까지 버렸다면, 그게 해탈인데. 큰스님들도 이루기 어려운 걸, 네가 이뤘다고? 그게 더 말이 안 되잖아?”
“아, 그렇긴 하네요. 참 신통한 그림이군요.”
“이걸 우리 제자에게 준다 이거지? 이야, 유 회장이란 분은 이런 그림을 몇억에 샀다는 소리잖아? 또 여주에 있는 절에서는 땅 3만 평도 받았더구먼.”
“허허, 사제? 어린 제자 앞에서 무슨 돈타령이야? 그러니 부엉이가 갈색이지.”
“저기? 사형. 태월이도 갈색이거든요?”
“흐흐, 저야 그림 그려서 돈 받고 팔았으니, 갈색이 당연하잖아요. 그리고 땅도 좋아해서, 흰색으로 보일 리가 없지요.”
설희는 사부의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 놀랐다.
그림값이 몇억에 몇만 평의 땅이라니.
그리고 그림 속 아이 둘은 자신과 태월이다.
자신도 뭐라도 줘야겠다고 여기다가, 문득 그에게 어울리는 게 떠올랐다.
‘엄마에게 받은 방울과 종이 있잖아. 방울이야 내가 써야 하니 안 되지만, 그 종은 임자가 없어. 그걸 줘야겠다.’
잠깐 다녀온다면서 숙소로 뛰어가는 설희다.
잠시 후 설희가 다시 왔을 때는 그녀 손에 두 개의 물건이 있었다.
“이 방울과 종은 엄마가 물려받은 거야.
그중 이 방울은 우리 가문의 영매술사가 써온 것이지만, 종은 임자가 없었다고 해.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야.”
방울과 종은 황금색을 띠고 있었다.
한 쌍으로 보일법한데도, 자세히 보면 한 바퀴 둘린 문양의 형태가 좀 다르다.
크기는 어른 손바닥 반만 했다.
태월이 머뭇거리자, 노스님이 나선다.
“범상치 않아 보이긴 해도, 임자가 없는 것이라니 받도록 해라. 한쪽만 안 받으면, 상대는 부담이 커지지 않겠니?”
홍무경도 태월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받았다.
“고맙게 받을게. 그런데 그 방울이랑 이 종이 원래 한 쌍 아니야?”
“따로 내려온 거라던데. 엄마도 알지 못하나 봐. 선조 때부터 내려왔다고 하던데. 가문에서 영매술사가 여자만 있었어. 방울만 썼던 건 아니고, 그 종을 써본 선조분도 있긴 있었어. 그런데 소리내기 벅찼다더라.”
“그런데 이거 금도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