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달의 아이, 설희를 만나다
태월은 조민희의 이야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큰스님에게 들으니 땅의 기운만 읽는 게 아니라며? 사람의 기운도 읽는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림에도 기운이 서려 있다고 하고.
엄마도 네 그림을 보면 많은 걸 느끼거든.
그래서 엄마도 아들이 특별하다는 걸, 인정하고 살기로 했어.”
면접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노스님의 이야기를 조금 착각한 조민희다.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 즉 귀신의 기운을 읽는 걸 잘못 해석한 거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조민희 말이 어느 정도 맞았다.
최근 들어서 도깨비 문신이 성장함에 따라, 산 사람의 영혼도 조금씩 색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맑은 영혼과 회색 영혼, 그리고 조금 시커먼 영혼의 3단계 흑백 정도로….
투명해파리 사건으로, 도깨비의 송곳니 4개가 푸른빛으로 변한 그 이후부터다.
처음엔 잘못 본 거라 여기고 무심코 넘겼지만,
반복되자 그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산 사람의 영혼을 읽는 건,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영혼 에너지를 활용해야 가능한 거지만.
조민희의 착각이 엉뚱하게 들어맞은 것이다.
“맑은 사람과 탁한 사람 정도예요.”
“응? 그럼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란 거잖아? 이번 면접에 딱 맞네. 뭐.”
그 두 가지가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크게 보면 별반 다르지 않기에 고개를 끄덕거려 준다.
한세건설이라는 회사 측과 미팅을 했다.
실무자끼리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사이 태월이 하는 일은, 대표와 함께 나온 임원을 살피는 것이 전부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TW 투자&개발’이란 회사 대표가, 어린 아들을 왜 이 자리에 데려왔지?
라는 의문이 들었겠지만.
‘대표란 사람은 회색인데, 전무란 사람이 까만데? 일의 주도도 전무가 나서서 하고 있고….’
태월은 메모지에 간단하게 표시해, 조민희에게 넘겼다.
-사장 △ 전무 X
“한세건설의 자료는, 일주일 내로 살펴보고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조민희가 당차게 말을 한다.
“아, 서류를 보시면 다 아실 건데, 또 검토가 필요할 게 있나요?
공사실적, 시공 능력 평가서까지 성실하게 작성되어있습니다.”
“그게 전부이잖습니까? 부외부채나 하자보수, 그리고 복잡한 권리관계에 관해서도 우리가 확인해봐야지 않나요? 이건 성실하게 작성된 게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것은 빠져 있어 보이네요. 다시 채워 오시는 거로 알겠습니다.”
‘오, 엄마가 확실히 달라졌네.’
한세건설에서는 TW라는 회사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신생기업이다 보니, 만만히 봤다.
그래서 불리한 것은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것이다.
‘TW 투자&개발’이 자리를 뜨자, 오상호 대표가 박 전무를 째려본다.
“아니 이게 뭡니까? 서류를 성실히 준비한다기에, 믿고 맡긴 건데. 제가 봐도 낯뜨겁네요? 저들이 바보입니까? 한두 푼도 아니고 깊게 조사하면 다 드러날 일인데.”
“다 밝히면 대체 뭐가 남습니까? 제가 이 회사에서 근무한 지 20년입니다. 노력에 대한 보상은 받아야지 않겠습니까?”
박 전무의 노력이란 말에, 오상호는 속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솟구치는 걸 느꼈다.
이마에 핏대가 저절로 그려지는 오상호다.
“노오력요? 맨날 접대 골프나 다니면서, 흥청망청 써대던 분이 할 말은 아닌 듯하네요.
회사가 어려워졌다고, 청수건설에 저희 입찰가까지 노출하신 거 내가 모를 줄 압니까?
거기서 얼마를 또 챙긴 겁니까? 그리고 지금 보니 이 장부들 새로 만든 것 같은데, 그전 장부는 어디 있습니까?”
“하하, 기껏 회사를 키워 놨더니, 이런 소리까지 듣네요? 여기저기 상납도 하고 접대를 했기에, 회사가 이렇게 큰 것입니다.”
“회사를 키워요? 규모만 커진 것이지. 실제 수익은 오히려 줄었습니다. 늘어난 건 회사 부채와 박 전무의 딴 주머니 아닙니까? 회사가 적자인데도, 이번에 강남 아파트까지 사셨던데? 그 돈은 어디서 났던 거지요?”
“그게 왜 궁금한데요? 증거나 내밀고 그딴 말씀 하시죠? 본인의 무능을 왜 남 탓합니까?”
“허, 뭐 이런….”
조민희는 매물로 나온 8개의 건설사 중에서, TW의 조건에 근접한 4개의 회사를 후보로 올렸다.
일단 세한건설을 보류하고, 다음 약속이 잡혀 있는 건설사들을 만나러 갔다.
“어휴, 신생기업으로 알고 눈퉁이나 치려는 곳밖에 없구나. 아들 오늘 힘들었지?”
두 건설사도 문제가 있었다.
“그래도 아직 하나가 남았잖아요?”
“그래, 거기라도 정상적인 회사였음 좋겠네.”
세영건설이라는 건설사인데, 대기업 하청의 재하청을 주로 맡아 하던 곳이다.
그러다 하청 공사자금이 계약과는 달리, 6개월 어음으로 집행되자 자금 흐름이 막혀 버렸다.
그걸 현장 소장을 통해 어음깡을 해서 임시로 틀어막아 보지만, 적자 누적은 피할 수 없었다.
원청업체의 짜고 치는 돈놀이에 몇 번 이용당하고 나니, 부채가 더욱 커져 회사 유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부채를 떠안는 조건으로 10억이면, 총 30억이 인수가격이네요?”
“그래도 여기 평택 포승읍 쪽에 회사소유 1만 평 땅이 있습니다. 올해 12월에 국제 무역항이 들어서는 곳이니, 회사 자산 가치로는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그 땅도 결국 담보로 은행에 잡혀 있는 거 아닌가요?”
“담보율이 너무 적게 잡혀서, 가치는….”
태월은 세영건설의 사장 최성국에게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반투명한 색을 보았다.
저 정도면 양심과 신뢰를 지키며, 사업을 해왔을 거라고 태월은 생각했다.
그리고 임원 중에도 검은색은 없었고.
-대표 O 임원 △
태월이 적어준 메모를 본 조민희는 표정이 밝아졌다. 이틀간의 수고가 그나마 헛되지 않았기에, 기분은 좋아졌다.
“서류에 적힌 것 외에도, 실사 조사는 저희가 할 것입니다. 일단 인수금액 10억과 부채 떠안는 방식엔 응하도록 하지요.
단, 조사 중에 누락 된 부분이 있으면, 인수금액에서 제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달 밀린 급여는 정식 계약이 체결되면, 바로 나오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사도 문제지만 직원들 생계도 걸린 일이라, 다들 마음고생이 심했네요.
그럼, 임원급은 전부 해고가 되겠군요.”
“아니요. 현재의 임원은 절반만 줄이고, 기존 직원들의 해고는 없습니다.”
임원직 전원 사퇴를 예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직원들 인원 감축도 없다고 하니, 그제야 얼굴이 펴지는 최성국이다.
태월은 임원 4명 중에서 두 명만, O 표를 다시 찍어주고는 밖으로 나왔다.
아마 세영건설 최성국 대표는 이제 월급 사장으로서, TW 건설을 맡게 될 것이다.
이로써 산곡마을의 공사는, TW 건설에서 하게 되었다. 규모는 아직 크진 않아도, 직접 삽을 뜨게 된 첫 사업이라는 데 의미가 있었다.
***
9월이 가고 10월도 지났다.
“아들? 진짜 월반은 생각 없어? 담임 선생이 전화까지 주던데.”
“엄마는 어떻게 생각해요?”
“학교에서 배울 게 없다는데, 그러다 보니 매일 딴짓한다며? 그거 동급생들에게도 좋은 게 아니잖아.”
“전 딱히 상관없는데, 반 분위기론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꼭 월반해야 한다면, 3학년에서 6학년으로 할게요. 그리고 중고등은 검정고시로 가고요.”
“그리고 대학?”
“아뇨, 대학은 나이에 맞춰 들어갈게요. 고등학교 검정고시 끝내면, 학교에서 알려주지 않는 다양한 공부를 할 생각이에요.”
“뭐, 뒤처지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괜찮아 보이네. 하긴 너무 어릴 때 천재 취급받아서, 학교를 일찍 졸업한다고 꼭 좋은 건 아니라더라.
아빠도 내 생각과 같을 테니, 성인 될 때까지 하고픈 거 있으면 다 해봐.
엄마, 아빠가 응원해줄게.
그런데 이번 주말에도 관악산 올라가니?”
“흐흐, 네. 엄마도 쉬러 오세요. 그럼, 학교 문제는 그렇게 하는 거로 알고 있을게요.”
태월은 1학년을 그리 보내고, 새 학기가 시작되자 3학년으로 한 학년 월반했다.
3학년이 되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름 방학엔 음양오행을 배우며, 현장 학습 다녔다. 명당이라 불리는 곳을 황서윤과 함께 돌아보는 일이다.
또 겨울 방학엔 시간을 내어 스님 할아버지와 귀신들을 성불시키러 다녔고.
‘다른 산엔 귀신들이 종종 있던데, 관악산에만 없네? 큰불의 기운이 넘치는 곳이라서겠지.
음기가 거의 없다 보니, 그곳엔 잡아먹을 악귀가 안 보여.’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올라오는 길 쪽에 눈 좀 쓸어야겠더라.
낮부터 내리던 눈이 아직도 오는구나.”
“내일 누가 오시나 봐요?”
“사제가 온다고 하더구나. 아마 제자 자랑도 할 겸 인사를 오는 거겠지.”
“아, 그러고 보니 사숙님에게 제자가 있었다고 듣긴 했는데, 저랑 동갑이라 그랬죠?”
“여자아이인데 나이가 그렇다고 하더구나.
더 어릴 때 한 번 잠시 보긴 했었지.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아이도 달의 기운이 느껴지던데? 그리 생각하니 너희 다 달이네.”
“여자는 원래 남자보다 음기가 강하니, 달의 느낌이야 흔하지 않나요?”
“그 정도가 아니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거지.
하여간 만월의 요정처럼 꽤 귀엽더구나.”
“흐흐, 불교에서 요정이란 단어도 쓰나요? 요괴 아녀요?”
“허허허, 그래 하여간 이쁜 요괴였어.”
아침 일찍이 일어나 도명스님과 함께 삽으로 눈을 퍼 날랐다.
다행히 아침에 되어 눈이 그친 것이다.
손수레까지 가져와서 입구로 오는 길을 치워나갔다.
4시간 정도를 치우자, 차가 다닐 만한 길을 겨우 확보할 수 있었다.
하얀색 자가용 한 대가 그 길을 따라 올라오고 있다.
“안녕하세요? 사숙님!”
“오! 태월이구나? 잘 지냈어? 안 보는 사이에 많이 컸구나. 인물도 훤해졌고.”
사숙 홍무경의 뒤로 하얀 털옷을 입은 여자애가 따라 내린다.
스님 할아버지가 농담으로 그런 줄 알았는데, 정말 눈의 요정이나 달의 요정 같았다.
어릴 때부터 오밀조밀하게 이목구비가 미리 자리 잡으면, 성인이 됐을 때 그게 오히려 단점이 된다.
얼굴선이 자리 잡힌 상태서, 성장기를 거치면 얼굴 비율이 조화롭지 못하다,
좀 여우 같아진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 아이는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고 서글서글하게 생겼다.
멀리서도 눈에 확 뜨인다고 할까?
“이리 와라, 설희야. 요 앞에 있는 사질은 네 사백님의 제자란다. 나이는 너랑 동갑이고.”
“안녕? 난 박태월이야.”
“응, 안녕. 난 홍설희. 사부? 그런데 뭐라고 불러요? 사형? 사제?”
“사형이나 사제는 사실 같은 사부를 두었을 때, 칭하는 거긴 한데….”
사질 간에 호칭에 대해 고민하는 중에, 큰스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느라고 수고했다. 그리고 그런 걸 뭘 따로 고민해? 둘 다 높여 사저와 사형이라 부르든가. 그게 아니면 생일을 따져서 하면 되는 거고.”
노스님이 태월을 잠시 쳐다보자. 태월이 먼저 자신을 소개한다.
“난 양력으론 10월 5일, 음력으론 8월 15일 자시야. 넌 어때?”
태월의 소개에 홍무경은 그제야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 특이함을 그동안 잊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설희의 눈이 놀란 듯 커지며, 얼떨떨해한다.
“어 어? 나, 나도 그런데? 시간도 자시고.”
“뭐? 에이…. 사숙! 얘, 지금 장난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