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폭풍의 크리스티 경매장
퇴원한 알베르토가 연락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나요?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조건부 경매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조건부? 경매?”
“태월 군, 두 작품 이야기예요. 경매는 하되, 낙찰자는 전시가 끝나면 가져가는 걸로요.
비엔날레 작품들이 대부분 전시를 통해 판매도 하거든요. 또 이번에 한국에 들어가면, 다시 여기 오기 쉽지 않으니. 이참에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긴, 여긴 너무 멀긴 멀더라고요. 거의 20시간 가까이 걸리니…. 그런데 전시가 11월까지가 아닌가요?”
“좀 길게 남긴 했으나, 낙찰자 입장에서도 더 반길 겁니다. 낙찰 후에도 전시가 이어지면, 그 가치가 더 상승할 게 뻔하니까요.”
“엄마는 어때요? 그게 나을까요? 사실 돈이 그리 필요한 건 아닌데.”
“필요한 건 아니긴 해. 그러나 아들이 그걸 쭉 소장하려면 몰라도, 팔 생각이 있다면 이참에 해결하는 것도 괜찮다고 봐. 여긴 아들 말대로 너무 멀어, 너도 이제 한동안은 그림은 쉬면서 재충전할 거라며?”
조민희의 말에 동감을 표하며, 알베르토에게 의사를 전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시면 되겠네요.”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최고의 가치로 만들어야지요.”
“그런데 알베르토? 금화가 두 개 있어요.
그래서 이것도 경매를 하면 어떨까 싶어요. 하나는 이미 1979년에 경매에 낙찰된 적이 있거든요.
7년이 지나긴 했지만, 가치가 어떨지 궁금했거든요.”
한국에선 금화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을 듯하여, 이번 방문에 가지고 오긴 했었다.
그러다가 그림에 관심이 커지게 되자, 거기에 시간을 뺏겨 알아볼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그림이 경매를 하게 된다니, 같이 해봐도 좋을 듯했다.
더구나 지켜본 바로는 알베르토가 영혼의 느낌상 태월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리고 태월로 인해 몸의 병을 미리 고치지 않았던가.
“금화요? 어떤?”
“미국 금화예요. 1787년과 1933년이에요.”
“그럼, 잘되었네요. 골동품 쪽은 크리스티와 소더비가 양분하고 있죠. 뭐 당연히 1위는 아직도 여전히 크리스티고요.”
“1933년 금화는 미국에서 회수조치를 하려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미국에 있을 때도 알아보지 않았거든요.”
“오, 그럼 아주 잘된 거군요. 이번 그림 경매를 추진하려는 회사가, 소더비가 아니라 크리스티거든요.”
“네? 뭐가 다르죠? 둘 다 영국기업 아닌가요? 전 그렇게 알고 있거든요.”
“3년 전, 즉 1983년에 미국 사업가 알프레드 타우브먼에게 인수됐거든요. 폴란드계 유대인 사업가인데, 쇼핑몰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입니다. 어쨌든 노력은 하고 있지만, 지금까지는 소더비가 크리스티의 아성을 넘진 못하고 있지요.”
“크리스티가 해주면 괜찮겠네요. 그런데 금화 같은 경우, 등급을 매겨주는 그레이딩 기업인 PCGS가 있던데요. 그 회사를 통해 진품 여부부터 봐야 좋다고 하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글쎄요? 그레이딩 회사라는 게 훗날은 어찌 될지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좀 부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단지 주화를 플라스틱 홀더에 밀봉하여 기술적 가치만 따지는 테크닉이 전부거든요.
통용전이 주는 사용감에서 나오는 역사성과 미적 아름다움을 일축해 버리는 것이죠.
저도 주화 쪽은 전문가가 아니니, 뭐라고 하긴 뭐합니다만, 고대 동전이 흠집 하나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요즘 시대의 주화들이라면 몰라도요. 그런 흠집들을 공산품의 불량품 찾아내는 시각으로, 깎아 내려간다는 게 우습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하, 그런 면이 있었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럼 이 주화는 어떻게 하지요?”
“그러잖아도 그림 경매 문제로, 근처에서 담당자가 저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하, 바로 오라고 하면 되겠네요.”
전화를 건 후 10분 정도 되었을 즈음, 페도라를 쓴 50대 남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알베르토 씨 그리고 판타지 아티스트 군. 저는 크리스티의 안드레아입니다. 전화상 듣기는 했지만, 경매 수락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 그리고 금화를 의뢰하신다고도 들었습니다만?”
“하하, 안드레아 씨 숨넘어가겠습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고, 그리고 얘기를 합시다.”
“안녕하세요. TW입니다.”
신문에 이름이 T.W.로 소개된 이후로, 태월 박이라고 소개하면 어려워들 했다.
발음이 힘들다 해서 예명으로 TW를 쓰는 중이다.
금화를 두 개 내밀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일단 공개했다.
“왼쪽 금화는 7년 전에 경매에 오른 적이 있는 금화고요. 오른쪽은 미국에서 발행된 것인데, 정부에서 전량 강제 회수해서 녹여버린 걸로 알려진 금화입니다.
그래서 소더비보다 크리스티를 택한 것이고요.
문제는 없을까요?”
“하하, 저희가 미국기업이 된 소더비도 아니고, 저희는 대영제국의 기업입니다. 문제는 전혀 없습니다.”
대영제국이란 옛 호칭을 쓰는 것을 보니,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그럼 미국에 기가 눌릴 일은 없어 보이니, 오히려 다행이랄까.
“의뢰서와 위탁증을 그럼 작성하겠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아들이 미성년자이기에, 법적 보호자로서의 필요서류를 작성하시면 되고요.
경매는 어떤 사실을 더 부각하느냐? 그리고 어떤 정보로 VIP 고객들의 소유욕을 불타오르게 할지가 관건이죠. 그런 걸로 볼 때, 미국의 환수 소멸조치는 오히려 호재입니다.”
태월이 생각한 약점을 오히려 장점이라고 평가하는 안드레아를 보고, 한 수 배웠음을 느끼는 태월이다.
그렇다고 해도 53년밖에 지나지 않은, 골동품이라는 100년의 세월도 채우지 못한 금화다.
그래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서류작성을 마치고 나서, 안드레아는 금화 두 개를 가지고 돌아갔다.
그렇게 생각지도 않은 일정이 더 늘어나게 되었다.
경매는 일주일 후에 진행되기로 하였으며, 그동안 태월과 민희는 이탈리아의 관광을 다녔다.
유럽에서 프랑스, 스페인 다음으로 여행객들이 많은 곳이 이탈리아다.
로마제국의 유적들과 르네상스의 중심지답게 볼 것이 산재해 있는 곳이다.
이탈리아는 영어가 어느 정도 통하는 곳이라, 태월과 민희의 관광에 불편은 그리 없다.
알베르토의 호의로 관광청에서 직원까지 나와 가이드를 해주기도 했으니.
로마의 콜로세움, 트레비 분수 그리고 포로 로마노의 팔라티노 언덕,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아우구스투스 개선문, 카이사르 포룸, 여사제의 집….
산탄젤로 성, 판테온, 나보나 광장, 캄피돌리오 광장, 베네치아 광장의 베네치아 궁전.
스페인 광장의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
포폴로 광장의 보르게세 미술관,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트라야누스 광장의 발렌티니 궁전.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산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퀴리 날레 궁전, 카리칼라 욕장. 카타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 미술관.
이 많은 곳을 6일간 다녔는데, 저게 전부 로마 안에 있는 것이다.
밀라노, 나폴리, 피렌체는 가보지도 못했고, 그사이 여유시간이 다 소비되었다.
“아들? 그런데 여긴 도로의 차들이 하나같이 신호를 안 지키네? 이래도 되는 건가?”
태월도 궁금하여 관광청 직원에게 물으니, 이탈리아 북부나 남부 하나같이 이런 식이라고 씁쓸하게 대답해주었다.
“두 분이 여행했으면 더 민망할 일도 있었을 겁니다. 관광객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배낭여행 갈 때, 여자친구와 이탈리아를 가지 말고 남자친구와 스페인을 가지 마라’. 라는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남자들은 여자를 밝히고, 스페인은 여자들이 밝힌다는 의미죠.”
“호호호, 난 아들과 다니는데, 문제는 없겠네요? 그런데 소매치기를 두 번이나 보게 됐는데, 치안이 너무 허술한 거 아녀요?”
태월이 통역을 해주자, 관광청 직원이 머리를 긁적인다.
“민낯을 보게 되니 저도 난감합니다. 로마와 베네치아 그리고 프랑스 파리는 소매치기가 극성일 정도로 유명하긴 합니다.
친절한 척하면서 접근하면, 오히려 조심해야 합니다.”
“덕분에 편안한 관광이 되었네요. 수고하셨고요.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을 대접하고 싶은데….”
“하하, 저도 판타지 아티스트 가족분과 좋은 시간을 보냈는걸요.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바로 가봐야 할 일이 있어서 그건 저도 아쉽습니다. 그럼 남은 시간 좋은 일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숙소 앞에서 관광청 직원과 헤어진 태월과 민희는, 늦은 저녁을 먹으러 근처 식당을 찾았다.
‘어? 지붕 위에 저놈은 악귀네? 여기서 뭘 하려고 저러지?’
눈 빨간 귀신과는 대화 자체가 그리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태월이다.
손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가랏!’
-쉬 아악! 큭! 끄륵….
요리사의 복장을 한 남자 하나가 피자를 만들고 있다.
밀가루를 넓게 펴 만든 도우 위에 치즈와 소스, 그리고 다양한 해산물로 토핑을 올린다.
화덕을 여는 그의 얼굴이 보인다.
30대의 뺀질거리는 남성의 얼굴이 태월의 얼굴로 바뀐다.
“Che ne dici di quella pizza?”
‘헉! 갑자기 나오네? 피자 만드는 재능인 줄 알았는데? 이탈리아어가 재능? 그럼 요리 실력은 별로였단 소리잖아?’
“피자? 이탈리아에서 20일 가까이 있었다고 벌써 이탈리아 말을 하는 거야? 맞지?”
“흐흐, 그냥 익숙해졌나 봐요. 스페인어랑 비슷한 면도 있거든요.”
이탈리아어는 스페인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등등은 라틴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음식 문화에서도 그걸 자주 접하기도 하는데, 특히나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는 유사했다.
그리고 방금 들어온 재능이 없었다 해도, 얼마 가지 않아 태월 스스로 구사할 수 있긴 하다.
로마 관광 때도 간단한 말들은 알아들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조민희는 아들이 피자를 먹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지, 피자 그림이 그려진 음식점으로 앞장섰다.
아침이 되자 알베르토가 숙소를 방문했다.
“지금 가면 될 것입니다. 경매가 끝나면 바로 한국으로 갈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미리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알베르토 씨 덕에 잘 지내다 가게 되었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려요.”
“자 이제 가실까요. 두 분?”
알베르토의 차를 타고 경매장이 마련된 장소인 로마로 이동을 했다.
그의 말대로 경매가 완료되면, 로마에서 바로 한국으로 갈 비행기표도 예약해 놓은 상태다.
로마에 도착해서는 크리스티 경매회사에서 나온 안내직원을 따라 경매장으로 향했다.
그들에게는 오늘 4건의 경매를 의뢰한 격이 되는 태월은, 그야말로 오늘의 VVIP다.
태월과 민희는 주최 측에서 제공한 2층 관람실에서 경매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게 해주었다.
여러 품목의 경매가 진행되었고, 태월의 첫 의뢰품인 1787년 미국 금화가 올라왔다.
사회자는 1979년에 72만5천 달러에 낙찰되었었음을 알리고는, 30만 달러를 시작가로 잡았다.
70만 달러가 넘어가면서부터, 조민희는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있다.
경매가는 그대로 더 치솟더니, 150만 달러에서 멈추었다.
7년 전보다 두 배나 껑충 뛴 것이다.
옆에 앉아 있던 알베르토는, 두 배 정도는 골동품 경매에서 흔한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다음 경매 물품은 1933년 문제의 그 미국 금화다.
시작가는 방금, 전에 비해 소소했다.
10만 달러로 시작한다.
‘저 정도만 해도 난 만족스러운데.’
몇 번의 경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 금액이 왜 저래요?”
옆에 앉았던 알베르토도 벌떡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