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태월의 손짓에 후폭풍이….
알베르토가 데려간 곳은 5천 명 정도가 관람 가능한 공연장이었다.
작업실 정도만 생각했던, 태월에겐 황당한 규모였고.
“아들? 너무 큰 거 아냐? 여기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겠어?”
“그러게요. 몰입만 되면, 못 할 거야 없는데.
그걸 관객 입장에서는 어떻게 비칠지 모르겠어요. 지루해하지 않을까요?”
“아들이 그릴 때 이런 분위기가 방해만 안 된다면, 지루해하고 안 하고는 별개의 문제잖아? 그런 거야 여기 사무국에서 알아서 할 일이고.
엄마는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고 여겨.
미리 성공을 점칠 필요도 없는 거고, 실패해도 그 자체로 또 다른 경험 아니겠어?
엄마는 도전 자체가 더 아름답다고 여겨.
이제 8살인데 앞으로 겪을 일이 얼마나 많겠어? 이럴 땐, 아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만 해.
그 외 다른 건 다 어른들에게 맡기면 돼.”
“흠, 태월 군? 나도 자네 어머니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네. 화가에겐 그리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다른 건 부차적인 문제지 않나.
어쨌든 이런 곳에서의 현장 작화라.
하하 생각지 못한 발상이긴 하네.”
모자간의 대화를 듣던 고영후의 생각이다.
태월에게 싱긋 웃어주더니, 옆에 있던 하동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 생각은 어때?”
“나도 동의하네. 한국의 작가 중 하나로서 욕심을 낸다면, 이번 일이 잘되면 좋겠어.
변방으로 취급받는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다면, 국가관 개관도 빨라지지 않을까 싶은데.”
고영후와 하동진은 겉으로는 크게 표를 내진 않았지만, 태월이 본선 진출까지 확정되었다는 말에 놀랐다. 한발 더 나아가, 사무국에서 이런 이벤트까지 열어준다는 것에는 꽤 충격이었다.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까지는 이들이 모르고 있다.
태월은 다음 날, 아침 일찍 공연장에 나와서 준비물들을 점검했다.
알베르토는 손에든 주스 음료 하나를 태월에게 준다.
“오늘 잘 부탁하네. 필요한 일은 또 없는가?”
“200호 액자가 필요합니다. 혹시 벼락 맞은 나무를 구할 수가 있을까요? 그걸로 액자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먼저 낸 작품도 그 액자이기도 하고 제 그림에 플러스 요인이 되거든요.”
“호오, 그렇다면야 꼭 구해보도록 하지요.
하하 벼락 맞은 나무 액자라, 그것 자체만으로도 이슈에 도움도 되겠네요.”
뭔가 또 흥행에 도움이 될 아이템을 발견했다고 여겼는지, 사무국 부하직원을 불러 지시를 하고 있다.
알베르토가 이렇게 적극적인 이유는, 최소한 실패하지 않으리라 확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월의 실력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고.
한국에서 그렸다던 다른 그림에 대해 태월이 작품과 함께 첨부했었지만, 확인은 굳이 안 했던 사무국이었다.
그러다 어제 일로 더 확대되자, 한국에 있는 이탈리아 대사관 지인에게 직접 확인하게끔 했었다.
절 두 곳을 다녀온 것이다.
“아들? 그런데 대추나무여야 하는 거 아니야? 이탈리아에 대추나무란 게 있나?”
“꼭 대추나무일 필요는 없다고 봐요.”
“그럼 왜 대부분이 벽조목인데?”
“그건 대추나무가 벼락을 잘 맞는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나무에 비해, 속에 철분이 많이 있어서 벼락 맞을 확률이 큰가 봐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제사상에 보면, 과일 중 우두머리가 대추잖아요?”
“오? 아들이 똑똑하네? 왜 우두머린데?”
“조율이시라고 하는데, 대추ㆍ밤ㆍ배ㆍ감의 순서로 배치하잖아요.”
“맞아. 제사상에 놓는 과일의 기본 4가지.”
“대추는 씨가 하나이므로 임금.
밤은 한 송이에 3톨이 들어있으므로,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인 삼정승.
배는 씨가 6개 있어서 육조 판서인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 판서.
감은 씨가 8개 있으므로 우리나라 팔도를 각각 상징하잖아요.”
“와, 난 순서는 알지만, 그거까진 몰랐는데. 진짜 우리 아들 똑똑하네. 그래서 그 우두머리로서 의미도 있다, 이거네?”
“흐흐, 그냥 제 생각이에요.”
“엄마가 갑자기 든 생각인데. 앞으로 아들이 그림을 그릴 때마다, 벽조목 구하는 고생을 안 해도 되게끔 해야겠네.
한국에 돌아가면 벼락 맞은 나무를 왕창 사놓자. 회사 명의로 매입도 하고, 또 돈이 되면 유통도 해보고. 호호호.”
나가는 세금 때문에, 겸사겸사 회사를 차린 것이다.
부동산 개발이야 전문가들에게 맡기면 된다.
조민희가 직접 할 게 하나도 없던 차에, 심심했던 그녀에게 소일거리가 생긴 것이다.
오전 8시 30분이 되었다.
공연장 단 위에 200호 치수, 가로 259.1cm 세로 193.9의 거친 마포로 된 캔버스가 설치되었다.
그런데 그 캔버스 위에는, 연한 푸른색의 비단 천이 밀착되어 씌워져 있다.
아교를 먹이고 다시 그 위에 백악을 린시드유, 포피유로 녹여서 칠한, 일반적인 캔버스와는 달랐다.
한국에서 태월이 직접 만들어온, 쪽 염색된 비단을 사무국에서 전날 오후에 제작한 것이다.
물론, 태월의 요구에 맞춘 주문 제작이다.
9시 정각이 되자, 관객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전날 오후부터 부랴부랴 홍보를 시작했지만, 발 빠르게 기자들까지 섭외해서 언론에 퍼트렸다.
‘[A special event] 7살 천재 화가
Real-time, On-site drawing 전’
객석은 5천 명이라는 인원이 30분 만에 다 차버렸다.
출품한 작품처럼 8시간씩이나 그릴 순 없었다.
‘영혼 에너지가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늘었어. 최대한 몰입하여 빠르게 끝낸다.’
천년 묵은 투명해파리가 축적해놨던 수만 수십만의 영혼 에너지가 정제되어, 영령인 ‘아카’를 탄생시켰다.
맑은 영혼의 에너지만 도깨비가 내뱉은 것일 뿐, 절반 가까이는 문신 속에 여전히 녹아 있었다.
도깨비의 주식은 악귀의 더럽혀진 영혼이다.
캔버스 양쪽 끝에 사무국 직원 둘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쪽으로는, 폭 30cm 높이 50cm 가로 2.5m의 긴 발판이 높여있다.
그 위에 140cm의 키를 가진, 태월이 서 있는 것이다.
200호의 화폭을 그리려면 필수품이다.
오른쪽 위 일부와 왼쪽 아래쪽을 오려진 신문지로 커버하고, 전체 면을 분무기로 살포한다.
밝은 살구색이 뿜어지며, 캔버스를 장악했다.
직원들이 곧바로 나와 배경식으로 칠해진 바탕 위를 드라이기로 말리고 있다.
갈라짐과 황변 현상은 살구색에 미약하게 섞인 영혼 에너지로 문제를 해결했다.
양 구석 면에 붙여놓은 신문지는 제거했다.
발판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물감이 짜놓은 커다란 팔레트를 든 남자 하나가, 태월의 이동 위치에 맞춰 보조한다.
그런데 가만 보니 하동진 화가다.
태월을 돕기 위해 스스로 자처한 거다.
아기가 그려지고 옆에 새끼 고양이도 그려 넣었다.
아이가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지, 정면을 보면서 갸우뚱한 표정이다.
아이의 왼손이 고양이의 등에 올려져 있다.
고양이 머리 위로는 나비 일곱 마리가 날아다니고, 그걸 호기심으로 쳐다보는 고양이다.
경면주사들과 유성물감과 홍화씨 오일이 사용되었다.
나비들의 날개는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고 세밀했다.
번뇌를 벗어난 자유로움을 알려주고 있었다.
고양이의 털도 방금 목욕시킨 것처럼 보송하고, 털 하나하나 소묘하듯이 휙휙 늘어났다.
자신도 날개가 있다면 저렇게 날 수 있을까? 그런 호기심 가득한 고양이의 시선.
아기의 왼손은 고양이에 가 있지만, 오른손은 바닥 면을 쓰다듬고 있다.
아기의 입가는 꾸밈없이 맑은 미소다.
나비 한 마리는 아기의 머리에 앉아 날개를 살랑거린다.
여기저기서 탄성과 말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태월의 귀는 영혼 에너지를 두른 터라 아무것도 안 들린다.
몰입하여 자신의 세상을 창조해 나갈 뿐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자신도 몰랐다.
거의 완성 되었고, 마지막 몇 가지만 남았을 뿐이다.
손을 두 번 흔들자, 하동진 화가가 또 다른 분무기를 가져와 손에 쥐여준다.
내용물은 그림용 투명 바니쉬다.
투명 코팅을 해서 보존도를 높일 요량도 있지만, 영혼 에너지를 함께 섞어서 뿌릴 생각이다.
왼손의 문신에서 영혼 에너지가 바니쉬 분무와 함께 쏟아져 나왔다.
푸른빛이 그림 속으로 곳곳으로 스며들었고, 바닥 면과 바탕 면인 살구색이 살아나고 있다.
아기의 미소와 눈빛이 더 신비해졌으며, 고양이와 나비는 살아서 움직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는 천수경에 이어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나직이 읊조렸다.
그러자 스며들어 있던 푸른빛들이 일렁거렸다.
그게 놀이라고 생각했는지, 뜬금없이 아카가 튀어나와 그림에 또 영혼의 푸른빛을 뿌렸다.
‘헐, 뭐 좋으면 좋았지 나쁘진 않지만, 엉뚱하게 마무리를 아카가 해버렸네. 아 시간이 얼마나 흘렀으려나.’
“동진 아저씨! 이제 끝났어요.”
“어어? 어? 끝, 끝난 거야?”
그림 작업을 도우면서 바쁘다 보니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그러다 바니쉬 분무 때, 비로소 그림 전체를 보게 된 것이다.
그 후부터 얼이 빠져 있는 하동진 화가다.
그가 도와줬기에 감사의 인사로 고개를 살짝 숙인 후, 뒤로 돌았다.
이제 관객들에게 끝났음을 알려야 했고, 지켜봐 준 것에 감사도 드려야 한다.
고개를 꾸벅 숙여서 인사를 했는데, 별 반응들이 없다.
의아해져서 자세히 보니, 관객들도 멍하다.
그중 몰입에서 깨어난 관객이 하나 있었는지, 혼자 박수를 요란하게 해댔다.
비로소 다른 관객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짝짝짝! 짝짝짝짝! 짝짝짝! 짝짝!
-휘이익! 휙! 휘휙!
-찰칵! 찰칵! 찰칵! 촤르르!
“와! 아무리 천재라지만, 이제 7살이라며?
그리고 저게 2시간 걸린 그림이라고?
기성작가도 며칠 걸려야 완성될 그런 그림 같은데.”
“그림에 순간 빠져 숨도 못 쉴뻔했어. 대체 저 그림은 뭐지? 아기를 본 건데, 왜 인생을 경험한 기분이 들지?”
관객들은 환성과 함께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했다.
휘파람 소리는 사방에서 메아리처럼 퍼지고, 플래시가 번쩍이고 카메라는 쉴 새 없이 찰칵거렸다.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리고 허리를 펴는데, 순간 살짝 현기증을 느끼는 태월이다.
지켜보던 조민희가 재빨리 나와 부축한다.
“와! 아들 진짜 고생했어! 많이 피곤하지? 저쪽으로 가자.”
그림에 빠져서 헤매고 있던 알베르토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태월에게 빠르게 갔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잠시의 양해를 구하고, 휴게실로 모자를 안내했다.
작품 해설 시간도 필요했기에, 관객들은 떠나지 않고 태월을 기다리며 감상을 나눈다.
“저 까만 새끼고양이는 굉장히 요염한데?”
“응? 여보? 저 고양이 갈색 얼룩이인데요?”
“뭐? 저게 얼룩이라고? 올블랙인데, 무슨 소리야?”
“아들? 저거 하얀 고양이잖아? 너희 지금 웃자고 하는 소리지?”
87살의 아버지가 하얀 고양이라고 하자, 아들과 며느리가 동시에 휙 쳐다본다.
“아버지는 왜 또 그래요?”
“그럼 너희 저기 나비 색도 하얗지 않다고 하겠네?”
“네?? 나비가? 까만 나비인데?”
“여보? 당신 진짜 왜 그래? 저거 노랑나비 아냐?”
감상평을 나누다 말고 관객들은 혼란에 휩싸였고, 대화가 번질수록 소름마저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