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멕시코 코즈멜섬
멕시코의 유명한 휴양도시인 칸쿤에서 60km 떨어진 곳에, 멕시코에서 가장 큰 섬인 코즈멜 섬이 있다.
배를 타고 35분 정도만 와도 도착하는 거리로, 생각보다 가깝다.
섬의 동부 해안은 거칠고 파도가 높고, 서부 해안은 산호초가 잘 발달되어 있다.
수상스포츠의 낙원으로 알려지면서, 멕시코와 가까운 미국인들의 크루즈 선들이 일주일에 2~3번씩 들어오는 휴양도시이다.
멕시코 본토와 세계 곳곳에서 들어오는 여객선들이 정박하는 산미구엘(산미겔).
이국적인 바와 레스토랑에서 선보이는, 싱싱한 해산물 요리와 트로피컬 음료는 여행자들의 입맛을 자극한다.
쇼핑 품목으로는 다양한 보석과 금, 은으로 만들어진 수공예품이 유명하다.
화려한 천으로 만든 의류와 시원한 테킬라도 기념품으로 인기다.
호텔마다 자리한 나이트클럽에서는, 밤마다 흥겨운 축제가 벌어진다.
살사와 팝, 일렉트로닉 음악이 밤새 거리에 울려 퍼진다.
코즈멜 섬의 심장인 산미구엘에서 태월 가족은 쇼핑 중이다.
“멕시칸의 로망! 카리브해의 낭만!
여기가 바로 그 코즈멜이라 이거지?
그리고 그 코즈멜의 중심이 여기 산미구엘!”
“당신? 자꾸 그 안내 책자 따라 읽는 거, 그만 안 할래요? 아 창피해. 펀치 칵테일에 테킬라 한 잔 공짜라고 주는 것, 냅다 마시더니….”
“엄마, 여기 수공예품은 재료비가 꽤 들어갔겠어요. 가격이 좀 가겠는데요?”
“호호, 그렇지? 그랜드케이맨섬의 수공예품은 거의 목각이 많았는데, 여기는 보석과 귀금속으로 만든 게 꽤 되네?”
“제가 금화 잘 세팅해서 액세서리로 드릴게요. 목걸이로 괜찮죠?”
“억, 난 네 아빠 때문에 골동품 별로야.
그리고 나하고도 안 어울려. 정 주고 싶으면 금화 대신, 여기 걸로 대신해줘.”
“아요. 그럼 좋은 걸로 골라보세요.
금화 대신이니 비싼 걸로 하세요.”
“호호호, 좋아! 아들에게 비싼 거 하나 선물 받아보자.”
“태월아? 나도 금화 대신 하나 골라도 돼?”
“하하 그러세요. 두 분이 세트로 될만한 것 하셔도 되고요. 아니면 각자 취향대로 하셔도 나쁘진 않고.”
“호호, 아들! 난 세트는 반댈세!”
“흠흠, 나도 싸나이! 로망에 맞추려고 했습니다. 조 여사!”
그런데도 고른 건 두 사람 다 팔찌였다.
비록 세트는 아니었지만.
승철은 순금으로 만들어진 팔찌에 Animum fortuna sequitur라고 라틴어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 걸로 선택했다.
“아니뭄 포르투나 세퀴투르”
세공업자가 그 글귀를 라틴어로 발음해주며, 그 뜻을 말해준다.
“‘행운은 용기를 뒤따른다.’라는 뜻이래요.”
“오오! 좋은데? 난 그럼 이걸로!”
크루즈에서 행운 탓을 하던, 승철다운 선택이었다.
민희는 다이아몬드가 7개 박힌 팔찌였는데, 가운데 다이아몬드가 작은 다이아몬드 6개를 거느린 모양새다.
거기에도 라틴어가 새겨져 있었다.
fiat tibi, sicut vis.
“‘피앗 티비 시쿳 비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라는 마태복음서 15장 28절 말씀 중의 일부입니다.”
세공사의 말을 그대로 통역해주니, 엄마는 글귀도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해했다.
승철의 팔찌는 1,100불이고, 민희의 팔찌는 3,300불이었다.
한화로 따지면 100만 원과 300만 원짜리인 셈이다.
1986년 화폐가치로는, 대기업 신입사원의 4달 치 월급과 일 년 치 월급이니 적은 돈이 아니다. 민희는 부담을 느꼈다.
“어? 너무 비싸다! 나 안 살래.”
손을 저으며, 차고 있던 팔찌를 내려놓았다.
세공업자와 옆에 있는 판매업자는, 목표 고객이 구매를 포기하려고 하자 물주를 설득하기로 했다.
두 사람에게만 팔아도, 오늘 목표액은 달성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와서 점포세가 많이 올라, 매출을 올려야 하는 사정도 있었다.
아들로 보이는 꼬마가 왜 돈이 많은지는 이유까진 몰랐지만, 카드를 꺼내는 것만 봐도 그 애가 물주였다.
그 꼬마만 물건을 고르지 않았기에, 가능하다고 여긴 것이다.
“저게 가격이 비싼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그 가운데에 박힌 다이아몬드 가격 때문입니다. 가격을 깎아 드릴 수는 없지만, 그 대신 행운의 기회를 드릴 수 있습니다.”
비싸더라도 사줄 생각을 한 태월이다.
“행운요? 그게 뭔데요?”
최근 들어 행운이 겹치는 기분도 들기에, 호기심이 갔다.
세공업자가 판매 직원에게 눈짓하자, 바닥 구석에 놓인 상자를 꺼내 올려놓는다.
“과거에 저희가 관광객이나 선원을 상대로 보석 판매뿐만 아니라, 전당포 업무도 같이 했었습니다.
지금은 그 업무를 하지 않습니다.
찾아가지 않은 물건들은 기간이 지났기에, 저희 소유가 된 것이지요.
길게는 오십 년 전 골동품 같은 물건도 있고, 삼 년 전 것도 있습니다.
꼬마 손님에게 하나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드리지요. 어떻습니까?”
사실 그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진실이었다.
그러나 돈이 될만한 귀금속이나 보석은 이미 처분했고, 가치가 애매한 것들만 남은 것이다.
태월은 어차피 살 것이라, 공짜라고 하니 고르기로 한다.
오래된 회중시계, 오래된 녹슨 팔찌, 알 수 없는 문자로 기록된 책, 녹음기, 사진기, 망원경 등등이었다.
“이 회중시계와 녹슨 팔찌는 뭔가요? 이런 것도 전당포에서 받아주나요?”
“아, 이건 이 책과 함께 선원들 몇이 가져온 것인데, 어떤 섬에서 발견한 유물이라는데….
그 당시 감정하던 영감이 무턱대고 받아준 것이죠. 그래서 점장이랑 그 일로 다퉜지요.
왜 받아줬냐고 물으니, 느낌상 가치가 있어 보여서랍니다. 어이없는 일이었죠.
결국 3일 후에 해고되어 이곳을 떠났습니다.
그게 50년 전의 일이라고 합니다.”
“골동품 가게에는 연락 안 해보셨나요?”
“당연히 해봤지요. 원주민 섬에서 이런 유사한 것이 종종 나온다며, 헐값으로 달라기에 안 팔았답니다. 이렇게 고객분들에게 행운의 기회로 드리는, 아이템으로 써먹는 중이지요.”
“이 세 개가 같이 나온 것이면, 일단 이 책을 고를게요. 그리고 회중시계와 팔찌는 제가 살 수 있나요? 그러면 제 부모님이 고른 것은, 바로 사겠습니다.”
세공업자와 판매 직원은 잠시 의논을 하더니 다시 왔다.
저 행운의 기회를 주는 아이템은 매출로 잡히지 않는 물건들이다.
판매할 때 여건에 따라 써먹는 물품들인지라, 점주도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두 사람이 나눠 가질 생각을 한다.
“그럼 두 개 해서 100달러를 주세요.”
“네, 그렇게 할게요.”
“100달러는 현금으로 주시겠습니까?”
태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드를 내밀었다.
이 카드는 그 마이애미 항구의 폐선박 집하장에 잡혀 있었던, 그 여자 귀신의 선물이다.
비밀금고에 있던 바하마 제도의 익명 카드다.
아직 그 안에 든 금액을 확인하지 못했기에, 이참에 사용 가능한지 확인차 내민 것이다.
그게 안 되면 다른 카드를 주면 될 일이고.
100불을 따로 꺼내 그들에게 주었다.
“어? 아들! 안 산다니까?”
“흐, 엄마! 그냥 제 선물이니 사고 싶어서 그래요. 딱 엄마가 차야, 이 팔찌는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거예요.”
“호호호, 그렇다면야. 내가 살려줘야지.”
-띠 리릭!
4,400달러가 아무 문제 없이 결재되었다.
승철과 민희는 자신들이 산 팔찌를 들여다보느라, 태월이 내민 카드를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태월이 원래 쓰던 카드와 색도 비슷해, 더 그랬을 것이다.
그곳을 나와 주변 풍경을 돌아보고, 또 쇼핑센터 중 제일 크다는 라 에스메랄다도 둘러봤다.
신발과 액세서리, 수공예품, 채색 도자기 등을 팔고 있었지만, 특별히 눈에 가는 건 없었다. 그리고 귀국 시 짐이 너무 많아지면, 그것대로 곤란하기에 굳이 사진 않았다.
“아들! 점심때가 되었어. 오늘 점심은 뭐로 할까? 먹고픈 것 없어?”
“해산물 요리!”
“어, 아까 지나오다 본, 그 집에 가면 되겠다.”
카사로타 레스토랑이라고 적혀있는, 멕시코 집밥 같은 그런 메뉴들이 있는 곳이다.
주메뉴는 바다에서 그날그날 잡아 올린 신선한 해산물 요리.
쇠고기를 넣어 만든 타코와 케사디야 등의 멕시코 전통음식 메뉴였다.
야외 정원 한쪽에는 로스 트레스 토노스 테킬라 박물관과 숍이 자리한다.
로스 트레스 토노스 테킬라는, 멕시코 최대 아가베 농장이 자리한 할리스코에서 생산되는 명품 테킬라다.
꽃무늬가 그려진 접시가 세팅된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니, 해산물과 멕시코 전통 고기 요리가 나왔다.
기분 좋은 여행의 소감들을 이야기하며, 즐거운 식사 자리를 가졌다.
야외 정원에 있는 테킬라 박물관을 보면서, 승철은 기어코 한 병을 샀다.
“아유, 그거 들고 다니면 관광할 때, 안 불편해? 차라리 올 때 사면 될 것을.”
“하하, 올 때 깜빡할 수 있잖아. 하여간 이 정도 크기면 문제는 없어.”
“네네, 그럼, 알아서 하세요. 힘이 남아돌아 쓸 데가 없으신 분이니.”
시간에 맞춰 크루즈에서 제공한, 액티비티 가이드를 따라 스쿠버 다이빙 체험장으로 갔다.
아들이 수영을 제법 잘하는 걸 알게 된 부부가, 셋이 함께하는 이 체험학습을 신청한 것이다.
코즈멜섬의 서부 해안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환경을 가진 스쿠버 다이빙 명소 중 하나다.
덕분에 스쿠버 다이버 사이에선 꿈의 무대와도 같은 곳.
어느 곳에서도 본 적 없는 또렷한 바닷속 풍광은, 신기함을 넘어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이곳에선 한 편의 3D 영화를 감상하듯, 수많은 물고기와 산호초를 눈앞에서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스노클링으로 몇 번 연습해본 후에, 본격적으로 스쿠버 다이빙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장비를 입고 차는 법,
어떠한 방법으로 숨을 쉬는지에 대한, 기초적인 부분부터 하나하나 가르쳐줬다.
강사로부터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는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배웠다.
“어머? 당신 래시가드는 왜 그래? 너무 작은 거 아냐?”
“어? 난 타이트한 게 좋아서. 이 정도면 멋지지 않아?”
“호호, 당신 특대 아바이순대 같아 보여.
속을 너무 넣어서, 곧 옆구리 터질 왕순대!”
“헐….”
민희의 말대로 승철의 래시가드는 좀 작긴 했다. 미국 와서 너무 잘 먹고 다녀서인지, 배도 더 나왔고.
장비들을 열심히 체결하고, 슈트도 입었다.
일반 수영장서 입는 슈트와는 다르게, 이곳 바다에서는 5mm 두께 이상 입어줘야 한다.
대형 보트를 타고 나가 입수를 훈련했다.
내려진 줄을 잡고 같이 내려가면 되었고, 그나마 시야가 맑아 강사의 수신호를 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다리 아래로 물고기 떼들이 지나가는 신비로운 장면에, 설레기도 하고 흥분도 되는 태월 가족이었다.
“어? 저거 난파선 아닌가요?”
“하하, 네. 여기 종종 저런 것들이 있습니다.
음, 특히 저 배의 주변엔 가능하면 가지 마세요. 대형문어가 사는지 잡아당긴다고 하네요. 사고 난 적도 있었고요.”
그러잖아도 조금 전부터, 귀기를 느끼던 태월이었다.
‘과연, 저 난파선엔 누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