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뜻밖의 횡재와 크루즈 승선
그곳엔 파란 머리의 20대쯤 보이는 여자 귀신이 있었다.
같은 악귀라고 생각해, 존대하지 않는 태월이었다.
그런데 고개 돌린 여자는 눈이 빨갛지 않았다.
“어? 악귀가 아니네요?”
“그, 그런데 누구? 귀신은 아닌 거 같은데….”
“불안해하지 마세요. 여기 있던 악귀들은 소멸했어요.”
대화를 거는 와중에 해치운 귀신들의 능력이 이전되는지, 조금 멍했다.
세 명 중 하나는 생전에 스포츠 댄스 강사였고, 다른 하나는 수영 강사였다.
두 명에게서만 들어 온 걸 보면, 모든 능력이 이전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나머지 한 명이 생전에 별다른 능력이 없었거나.
“나, 나는 잡혀 왔어. 처음엔 쉴 곳을 마련해주고 도와준다길래 온 건데, 그게 아니더라고. 그런데 전부 소멸한 거 맞아? 이 방에 있던, 그놈의 기척이 사라진 건 맞긴 하는데….”
“이놈들 셋 외에도 대장까지 없앴어요.
그런데 왜 죽고 나서 바로 가지 않았죠? 이승에 이루지 못한 미련이라도 남았었나요?”
“난 내가 왜 죽었는지를 몰라. 그래서 이들이 도와준다길래 멍청하게 따라온 거고.”
자신이 왜 죽었는지 모르는 귀신은 처음 보았다.
“네? 보통은 다 알게 되지 않나요?”
“호텔에서 잤을 뿐인데, 내가 죽어있더라고.”
그녀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태월이다.
“그래서 지금도 짐작 가는 것이 없고요?”
“아니, 이놈들이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대충 가능성이 큰 이유를 알게 되긴 했어.”
그녀는 유일한 재벌 상속녀였다고 한다.
그래서 후 순위에 있던 사망자의 사촌이, 손을 썼을 거라고 악귀들이 말했단다.
“그럼 미련이 남은 이유가 상속?”
“이젠 그런 건, 필요 없잖아. 그리고 실제 사촌 집에 가서 확인도 했고.
어릴 때 남매처럼 자랐는데, 돈 때문에 날 이렇게 한 건 그냥 둘 수가 없었어.
그래도 막상 조카들을 보니 마음이 약해져서, 그 자리서 복수할 마음은 버렸어.”
복수했었다면, 눈이 붉어졌을 수도 있다.
복수한다고 모든 귀신이 악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업장에 따라 달라진다고 노스님이 말하긴 했지만,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그럼 미련 때문이 아니라, 여기 잡혀 있었던 거예요? 이놈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다.
“맞아. 셋이서 돌아가면서 가는 걸 방해했어. 내가 너무 약해서인지, 무기력하게 갇혀 있었어. 너는 방해하지 않을 거지?”
“이승에 미련이 더는 없다면, 승천해야지요. 그걸 도와주는 게 제 역할입니다.”
“아, 고마워.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어. 악귀들로부터 구해준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
은행 비밀금고에 내가 놔둔 게 있어.
사촌도 모르는 건데.
뱅크 오브 아메리카 마이애미 지점에 있어.
암호는 7A658H32. 비번은 51442. 잘 적어둬. 나 이제 갈게.”
기억력에 자신 있는 태월이, 8자리 하나와 숫자 5개를 기억 못 할 리가 없다.
태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환하게 웃는 그녀다.
‘믿는 종교엔 상관없겠지? 어쨌든 승천하면 되는 일이니.’
“옴 아모카 바이로자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 훔!
옴 아모카 바이로자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 훔!
옴 아모카 바이로자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 훔!”
광명진언을 읊조리자, 그녀는 푸른빛으로 변하며 하늘로 솟았다.
그 속에서 빛줄기 하나가 태월에게 쏘아진다.
말을 타고 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2시간 정도를 달려 다다른 곳엔, 별장으로 보이는 집이 있었다.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온다.
씻고 나와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차를 한잔하고 있다.
그녀의 뒤로 진열장이 보이는데, 우승 트로피들이 몇 개 있었다.
전부 승마와 관련된 대회였다.
차를 음미하며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이 태월의 얼굴로 변해갔다.
“헐, 조랑말이라도 구해야 하나….”
그녀가 떠난 자리에, 두 손 모아 합장의 예를 표하고 돌아섰다.
이제 그 아이스크림 가게로 가야 한다.
“호호호! 아들 내가 좀 늦었지?”
“그리 안 늦었잖아요. 뭐 20분 지난 건데.”
“태월아, 이 아빠 아니었으면, 넌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했을 거다. 다 내 덕인 줄 알라고.”
아빠의 양손엔 쇼핑백이 가득하다.
“아들에게 무슨 구라를 쳐요? 내가 어련히 알아서 자제했을 건데.”
“설마? 행여나….”
양손에 있는 쇼핑백을, 태월에게 보라는 듯이 들어 올린다.
조민희의 등짝스매싱이 바로 날아왔지만.
다음 날 태월 가족의 아침은 분주했다.
아침 식사는 간단히 토스트로 때우고, 혹여나 빼놓고 가는 것은 없는지 점검하고 있다.
그 사이에 태월은 아침 산책을 다녀온다면서 밖으로 나간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 마이애미 지점으로 가주세요.”
능숙한 영어로 택시 기사에게 요청하니, 고개를 끄덕여 차를 출발시킨다.
조수석에 앉은 태월은, 그 기사가 브레이크와 액셀 페달을 밟는 걸 유심히 보고 있다.
기어 조작하는 것도 눈치껏 보며, 도착지에 당도했다.
“어서 오세요. 꼬마 손님. 뭘 도와드릴까요?”
은행으로 들어가니 안내직원이 용건을 묻는다.
“비밀금고에서 물건을 찾으러 왔습니다.
보호자가 있어야 하나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말 그대로 비밀 금고잖아요? 암호만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가능합니다. 암호를 가진 자가 주인인 거죠.
담당자에게 안내할 테니, 따라오세요.”
안내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안경 낀 40대의 흑인이 있었다.
“안토니? 여기 이 꼬마 손님이, 비밀금고를 이용하려고 왔어. 잘 안내하라고!”
“하하, 네 알겠습니다. 손님? 이리로 오세요.”
컴퓨터의 자판에 앉아, 태월이 불러주는 암호를 입력했다.
“A열 17번에 보관되어 있네요. 문을 열어줄 테니 들어갔다 오면 됩니다.”
열어주는 문 안으로 들어간, 태월은 이곳이 목욕탕의 사물함 같다고 여겼다.
A17번이라 써진 곳엔 다이얼패드가 있었고, 5자리의 숫자를 누르니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어? 이건가 보네.”
서류 봉투 하나와 반지 하나가 전부였다.
반지를 봉투 안에 넣고는 금고를 나왔다.
“손님. 전부 찾은 건가요?”
“네, 이것이, 전부예요.”
“그럼, 비밀금고 계약은 해지해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리고 택시 좀 불러주시겠어요?”
“네, 그렇게 하도록 하죠.”
택시 뒷좌석에 앉아 서류를 열어본다.
서류의 첫 장은 바하마 제도에 있다는 섬에 대한 것이다. 가명으로 된 작은 섬의 소유권에 대한 설명으로, 한 장 가득 채워져 있다.
그리고 다른 서류에는, 바하마 제도 은행에 예금된 통장에 대한 것과 암호가 적혀있었다.
섬의 등기권리증과 신분증 그리고 통장 카드도 보인다.
반지는 그 소유자의 인장이라고 했고.
‘가명으로 된 것이니, 누가 쓰든 상관이 없겠네. 그런데 바하마 제도는 또 어디지?
더 자세히 알아본 후에, 기회 봐서 엄마에게 말하면 되겠지.’
“아들, 산책하는 데 왜 이리 오래 걸렸어?
뭐 아직 시간 여유는 있지만, 괜히 걱정했잖아. 찾으러 나갈 뻔했다니까.”
“시내 구경하다가 좀 그리됐어요. 이제 가죠.”
셋은 택시를 타고 카니발 드림 크루즈가 정박해 있는 곳 근처에 내렸다.
Baggage Drop-off라고 적혀진 곳에서, 수하물을 부쳐야 했다.
“엄마? 수하물 담당 직원에게는 팁을 기본으로 드려야 한다고, 기사분이 알려줬잖아요?”
“아, 맞다. 호호호 깜빡했네.”
10불을 꺼내 내미니, 50대로 보이는 흑인 아저씨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준다.
수하물 태그를 출력해서 엄마에게 전해줬다.
수하물마다 각각의 태그를 붙이고, 접수를 마쳤다.
보안 검색을 위해 받기 위해 줄을 섰다.
그나마 일찍 온 것이라서 10분 정도만 소요되었다.
가족들 뒤쪽으로는 점점 줄이 길어지고 있었으니, 다행인 것이다.
보안 검색을 마치고 체크인하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여기도 공항처럼 절차가 많네. 늦게 왔으면 고생할 뻔했어.”
“그러게, 사람들이 너무 많네.”
10여 분을 더 기다리자, 태월 가족의 순서가 되었다. 방 열쇠와 Sail & Sign Card를 받았는데, 카드는 승선-하선 시 신분 확인을 위한 용도의 카드였다.
이 카드를 위해 신분 확인을 위한 즉석 사진도 찍게 되었다.
그들이 받은 카드는 블루 카드였다.
“어라? 왜 우리 카드만 파란색이지? 저기 봐봐 다른 사람들은 색이 다르잖아.”
박승철의 말에 태월이 직원에게 이유를 물었다.
“우리 카니발 크루즈는 처음 이용하는 고객에겐 누구에게나 블루 카드를 드립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크루즈도 비슷합니다.”
“그럼 다른 카드는 어떤 게 있는데요?”
“VIFP CLUB이라고 하여, 5개의 등급이 있고요. 블루 카드, 레드 카드, 골드 카드, 플래티넘 카드, 그리고 최종적으로 다이아몬드 카드가 있습니다. 높은 카드로 갈수록 많은 혜택이 주어집니다. 예를 들어 레드 카드인 경우, 무료 음료 한 잔을 주지요.”
“그럼 젤 높은 등급인 다이아몬드 카드를 받으려면, 조건이 어떻게 되는데요?”
“간단합니다. 200일 이상 크루즈 여행을 하시면 됩니다.”
“헐!”
백수가 돼야 가능할 조건 같았다.
그리고 레드 카드의 혜택이란 게 겨우 음료 한 잔이라는 소리에, 태월의 가족은 그에 대해 신경을 껐다.
승선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사진사들이 여기저기에 많이 보였다.
크루즈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그걸 즉석 인화해서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호호, 우리도 저걸 찍자. 기념도 되고 좋을 것 같네.”
사진이 나온 것을 보니, 다양한 배경 폼을 사용해 작품처럼 보이게 만들어져 있었다.
크루즈 컨셉의 가짜 배경이나, 크루즈 안에서의 식사 장면 그리고 기항지에 도착한 날을 찍는 식이었다.
드디어 줄을 서서 승선하게 되었다.
선내에 들어서니, 배를 탔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승선하게 되면 바로 3층 로비에 가게 되어 있었다.
이미 로비에 위치한 바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간간이 보인다.
태월의 가족이 예약한 곳은 8층에 있었다.
짐을 내려놓고는 발코니를 통해 바다 풍경을 잠시 감상했다.
“와 드디어 말로만 듣던 크루즈 여행이란 것을 해보게 되네.”
“호호호, 바다 빛깔이 참 곱네. 여기도 이런데, 카리브 해안은 얼마나 멋질지 기다려지네.”
10분 정도를 그렇게 감상한 가족은 시장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여보? 밥 먹으러 가야지 않겠어? 아침도 부실하게 먹었는데.”
“그래요. 저도 좀 고프긴 하네요.
아들? 뷔페로 갈까? 아니면 다른 레스토랑으로? 먹고 싶은 거 없어?”
“음 그러면, 파스타를 한 번 더 먹고 싶어요. 그러니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가요.
거긴 아빠가 좋아하는 요리도 많을걸요.”
“어? 그게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