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여긴 20세 이상 미술대회거든요?
황소라는 소리에 조민희는 눈을 껌뻑인다.
“응? 이상하네. 피곤해서 그런가?”
피곤하다고 소 색깔이 다르게 보일 리 없을 터였다.
“그, 글쎄요.”
검은 소에 대한 생각은 금방 잊고, 다시 감탄에 빠지는 조민희다.
“와, 정성이 대, 대단하네. 비단이라서 그런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림을 그린 비단 천의 가는 올이 어렴풋하게 보여.
그것보다 진짜, 여기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 같아. 우리 아들 정말 대단하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고는, 정성 들여 전체 사진과 부분 사진들을 따로 찍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은 1차가 작품 사진심사다.
작품출품자는 박태월로, 서류는 우편으로 접수했다.
“어? 심사관님? 이거 사진상으로만 봐도 심상찮은데요?”
“오, 진짜 그럴듯하네. 이거 중진 작가 작품 아냐? 그리고 이거 규격 맞는 건가? 사진으로 봐선 크기가 이상한데?”
“아니요. 박태월이라고 쓰여있는데요?
에이, 설마 작품규격도 모르고, 준비했을 리가요.”
“뭐, 그래도 한번 알아보기나 해. 그러고 나서 문제없으면, 그때 1차 통과시켜.
전은서! 너 전에도 덜렁대다가 혼난 거, 기억 안 나냐?”
“어머! 언제 적 일을 아직도 끄집어내세요?
은근히 뒤끝 있으시구나.”
“허, 너나 잘하세요.”
전은서가 박태월의 신상 서류를 보려던 차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 어머! 너 오랜만이다. 미국서 돌아온 거야? 오! 완전히 돌아왔다고? 어머 좋다.
오늘 그러면 홍대에서 볼까? 응. 은미도 오라고 할게. 호호호. 너 그런데….”
수다를 떨면서 딴짓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박태월의 서류를 생략해버렸다.
그 덕분에 1차 통과자로 분류되었고.
사흘이 지나자 집으로 전화가 왔다.
대신 전해주라는데 무슨 말인가 싶었다.
일주일 후 2차 작품 접수를 한다는 내용이며, 실제 작품을 출품하는 것이다.
이번엔 특별히 대형 200호 규격이기에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액자 맞추는 가격이 좀 나갔다. 100만 원 정도가 지출된 것이다.
한국미술협회 세미나실에 가져가기 위해 도명스님이 힘을 써줬다.
단골 탑차를 이용하여 안전하게 이송시킨 것이다.
“어머! 아니 이게 뭐야?
누가 이렇게 그림 크기를 몰상식하게!
40호 그림을 내라니까 200호 그림이 왜 나와?”
그림이 커다란 천에 씌워져 있었기에 속을 보지 못했다.
“전은서? 여기 2차 심사 예정자 작품들 오는 데 아니야? 저 큰 그림은 대체 뭐야?”
“잠, 잠시만요. 박…. 태 월?
응? 어디서 본 기억이 나는데?”
후다닥 참가 서류를 뒤지며, 박태월을 찾았다.
“으아악! 으앙!”
“야! 너 전은서 미쳤어? 왜 소리 지르고, 울고 그래?”
“박, 박태월이 국민학생이에요. 그것도 1학년!”
“뭐? 아니 대체 무슨 황당한 일이야? 8살짜리가 왜 20세 이상이 참여하는 미술대전에 참가하게 된 건데? 아니 그보다 1차 통과는 어떻게 가능했어?”
“그, 그게. 저도 잘….”
“담당자가 모르면 누가 알아? 아 답답하네!”
전은서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홍 심사관의 언성까지 높아지자, 주변에 있던 직원들의 시선이 모여졌다.
더구나 막 세미나실에 들어오던, 한국미술협회 회장인 윤지훈의 눈에도 그 광경이 들어왔다.
“홍 심사관? 무슨 일인데, 이렇게 흥분했어?”
“아, 협회장님! 죄송합니다.
아 1차 심사 때 잘못된 처리가 있어서요.”
“누가 누락이라도 되었어? 아니면 청탁이라도 왔었나?”
“아, 그게 아니라. 휴, 8살짜리가 1차 사진심사에서 통과했습니다.”
“하하하, 홍 심사관, 지금 농담하나? 그게 어찌 가능해? 서류 자체 통과도 안 될 일인데.”
“그, 그게 저도 잘….”
“뭐, 그거야 반려시키면 되는 일이잖아?
그런데 왜 8살짜리가 이런 데에 출품해?
크레용으로라도 그렸나? 주변에 어른들은 뭘 했길래, 아이가 이런데 출품하게 해?
그래서! 그 크레용 그림은 어디 있는데?”
홍 심사관은 어이없어하는 협회장의 눈치를 보며, 천에 감싸인 액자를 가리켰다.
“이, 이겁니다.”
“야! 나 웬만하면 직장에서는 말을 막 하진 않는데, 8살짜리가 뭘 한다고 이런 큰 걸 그려?
이, 이거 한 200호 되지?”
“네, 200호짜리입니다.”
“그래! 크레용으로 이렇게 큰 곳에 그림을 잘도 그렸겠다!
진짜 이게 8살짜리, 그 애 거 맞아?
아니, 아니지. 정신 나간 미술가가 아니고서야. 40호 규격대회에서 200호를 낼 리 없잖아. 진짜 크레용 그림인지 함 봐야겠어.
그거 천 걷어봐!”
홍 심사관과 전은서가 천을 풀어냈다.
-화아악!
그림에서 빛이 나오는 느낌이 들어, 순간 다들 눈을 깜빡였다.
“어, 어어? 저, 저 그림이 출품작이라고?”
더듬거리는 협회장의 말에 그제야, 손에 든 천을 바닥에 내리고 그림으로 시선을 향하는 홍 심사관이다.
“헉!”
협회장 윤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그림 가까이 다가와 멍하니 응시했다.
주변 직원들도 하나둘 모여들었고 조용해졌다.
10분 정도가 지나자, 협회장이 숨을 내뱉는다.
“휴, 이 그림 누가 그렸는지 모르지만, 그림을 보고 나니.
한 10년쯤 세월이 지나버린 느낌이야.”
“저, 저기. 그 8살 박태월 그림이 맞는데요?”
전은서가 더듬거리며, 그림 하단에 적힌 작가 서명을 가리킨다.
푸른 글씨로 태월이라고, 그림 속에 박혀 있었다.
“미술대전에 실격이고 아니고의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어차피 밝혀지면 우리 협회가 개망신을 좀 당하긴 하겠지.
일단 진짜 8살짜리 것인지, 확인부터 하자.
자네 이름 뭐라고 했지? 그 애 연락처 줘봐.”
“전, 전은서입니다. 연락처는 여기에….”
접수서류 한 장을 내민다.
-띠리링! 띠링!
“아, 혹시 박태월 학생인가? 아, 하하.
다름은 아니고 여긴 한국미술협회네. 그 대한민국 미술대전 주최하는 곳일세.
아 다름이 아니고, 음, 조금 오해가 있어서 그러는데….
뭐? 신문에 나온 공고대로 다 했다고?
그, 그럼 그 신문도 좀 가지고 왔으면 하네.
그리고 보호자 모시고 같이 왔으면 좋겠는데?
응? 가능하면 오늘이나 낼 시간을….
아! 오늘 된다고? 그럼 기다리겠네.
주소는 바로 보낼 테니. 아, 누구냐고?
협회장일세.”
전화를 끊고도, 윤지훈은 그림을 보고 있다.
옆에서 그림을 보는 홍 심사관을 발로 톡 건든다.
“홍 심사관! 만일에 이 그림이 규격에 해당하고, 성인이라면 심사등수는?”
“등수에는 없습니다. 아마추어라고 하긴 힘듭니다. 아니, 기존 중견 작가도 이렇게 그리지 못합니다. 규격 외 등급이네요.
이걸 보자니 제가 인생 잘못 산 거, 아닌가 하는 기분까지 오더라고요.
특히, 저기 까만 소가 특이합니다.”
“응? 무슨 소리야? 저거 황소잖아!”
“어! 어! 저거 흰 소인데요?”
홍 심사관은 까만 소라고 하고, 협회장은 누렁이고 전은서는 하얀 소로 보였다.
“야, 너희 둘 다 색맹이야? 저게 왜 까맣고 하얀데?”
“저기, 혀, 협회장님! 색맹에 흑백은 상관없는데요. 그리고 진짜 제 눈엔 하얀 소가 맞아요.”
전은서의 변명이 이상하게 들려서, 다른 직원들을 쳐다보는 협회장이다.
“너희도 말해봐! 저 소가 대체 무슨 색으로 보여? 설마 너희 짜고 치는 건 아니지?”
“저는 황소가 맞습니다.”
“하하! 거봐라, 이것들이 진짜….”
“저, 저는 까만 소입니다.”
“저도 까만 소….”
“전 황소로 보이는데요?”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협회장은 전은서에게 손짓했다.
“요 그림 앞에 보드를 하나 갖다두고, 전 직원들이 1시간 내로 투표하게 해.
까만 소, 황소, 하얀 소로 각자 투표하라 해.”
협회장은 1시간 후에 온다고 하곤 자리를 떴다.
업무를 잠시 보다가 다시 내려온 협회장은, 화이트보드에 적힌 숫자를 보곤 어이없어했다.
“뭐야? 61명 중에 까만 소가 29명? 황소가 29명? 하얀 소가 3명? 왜 같은 소를 보고 이렇게? 미술협회가 그림 색도 못 보나?”
“저, 저기, 협회장님!”
“아, 자네가 전은서지. 왜?”
“예를 들어 까만 소라고 해도 검은색이 다 다릅니다. 좀 이상해서 제가 색상대조표로 검정 계열의 색을 보여주니, 또 그 안에서 색이 갈라지더라고요. 흰색도 아주 하얀 색과 조금 베이지색으로 보이는 직원도 있고….”
“아니, 피카소가 이 소를, 추상화로 그리기라도 했어? 왜 보는 사람마다 다른데?”
“그것만이 아니고요. 저 그림 안의 사람들 표정도 다 다르게 보더라고요.
저기 동자승을 보면, 제 눈에는 환하게 웃거든요.”
“뭐? 저 동자승이 왜 웃어? 심통 나 있구먼.”
“거봐요. 저하고도 다르잖아요.”
“진짜야? 저게 웃는 거로 보여?”
“저 노인의 왼발이 앞에 있죠?”
“무, 무슨 소리야? 오른발이 앞에….
뭐? 발 위치도 달리 보인다고?”
협회장 윤지훈은 순간,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나, 나, 잠시 쉴 테니까. 저 그림 경비 서게 하고. 태월 학생 오면 연락해줘!”
***
“누군데 그러니?”
“아, 이번에 미술대전 주최하는 한국미술협회라는 곳 협회장이라던데요?”
“응? 그런 높은 분이 왜 널 찾아?”
“글쎄요. 뭐 오해가 있다는 식이던데, 보호자랑 같이 오라던데요? 지금 시간 되죠? 뭐 잘못한 것도 없잖아요. 이참에 미술협회 구경도 좀 해보고요.”
“뭐, 그러자. 흥흥, 옷은 뭘 입고 갈까….”
조민희가 옷을 고르러 간 사이에, 태월은 신문을 찾아서 백팩에 넣었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원피스를 입은 엄마의 손을 잡고 택시를 탔다.
메모한 주소를 보여주니. 택시 기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안녕하세요? 협회장님 뵈러 왔습니다.
약속이 돼 있을 거예요.”
“아, 안녕하세요. 성함이 누구신지?”
“박태월이 제 아들이고요. 전 엄마 되는 사람입니다. 같이 오라고 해서 왔어요.”
“아! 여기 명단에 있네요. 잠시만요.”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데스크 여직원이다.
5분도 안 돼 여자분 하나가 헐레벌떡 온다.
“아, 안녕하세요. 이번 미술대전 서류담당 전은서 입니다. 박태월 가족이시죠?”
“네, 제가 엄마 조민희입니다.”
“어머, 이쁘시다. 하여간 절 따라오세요.”
가벼운 접대 멘트 하나에 조민희 얼굴은 배시시 해졌다.
둘은 전은서를 따라 회장실까지 올라갔다.
“어서 오십시오. 윤지훈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박태월입니다.”
“호호, 전 이 꼬맹이 엄마 조민희예요.”
소파에 앉아 있던 40대 남자 하나도 같이 일어서서 인사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이번 심사를 맡았던 홍재준 심사관입니다.”
고개를 꾸벅여 인사 화답을 했다.
“자자, 두 분 앉으세요. 먼저 말씀드릴 것은 이 대회를 잘못 아신 것 같아서요.
그리고 이 그림 정말 본인이 그린 건 맞나요?”
“호호, 못 믿으시겠지만, 제 아들 그림이 맞아요. 이거 외에도 절에도 두 곳 있어요.
거기선 사람들이 보는 데서 직접 그렸거든요.
또 재벌기업 회장 한 분에게도 있어요.”
“아….”
협회장의 말문이 막힌 사이에, 전은서가 튀어나왔다.
“저기, 이거 성인대회거든요? 대체, 어떤 이상한 신문을 보신 거예요? 그리고 저희는 출품 제한이 40호 그림이에요. 저렇게 큰 게 아니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