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미술대전 출품작과 검은 소의 비밀
11명의 독경 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울려 퍼졌으며, 주변 파출소에 민원까지 들어왔다.
원래는 민원 출동 때 사이렌 소리까지 굳이 내진 않지만, 주변에 몰린 사람들 때문에 비켜달라고 낸 것이다.
그러나 출동한 경찰들도 분위기에 밀려 들어가진 못하고 주변에서 서성대기만 했다.
그 덕분에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이 상황을 알게 되었다.
큰스님까지 왔고, 그로 인해 귀신까지 성불시켰다는 소문은 크게 부풀려져 퍼져나갔다.
마당에 큰 자리를 깔고 젊은 스님들에게 음식 대접을 하는 조민희의 옆에는 또래로 보이는 여자들이 셋이나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출장 뷔페 직원들도 몇 명 보였다.
음식은 정말 많이도 준비했다.
무려 200인분을 준비했는데, 진짜 통 큰 짓이다.
“어머? 네가 민희 아들이라며? 와 눈 초롱초롱한 거 봐. 너 혹시 여자친구 있니? 우리 딸이 이번에 유치원을 들어갔는데….”
“아, 안녕하세요. 박태월이고요.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드려요. 가실 때 과일 바구니를 준비했으니, 따님과 맛나게 드세요.”
“호호, 거봐라! 태월이가 네 딸에 성이 차겠니? 안녕? 나도 너희 엄마 친구 오정혜란다.”
“네, 안녕하세요.”
“호호호, 난 박은주! 이 집 주인이 너라며?
아니 이제 8살에 이런 큰 집을 가지다니, 더구나 네가 번 돈이라며?”
“아유, 이 기집애들이 고만해!
우리 아들한테 별소릴 다 하네. 빨리 이거 마저 치우고, 커피 마시러 들어가자!”
민망해하는 아들 상태를 바로 알아보고는, 엄마 조민희가 나서서 아줌마들을 정리했다.
파출소에서 나온 경찰들에게도 음식 대접을 했으며, 구경 나온 동네 이웃들까지도 왕창 대접했다.
마당이 약 70평 가까이 되는지라, 공간이 좁진 않았다.
“어? 태월이다!”
“어, 정말이네. 쟤가 여기 왜 있지?”
동네 이웃 중에는 같은 학교 다니는 아이를 둔 부모들도 있기 마련이다.
엄마 손에 이끌려 천도재 구경을 나왔다가, 태월을 발견한 그 애들이다.
따지면 그 애들로 인해 이 집을 얻게 된 것이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야, 너희도 온 김에 맛있는 거 골라서 먹고 가라.”
그런데 어떤 아이가 쭈뼛거리며, 태월에게 다가왔다.
“안녕? 나 최태식이야.
여기 큰스님이 귀신들을 하늘로 보냈다며?
그 덕분에 우리 아빠도 싱글벙글, 나도 마음이 편해졌어. 고맙다!”
“하하, 뭐 잘되었다니 나도 좋아.
난 박태월이다! 너도 부모님 모시고 와서 먹도록 해. 음식은 잔뜩 준비했으니.”
“그, 그래! 모시러 갔다 올게.”
꼬맹이 태식이가 후다닥 가버렸다.
그걸 쳐다보다가 태양 부동산 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 안녕하세요? 안 들어오시고 뭐 합니까?”
“하하, 설마 이런 식으로 퇴마를 할 줄 정말 몰랐어! 진짜 귀신이 있었나 봐!”
“네, 둘이었다네요.”
“헉! 그, 그래서 어찌 되었는데?”
“뭐 어찌 되긴요. 당연히 큰스님이 성불시켜버렸지요. 다신 못 봅니다.”
“이야! 그럼 이 동네 집값 다시 막 오르겠는데? 그동안 그 일 때문에 분위기가 뒤숭숭했거든!”
“오, 그럼 아저씨도 수입이 좋아지겠네요?”
“하하, 그랬으면 하지만, 뭐 누가 알겠어?
하여간, 귀신 나타나는 집이 있으면, 잘해줄 테니. 같이 잘 벌자고!”
“네, 네! 저희 엄마에게 꼭, 연락하세요.”
“아, 모시기 힘든 큰스님까지 가능할 줄이야.
하여간 부럽긴 부럽네. 그런데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했어?”
“귀신 날리느라 고생들 하셨으니, 잘 먹어야지요. 아저씨도 저기 가서 맘껏 드세요.”
“오, 그래 볼까?”
어슬렁대며 뷔페 차린 곳으로 이동하는 태양 부동산 사장이다.
‘슬슬 미술대전 준비를 해야겠네.
주변에 미술 관련된 인맥은 없으니, 혼자 알아서 해야겠다.’
사실 태월은 학교 미술 교사와도 그리 접점이 없다.
미술 시간에도 또래 애들의 그림을 보기만 할 뿐, 그리지도 않고 단청만 그렸던 터였다.
교사가 그 빛깔이 고와서 칭찬은 하긴 했지만, 풍경화 그릴 시간에 단청칠을 연습한다니.
좀 엉뚱한 아이라고 여겼다.
탱화 중 경전의 내용을 그리는 변상도에 한국화를 접목하여 출품할 생각을 했었지만.
방향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구름과 물처럼 얽매임 없이 흘러 다니는 운수승(雲水僧)을 탁발승(托鉢僧)이라 한다.
탁발승과 소달구지 끄는 노인, 달구지 위에 탄 동자승, 시냇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엄격해서 탁발승으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엄격한 수도 생활을 한 자만이 열반의 길을 갈 수가 있다고 했다.
속세를 끊는 것에 번뇌하는 탁발승과 속세의 때가 묻지 않은 동자승.
목탁 소리보다 더 큰 방망이 치는 소리가 탁발승을 두드린다.
속세에서 사는 노인.
소의 정체는 진리이며 인간의 본성을 뜻한다.
직접적 깨달음은 전달하지 않으나 매개체로서 간접적 역할을 한다.
가는 그 길의 끝에는 만다라 꽃이 피어 있다.
길의 끝이 열반으로 향하는 곳이다.
이를 소재로 한국화에 벽사와 해탈 그리고 열반의 기운을 담을 생각이다.
탱화이되 탱화가 아닌 진채화에 가까운 수묵담채화로, 새로운 한국화를 시도할 생각이다.
그림의 주제와 소재가 정해지자, 태월은 주말을 통째로 비워 그림 준비에 매진했다.
이번에 악귀에게서 얻은 재능 중 하나인 천 염색에, 일주일이 걸렸다.
여름에 채취한 쪽잎과 굴 껍질을 태워 만든 석회 가루를 섞어 삭히면 침전물이 생기는데.
이를 잿물과 섞어 아랫목에서 한 달여 묵히면 염액이 완성된다.
여기에 천을 담가 염색을 하는데 천을 염액에 넣을 때는 녹색이지만, 천을 물 밖으로 꺼내면 산화되면서 고운 쪽빛으로 변한다.
저러한 과정을 다 거치는 귀신의 재능이지만.
태월은 염액을 만들 여건이 부족하기에, 노스님에게 알아봐 달라 부탁하였다.
나주지역의 쪽 염색 공방에서 염액이 올라왔다.
도산공원의 새로 산 집에서 염액에 비단을 담가, 염색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말리기를 반복했다.
처음 꽃물에 염색하면 연녹색이지만, 공기 중에 펴면 녹색, 파랑으로 변한다.
이를 더 반복하면 더 진한 염색이 된다.
하늘빛을 머금은 쪽빛 비단 270cm 길이, 3장을 완성하였다.
귀신이 만들던 과정과는 같았으나, 다른 게 있었다.
영혼의 푸른 빛 기운이 하늘색 쪽빛에 더해져, 색의 깊이가 보는 사람에겐 영혼이 맑아지게 할 정도다.
그중 한 장을 꺼내 사방을 팽팽히 당겨 화폭에 맞췄다.
원단 폭은 72인치(약 182cm)의 대폭으로 인견 쪽에서 쓰는 최대폭이지만, 본견으로 따로 주문해놨었다.
출품할 작품의 호수는 200호로 정했다.
가로 259.1cm에 세로 181.8의 규격이다.
배경이 되는 산과 시냇물 그리고 지형 등은 전부 탱화의 평면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등장인물들과 소, 달구지 등은 평면도안 형식에서 탈피, 원근법과 명암을 이용해 입체감 있고 세세하게 묘사하는 방식을 취했다.
평면과 입체라는 이중 형식을 취한 독특한 시도였다.
준비과정은 보름 정도로 길었지만, 그리는 시간도 8시간이나 몰입했다.
중간에 잠시 몰아에서 깨어나, 죽 한 그릇을 비우고 화장실을 다녀온 게 휴식의 전부였다.
천연안료로 택했고, 그중에는 3가지 색의 경면주사도 포함되었다.
탁발승의 번뇌가 얼굴에 드러나고, 그와 대비해 동자승의 해맑은 웃음이 피어났다.
달구지를 끄는 노인의 발걸음엔 세파에 달관한 넉넉함이 담겼다.
우직한 소의 느릿한 걸음은, 탁발승에게 수행의 바른길을 알려주고 있다.
아낙네의 빨래터 방망이질이 목탁 소리로 변하더니, 탁발승의 귀로 파고든다.
길 끝에 핀 만다라 꽃은, 여전히 그에게 멀리 보일 뿐이다.
배경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왼 팔목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빛이, 곳곳에 숨어들었다.
천수경에 이어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독송한다. 벽사의 경면주사와 영혼의 푸른 빛이 일렁이며 화답을 하고, 그중 일부는 만다라 꽃으로 이동했다.
동이 틀 때 그리기 시작했는데, 해가 질 때쯤 완성이 되었다.
다 그려진 그림을 보며, 슬며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태월이다.
기지개를 쭉 켜보고는,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압구정 집으로 향했다.
내일이 일요일이라 시간의 여유는 많았다.
“아들? 지금까지 그림 그렸던 거야?”
“응, 그래도 잠시 시간 내서 뭘 좀 먹긴 했어.
아 저녁 시간이 되니, 더 배고프다. 밥 줘!”
“호호, 어서 씻고 나와, 그동안 다 차려져 있을 거야.”
“엄마? 아침에 내가 그린 그림, 사진 좀 찍어야 해! 멀리서도 찍고, 가까이서도 찍고.”
“알았어! 내가 이쁘게 찍어줄게. 걱정들 말아.”
박승철에게 부탁해도 되겠지만, 사진 찍는 실력은 엄마가 더 고수다.
외할아버지가 사진관을 오래 했었고, 그 덕에 취미로 사진을 오래 했었던 엄마 조민희다.
체육관에 더 있어야 하는 아빠 박승철도, 가족이 함께 먹는 저녁엔 거의 오는 편이다.
식사 후 다시 나가야 하지만.
“태월아, 그러고 보니, 넌 체육관 왜 안 나오냐? 내 사부의 사형인 곽 사백님이 널 엄청나게 칭찬하던데? 왜 말을 하지 않았어?”
“그냥, 건강 삼아 한 것이라서요.”
“그래도 수련을 하다가 그만두면, 말짱 도루묵이야. 와서 배우도록 해!”
새로운 무예 사범이 왔나 싶어서, 태월은 눈을 반짝였다.
“응? 누구한테 배우는데요? 아빠도 택견과 수박을 배우셨어요?”
어리둥절한 박승철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응? 태권도를 배운 게 아니라, 그 전통 무예를 배운 거였어?”
요즘 어딜 자꾸 싸돌아다니는 것 같아, 잔소리 좀 하려 했는데 이참에 통박을 줘본다.
“아니, 당신은 왜 아들에게 관심이 그리 없어요? 좀 제대로 알아보고 다녀요. 나처럼 사진이라도 잘 찍든가.”
“아? 아들이 사진을 부탁했어? 그럼 내가 해줄게. 이번에 연습 많이 했거든? 대회 나간다고 많이 내가 찍어줬지.”
“여보? 당신이 찍는 그 사진은, 아무렇게나 찍는 사진인 거고요. 아들이 찍을 사진은 빛을 고려한 작품 사진이어요!”
“흠흠, 눈빛에 힘을 주고 찍음 되잖아.”
“동태 눈을 찍는다고, 반짝이는 생태 눈이 나올 것 같아요?”
꼭 자신의 눈 상태를 말하는 것 같아, 항의해 본다.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어제 술을 먹어서 눈빛이 그런 거잖아.
미스 최는 내 눈빛이 깊고 맑다고 하던데.”
“미스 최? 그게 누군데요?”
“헙!”
결국, 미스 최로 인해서 박승철은 밥그릇을 빼앗겼다.
아침에 조민희와 태월은 도산공원 옆, 집으로 사진을 찍으러 갔다.
“어머머! 어제 이런 그림을 그렸다고?
크기도 큰 거지만, 이렇게 세밀하게 그리는데 하루 만에 다 되나?
삼장 법사의 서유기 느낌도 나네?
천국으로 향하는 구도자 일행 느낌도 들고.
마음이 차분해지고, 영혼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아. 그런데 이거 종이에 그린 거 아니지?”
“네. 비단을 꽃물 염색하고 거기에 그린 거예요. 이 바탕 비단 만드는 데 보름 가까이 걸린걸요.”
“그런데 소가 왜 검정 소야?”
“네? 황소인데요?”
이때까지도 소가 왜 그런지 태월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