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화공 영감 귀신
귀신 영감의 말에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여 주었다.
“보기만 하겠어요? 말도 들리는걸요.”
“하하하, 이 꼬마 되게 신기하네?
여기 절엔 무슨 일로 온 거야?”
“영감님이 보는 그 탱화를 완성 시키려고 왔어요.”
“헛! 이걸? 이런 일이 다 있다니. 넌 탱화가 뭔지는 제대로 알긴 하냐?”
“음, 한번 그려 봤어요.”
태월이 한번 그려 보았다는 말에, 신기했는지 가까이 다가와 빤히 본다.
“응? 너 천재인가 보네? 절에서 널 초대해서 이걸 완성하려 한 것 보면.
여기 주지가 보통 깐깐한 게 아니거든.
뭐 내가 계속 방해하긴 했지만, 다른 화공들은 주제도 안 되면서 까불더라고.”
“아니, 그걸 왜 방해했는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귀신인데 살아 있는 사람처럼 뒷머리를 긁적인다.
“음, 사실 이거 내가 그리다 만 거야.
완성하지 못한 게 미련이 남아, 이십 년째 삼도천도 못 건넜지.”
“아! 그 교통사고 당하셨다던?”
“응, 그 화공이 바로 날세. 아 술 취한 놈이 비 오는 날, 차는 왜 끌고 나와서….”
음주운전 차량에 의해 사고를 당한 것이다.
“저도 방해하시려고요?”
“하하, 아니야. 그전의 화공들은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탱화를 하찮게 여기면서 대충 그리려 하더라고.
아이들이 잘하는 색칠하기? 딱 그 식이야.
그 마음가짐으론, 이곳에 탱화를 그린다는 게 의미가 없지 않겠나?
내 염원이 남은 이 자리에, 그딴 걸로 채운다 생각하니 열불이 났어.
꼬마 눈을 보니, 맑고 깊은 게 좋아 보여.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데, 뭔가 영기 같은 게 느껴져.
하긴, 그러니 귀신을 보고 놀라지 않고, 대화까지 나누는 거겠지.”
“완성하지 못한 것에 미련만 남아, 이곳을 떠도신 거군요?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응? 어떤?”
“저랑 같이 그려요. 전부 지우고 백지상태서 새로 시작해보죠. 색칠하기가 아닌, 염원을 담아야죠.”
영감이 어린아이처럼 폴짝폴짝 뛴다.
“저, 정말? 그래만 준다면 여한이 없겠어.
좋아, 좋아! 같이 그려 보자고. 그런데 언제 그릴 건데?”
“음, 낼 아침 동이 터야 그릴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아침에 괜찮겠어요?”
별거 아니란 식으로 어깨를 으쓱인다.
“아, 난 괜찮아. 내가 원귀도 아닌데, 그딴 걸 왜 두려워해.
더구나 천도의 염원을 이루는 자리인데….”
“그럼 낼 5시쯤에 준비가 돼 있을 거예요.
탱화 노하우 좀 많이 배울게요.”
“뭐 경험이야 내가 충분하지. 그럼, 꼬마 천재 그때 보자고.”
귀신을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노스님에게 좀 전에 만난 화공 귀신에 대해 이야길 했다.
“허허, 그래도 악귀는 아니었나 보네.
내가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였으니.”
“네, 그냥 미완성 탱화에 대해, 미련이 커서 못 떠나고 있었나 봐요.”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럼, 네가 잘 마무리해서 성불시켜드려라.
이제 진언을 할 줄 알지? 경험이라 생각하고 잘해봐.”
“네, 스님 할아버지. 한번 해볼게요.”
“그리고 탱화를 평생 하셨다는데, 이참에 배워볼까 해요.”
“허허, 너도 참 특이하긴 하다. 귀신에게 그림을 배운다니.
어른도 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라는 성현의 말도 있지만, 귀신은 처음이구나.”
스님 할아버지와는 오랜만에 같은 방에서 자게 되었다.
일 년여 간의 정이 다시 솟는 밤이었다.
5시 정도가 되자 비비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릴 장소로 가니, 홍명 스님이 처음 보는 스님과 함께 준비물들을 늘어놓고 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단을 만들어놨는데, 그 위에서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그 단 위에다가 준비물을 올려놓은 것이다.
“안녕하세요?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볼게요.”
“아 잘 잤는가? 잘 점검해서 혹여 부족한 게 있나 봐줘. 날 밝으면 시내까지 나갔다 오마.”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줬다.
적어준 대로 빠진 것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전부 있는데요? 그럼 준비할 테니.
일들 보세요. 그릴 때 누가 있으면 신경 쓰여서요.”
귀신 영감과 대화해야 하는데, 잘못하면 미친 줄 알지 않겠는가.
이런 상황에선 조금 불편하긴 해도, 보조 없이 하는 게 나았다.
홍명 스님이 갸웃거린다.
“보조가 안 필요하다고?”
“네, 시간 걸리더라도, 그게 전 편해서요.”
“흠, 화공이 그렇다는데야 뭐.
알았네. 그럼 잘 그려주게. 이만 가세.”
같이 있던 사람이 보조 역할로 왔었는지, 홍명 스님이 가자는 소리에 군소리 없이 뒤따라 붙는다.
“날씨가 참 좋구먼. 성불하기 참 좋은 날이지?”
어느새 나타났는지 귀신 영감이 옆에 와 있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아, 그리고 이건 제가 그려 보려는 구상인데요, 한번 봐주실래요?”
“흐음? 존상화가 아니라 변상도구먼.”
존상화는 여러 신앙적 존재들을 그리는 것이고, 변상도는 경전의 내용을 그리는 것이다.
“흠, 그런데 이건 탱화 같기도 하고, 동양화 같기도 하네?”
“탱화와 한국화를 접목해보려고 해요.”
뜬금없기도 했지만, 갸웃거리다 긍정적으로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여 준다.
“허허, 안 될 거야 없지만, 그 나이에 그런 발상한다니 신기하네.
다른 화가들은 그렇게 안 그리지?”
“네, 아직은 못 본 것 같아요.”
“탱화에 앞서 단청부터 설명해줄게.”
단청은 청·적·황·백·흑색의 다섯 가지 색을 기본으로 사용하여, 목조 건축물에 여러 가지 무늬와 그림을 그려놓은 것을 말한다.
귀신 영감은 단청에 대해 차근차근 자기 생각을 넣어 경험담 삼아 이야길 했다.
그리고 탱화에 대해 자기의 의견과 축적된 노하우도 알려줬다.
덕분에 남들이 볼 때, 아침에 동이 훤히 틀 때까지, 넋 놓고 있는 꼬마 화공으로 보이게 됐다.
게다가 혼자 중얼대고 있기도 했고.
이론 공부가 끝나자, 뼈대로 삼을 스케치부터 했다.
그 후 하나씩 그려나갔다.
“어? 자네 그 팔목 안쪽에 그게 뭔가?
설마 문신? 꼬마가 문신한 건 처음 들었는데?”
“음, 그냥 어쩌다 생겼어요. 그런데 이거 무섭게 보이나요?”
“하, 그게 뭐가 무서워? 하회탈처럼 웃겨 보이는구먼.”
집안에서도 긴 소매 옷을 입고 지내다 보니, 부모님도 아직 모르는 상태다.
탱화의 평면도안 형식에서 탈피, 원근법과 명암을 이용해 입체감 있는 작품을 만들어 냈다. 색감도 원색에 가까운 색을 쓰지만, 지나치게 화려해 가볍고 현란한 느낌이 드는 것을 피했다.
중간중간 귀신 영감의 조언도 받아들였다.
그러다 일정 시간 이상이 지나가자, 주변도 잊고 귀신도 잊고 몰아 상태가 되었다.
마지막 마무리를 하고 있을 때, 역시나 십장생 그림 때와 같이 왼 손목에서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천수경에 이어 반야심경까지 마쳤을 때는, 그림 속의 사람과 사물들이 움직이는 것 같이 보이다가 멈췄다.
6시간이 지나 7시간 가까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벽화의 전체 크기가 가로 3m, 세로 2m의 대작이다.
“자, 자네? 뭐, 뭐를 한 건가? 하마터면, 삼도천도 못 건너고, 저 그림 속에 내가 빠져버릴 뻔했네. 좀 위험했네.”
“아, 그랬다면, 죄송하네요.”
“허허, 어린아이답지 않게 뭘 그리 정중해?
하여간, 꼬마 천재 때문에 내가 무사히 삼도천을 건너게 되었어. 정말 고맙네. 미련을 이제 다 벗을 수 있었어.”
“네, 부처님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옴마니 반메 훔!”
푸른빛 무리로 귀신 영감이 휩싸이자, 자비 진언이 태월의 입에서 절로 나왔다.
그 푸른 빛무리에서 한줄기 선명한 빛이 태월에게로 쏘아져 왔다.
“옴 아모카 바이로자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 훔!
옴 아모카 바이로자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 홈!............”
곧이어 광명 진언을 7번 연이어 읊었다.
태월이 눈을 들어 앞을 보니, 더는 영감 귀신은 보이질 않았다.
성불했으리라 믿고 합장을 한 번 더 올렸다.
“두 가지 다, 잘 마무리되었느냐?”
“아, 스님 할아버지는 보고 계셨나 봐요?
네, 성불하셨습니다.”
“옴마니 반메 훔!
혹시나 염려도 되어 주변에 있기는 했다.
호오, 바로 이 그림이로구나.”
노스님은 뒤로 몇 발짝 물러서서 보다가 다시 가까이 와서 보기를 반복했다.
“보는 거리에 따라 뭔가 달라 보이는구나?
그리고 일반 탱화와는 전혀 다른 면모야.
격이 한 단계 높아진 느낌? 하여간 세밀한 한국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두 개를 접목한 것은 맞아요.”
“그런데, 탱화를 그리는 데 너무 과하게 그린 것 아니야? 이거 이 절의 보물이 되겠어.
유 회장이야 너에게 그림값을 제대로 쳐줬지만, 여기선 그런 것도 별로 없을 터인데?”
“그림 대회를 나가려고 하는데요.
그 시험작으로 그려 본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게 몰아에 빠지면 이런 식으로 과하게 나오더라고요.”
노스님의 반응과는 별도로 태월도 앞뒤로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응? 색감이 더 자세히 느껴지네?
혹시 화공 할아버지의 재능도 나에게 온 건가?
갑자기 그런 거 보면, 그 이유 같은데?’
뒤쪽으로 인기척들이 들려오자, 노스님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아무래도 과하네! 과해.
태월아! 다 지우고 간단하게 새로 그리자. 뭐든 적당한 게 좋지 않겠냐?”
“허허, 사숙님! 그게 어인 말씀입니까?”
“뭐가 어인 말이야? 밥 한 끼 대가치고는 과한 건 사실이지. 아니 너무 지나친 거지.”
“흠흠, 차차 갚아 나가면 될 것 아닙니까?”
“오, 말은 잘했다. 앞으로 내가 두고 볼 것이야. 아 그리고 우리 암자에 그린 적호도, 그거 값으로 산 아래 5만 평 줬어! 그리고 유 회장은 십장생도 값으로 강남땅을 줬고.”
“아, 아니! 그렇게나요?”
“이 그림으로 인해 사람이 몰리고 번뇌가 줄어들면, 그것만큼 공덕이 들어올 것이 아닌가? 뭘 그리 아까워해?”
“흠흠….”
“태월아 이제 다 했으니, 이만 돌아가자꾸나.”
“저저, 사숙님! 식사는 하고 가셔야죠?”
“아! 됐어! 가다가 냉면이나 먹으련다.
너희 냉면 없지?”
“절에 무슨 냉면이 있습니까?”
“그럴 줄 알았어. 하여간 우린 가야겠다.
태월이도 일찍 서울로 가야 하니. 다음에 보세나. 냉면도 없으면서….”
뜬금없이 냉면 타령으로 멍하게 만들어 버리고는, 도명스님이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그런데 스님 할아버지는 왜 서울로 가세요?”
“어? 유 회장하고 약속이 있어서 가는 거야.
뭐, 친목 모임이 있어. 또 거기 가야 평양냉면을 주거든.”
“그런데, 평양냉면이면 물냉면이잖아요.
고기 편육이 들어가던데요?”
“그래, 그거 먹으려고, 냉면 먹는 거야.”
“......”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하면서, 빙그레 웃으시는 노스님이다.
건곤암 손님방에 돌아와서 짐을 챙기려는데, 노스님이 빤히 바라본다.
“태월아, 왼쪽 팔 걷어봐라.”
“네에? 팔, 팔은 왜요?”
“아까 그림 그릴 때 네 소매가 올라가기에 얼핏 봤지. 전에 없던 거기에, 궁금해서 그러는 거다.”
소매를 걷고 팔목 안쪽을 보여줬다.
“헉! 이게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