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건곤암 적호도
아픈 이마를 쓱쓱 문지르며 앞을 바라보니, 노스님이 염주 알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오호, 이거 던지는 재미도 꽤 있는걸? 부적 공부하다 말고, 혼자 왜 실실거리고 있냐?
내가 어디까지 했더라?”
노스님은 법문 공부 때도, 중간에 딴짓하면 이렇게 혼내기도 했었다.
“오오라의 진동이 높아질 때, 죄악과 죄업이 녹아드는 것은 물론이고 영생, 성불의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요.”
“딴짓하면서도 그런 것은 어찌 잘 기억하는군.
부적을 그릴 때는 몸가짐을 바로 해야 하고,
자시에 그리는 것이 효과는 좋으나, 택일이 필요한 부적은 당일 아침에 그리기도 한다.
동쪽을 향하여 맑은 물을 올리고 분향 후, 이를 딱딱딱 세 번 마주치고 필요한 주문을 외운다.
부적 그릴 때 쓰는 재료는 알고 있느냐?”
“음, 누런 종이랑 빨간 물감요.”
“허허, 비슷하기는 하구나.
경면주사라고 주로 적색계의 광물성 물감인데,
다른 색도 있으나 주로 적색을 쓴다.
그리고 누런 종이는 괴황지라고 홰나무 열매로 한지에 염색한 종이를 뜻하고, 없을 때는 누런 창호지에 쓰기도 하지.
부적을 제작한 뒤에 그 부적이 쓰일 목적에 따라 제각기 다른 독경을 하는 게 좋은데, 모든 경을 읽기 전에 천수경을 독경하도록 해라.
스스로 다스릴 줄 안다면 굳이 경을 독경하지 않아도 된다.”
“스님 할아버지? 그냥 단순하게 정성을 다해 그리는 것이 아니네요?”
“그 절차라는 것도 따지면, 정성이 아니겠느냐? 부적은 두 가지 목적기능이 있단다.
주문의 힘으로 좋은 것을 증가시켜 이를 성취하게 해주는 부적과 삿된 것이나 액을 물리침으로써 소원을 이루는 부적이지.
모든 부적은 특별한 것을 제외하곤, 이어진 것은 한 획으로 그린다고 보면 된단다.
그 외 종류들은 실제로 그려나가면서 공부하도록 하자구나.”
“네, 꼭 한 획으로 그려야 하나요?”
“한 획이라 하면, 자아의식도 사라져 몰아지경에서 그리면 파동이 더 커진다고 볼 수 있지.
이어진 것이나 그러면 되는 거고. 나눠진 것도 많이 있단다.
오늘은 민가에서 제일 흔히 볼 수 있는, 소원성취 부라는 것부터 해보자.”
그렇게 태월의 부적 공부는 시작되었다.
***
보름 정도쯤 되었을 때, 살인사건을 맡았던 김 검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최영호라는 범인이 잡혔고, 현장 재연을 위해 내일 그 장소로 간다는 내용이었다.
다음 날 점심쯤을 지나서, 노스님과 태월은 그곳으로 갔다.
그때 그 경비가 나와서 맞이해주는데, 고마워하는 표정이 얼굴에 절절히 배어 나왔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 입주민들이 요즘은 편하게 잠을 자고 있습니다.
집값도 폭락해서 들어올 사람도 없었는데, 분위기가 점점 좋아지는 추세고요.
진짜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저는 이곳에 오래 근무할 수 있게 되었네요.”
“허허, 소동을 부리던 악귀들이 사라졌으니, 이제 좋은 일만 생길 겁니다.”
덕담을 한마디 하고는, 김 검사의 안내에 따라 현장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시작되었는지, 범인이 포승줄에 묶인 채로 이것저것을 재연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조용히 그 재미교포라는 여자 귀신이 서 있었고.
들어서는 태월을 보았는지, 가까이 다가왔다.
이곳에서는 대화를 나누기 어려운지라, 작은 방으로 노스님과 함께 들어갔다.
“죄질이 악랄해서 무기징역을 구형받는다고 합니다. 마음은 어떠세요?”
“비록 죽이진 못하지만, 그 정도만 돼도 한은 풀렸네요. 오늘의 일을 저승에서도 잊지 않고, 태월 님의 무사 안녕을 빌겠습니다.”
“어? 그건 제가 빌어야 하는 건데. 하여간 극락왕생하시길 바랍니다.”
제법 의젓하게 맞대응을 해주자, 그녀의 몸은 푸른빛을 내뿜으며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예외 없이 제일 선명한 푸른빛 줄기가, 태월의 왼 손목으로 쏘아져 왔다.
‘왼 손목이 뻐근한 게, 꽤 많은 에너지가 생긴 거 같네. 그리고 오늘은 머리도 조금 뻐근하네. 신경을 너무 쓴 건가.’
뒤돌아 노스님에게 신호를 보내자, 극락왕생을 비는 진언을 읊으셨다.
“옴 아모카 바이로자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 훔!
옴 아모카 바이로자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 훔!
......”
7번을 반복하여 광명진언을 읊조리며, 그녀의 극락왕생을 비는 노스님이다.
“오늘 고생했구나. 그만 돌아가자꾸나.”
보통 도명스님 옆의 조수석에 앉다가 오늘은 노스님과 같이 뒷좌석에 앉았다.
서울로 돌아갈 날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보니, 노스님이 태월을 더 가까이서 느끼고 싶었으리라.
“이모우션즈 포어 쿨 러브.
아이 웨잇 포어 서뭔.”
“응? 태월아, 너 저 영어를 읽을 줄 알아?
언제 영어 공부를 했어? 영재였네?”
운전하던 도명스님이 태월에게 묻는 것이다.
‘어? 저 영어 간판들을 내가 어찌 읽지?’
“허허, 우리 태월이가 보통은 아니긴 해.
그림도 꽤 잘 그리고 이젠 영어까지?”
그림까지 잘 그린다는 노스님의 말에 도명스님이 백미러로 보며 작은 환호를 해주었다.
“우와! 태월이 대단하네. 그림까지.
게다가 발음이 한국 사람 발음이 전혀 아니야.
진짜 외국에서나 들을 법한 원어민 발음인걸?
혹시 절에 오기 전에 영재학원이라도 다니다 온 거 아니야? 너 압구정이라며, 강남엔 그런 학원들이 있긴 하다던데.”
“아, 아니요. 그냥 관심이 있었어요.”
그림에 이어 또다시 얼버무리는 태월이다.
‘이거 확실한 것 같네. 그림과 영어라.
둘 다 성불한 두 사람의 재능인데….
이렇게 성불시켜주다가, 나 천재 되는 것 아닐까? 푸흐흐, 외국 귀신을 만나면, 부적을 던지며! Villains, make it disappear!를 외쳐볼까! 헉! 나 영어 또 나왔어.’
***
한 달 정도가 지나 사흘 후면, 서울로 돌아가야 할 시기가 되었다.
아침부터 웬 호랑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태월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노스님이다.
‘아니, 그림을 그리려면 물감으로 그릴 것이지, 웬 경면주사로 그림을? 호랑이로 액운을 쫓는 벽사용 부적이야 있긴 하지만.
그런데 부적치고는 꽤 크기가 크네?’
사방 1m나 될 법한 크기였다.
별스럽기도 하다고 생각하며, 법당의 손님을 맞으러 가고 있었다.
4시간에 걸쳐 몰아지경에 빠져, 호랑이를 그리고 있는 태월이다.
“휴, 다 그렸네. 생각대로 해보긴 했는데, 부적 같은 효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어.
시험작이니, 그리 기대는 안 하지만….”
도명스님을 통해 액자를 미리 사놨던 태월은, 그림이 마르자 액자에 끼워 넣었다.
액자 무게도 있기에 꽤 무거울 법한데, 또래와 비교해 힘이 센 태월은 역시나 가볍게 들었다.
점심시간이 지났음에도, 자신의 완성품에 뿌듯해 배고픈지도 몰랐다.
오늘은 무술 수련도 빠뜨리고, 오전 내내 이것을 그린 것이다.
법당 앞에서 기웃거리다, 노스님과 눈이 마주쳤다.
“어? 태월아, 너 점심은 안 먹고 그걸 다 그렸나 보네? 구경이나 해볼까?”
“흐, 네….”
법당 안으로 쪼르르 들어가니, 웬 노인이 같이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하하, 이 아이가 큰스님이 말한 그 아이군요.
눈이 총명해 보이고, 깊은 것이 한눈에 봐도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반가워. 꼬마 천재!”
과한 칭찬에 어색하여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그래도 꼭 선물로 드리고 싶어 가져온 것이라, 앞에 내려놓고는 감쌌던 천을 풀었다.
“호, 호랑이? 이거 정말 꼬마 천재가 그린 것 맞아? 유명 화가가 그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인데? 붉은색 선으로 그린 것도 특이하고.”
“흐음…. 그것참. 그냥 잠시 봐선 잘 모르겠네.
정암? 잠시 집중하고, 5분만 같이 보도록 하세. 내가 잘못 느꼈을지도 모르니.”
정암이란 호를 가진 그 노인은 큰스님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을 가만히 응시했다.
오 분 정도가 지나자, 정암이란 분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이 그림 현기가 어려있어! 보고 있노라니,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강건해져.”
“흐음, 역시나….
태월아, 너 이 그림에 파사의 기운을 담아 그림에 새겨놨구나.”
“네, 건곤암도 지키고, 오시는 보살님과 처사님의 어지러운 속세의 마음.
그것을 깨끗이 해주려고 기운을 담았습니다.
처음 그린 것이지만, 스님 할아버지한테 주고 싶었어요.”
“허허, 그림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하아, 진짜 탐나는 기물이구나.
집에 이런 그림 한 점만 있어도, 십 년은 더 거뜬하게 살 것 같네.
큰스님, 진짜 부럽습니다.
이 그림 때문이라도 여길 자주 와야겠네요.”
노인 둘의 감당 못 할 과한 칭찬에 손만 만지작대고 있는 태월이다.
귀한 그림이니 법당 안에 걸어 놓자는 정암의 말에 고개를 젓고, 노스님은 법당 외부 입구 벽에 걸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오는 불자들의 안녕을 위해서다. 그게 그린 자의 뜻이기도 했었고.
그러자 정암은 자신도 자주 보러 와야 하기에, 도난을 방지하는 시설을 자신이 추가하겠다고 나섰다.
유리 액자 대신에 폴리카보네이트라는 유리 200배의 강도를 가진 투명한 재료를 써서 유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액자 틀 자체를 스테인리스로 제작하고, 벽 자체에 완전하게 고정되도록 설치를 했다.
벽 자체를 다 뜯기 전에는 가져가지 못하도록 말이다.
자기 비서에게 지시해, 오후 내내 전문가로 하여금 완성시켜 버리는 추진력을 발휘했다.
그러자 그 위에 작게 노스님이 그림의 제목을 썼다.
‘건곤암 적호도’라고….
태월은 몰랐지만, 태월의 몸속엔 천년의 정기가 담긴 월령주와 저승의 탈영병이 주고 간 신비의 팔찌, 그리고 영혼의 에너지.
그 세 가지의 기운이 일부 녹아, 몰아지경 때 그림 속에 미약하게나마 스며든 것이다.
부적의 재료인 경면주사의 역할은 미미한 일이었다.
아마, 몰아지경까지 가지 못한 상태서 그렸다면, 이런 수준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꼬르륵 소리를 내는 배를 달래며, 절밥이 아닌 정암이란 분의 기사가 가져온 일식집 특대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맛나게 포식한 태월 앞에 정암이란 분이 다가왔다.
“하하, 꼬마 천재 잘 드셨는가?”
“네, 감사합니다. 덕분에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림을 본 값일 뿐이네.
아, 혹시 그림 한 점 그려줄 수 없겠나?
값을 그에 걸맞게 치르겠네. 요즘 정신적으로 쉽게 지치기도 하고, 몸도 기운이 점점 떨어져서 여기엔 사실 쉬러 온 것이었네.
저 그림을 보니 내 몸에 활력이 돌더군.
꼬마 천재가 부자라는 것은 나도 들었네.
그래도 세상 살다 보면, 돈이야 더 필요하지 않겠나? 돈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그렇지만, 내가 줄 수 있는 게, 그런 것뿐이라서 말이야.”
“음, 기운 날 때, 그냥 그려 드릴게요.”
“아, 아니야. 그만한 가치 있는 것에는, 그에 걸맞은 게 어울려야 빛나는 법이네.
큰스님이야 꼬마 천재에게 베푼 것이 있으니 상관없지만, 난 아니지 않은가?
돈이 싫으면 다른 필요한 거라도 말을 해보게.”
잠시 고민하던 태월이 한마디 한다.
“그, 그럼, 땅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