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영혼의 에너지
노스님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더 호화롭다.
유명 수입 가구들로 채웠는지, 분위기가 세련되면서도 고풍스러웠다.
태월이야 그런 것까진 모르지만, 작년에 드라마에서 봤던 어떤 집보다도 고급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큰스님 이리로 앉으세요.
자, 꼬마 스님은 뭐 줄까요? 우유? 주스? 코코아?”
“저, 스님 아닌데요?”
“어머, 미안해요. 승복에 머리가 짧아서.”
“코코아 주세요.”
큰스님은 대추차를 마시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따님이 자주 쌍욕을 내뱉고, 물건을 부수고 깨고 나면, 그 당시 기억을 전혀 못 하는 상황이라….”
“네, 정신상담도 받아보고 약도 먹어보고 했지만, 별반 달라지는 것이 없네요. 일하는 사람도 무서워해서 그만둔 사람도 있습니다.”
“일단 만나보도록 하지요.”
태월도 따라가니, 안주인이 보기엔 큰스님 시중을 드는 역할로 봤는지 별말이 없었다.
화사하게 꾸며진 방에는 30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팔과 다리가 밧줄 같은 거로 묶여 있었다.
“혹시 몰라서 미리 묶어 놨습니다.
안 그러면 발작 시 그 힘이, 남자 혼자선 감당이 안 되거든요.
큰스님이 오신다기에 보기 흉하긴 하지만, 이렇게 해놔야 안전하실 듯해서요.”
말을 하면서도 딸을 저리 해놓은 것이, 맘에 걸려 하는 엄마의 슬픈 모습이다.
“한 분만 남고 다들 자리를 피해 주세요.”
노스님의 말에 안주인만 남고 다들 밖으로 나갔다.
도명스님은 혹시나 몰라 대기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필요치 않다는 말에 자리를 떴다.
아마도 험한 욕이 나올 경우, 듣는이가 적은 게 이 집 가족들의 불편함을 줄이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노스님이 광명진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항마 진언이 아닌 설법을 위한 진언이다.
모든 암흑을 제거해 청정하게 하여, 광명의 빛으로 바른 깨우침을 이루는 진언이다.
“옴 아모카 바이로자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옴 아모카 바이로자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옴 아모카 바이로자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3번 정도를 반복하자, 여인이 눈을 뜨고 몸부림치며 험한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14번 정도를 반복하자, 반쯤은 어두워진 기운이 여인의 몸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태월이 자세히 보니, 50쯤 되어 보이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베레모를 쓴 중년 사내였다.
“너! 나 보이니? 왜 빤히 보지?”
“네? 네, 네 뭐.”
노스님은 태월이가 앞을 보며,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자.
뒤에 있던 안주인에게 잠시 자릴 비켜달라고 했다.
의문이 들긴 했지만, 큰스님이 하는 말이기에 조용히 물러나는 안주인이다.
“어라? 이 꼬마 스님이 특이하네? 너 그건 그렇고, 저 영감 땡중! 시끄러우니 고만하라 해.
어디서 울화통 치미는데 설교야 설교는!”
중년 베레모 귀신의 말에 살짝 부아가 치미는 태월이다.
“저, 스, 스님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스님 할아버지도 땡중 아니거든요?”
노스님은 태월이의 혼잣말 소리에 귀신과 대화 중임을 알았다.
“태월아? 뭐라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스님 할아버지보고 시끄럽다고 잠시 멈추래요.”
“흐흠, 그, 그래. 일단 대화를 이어보거라.”
“왜 여기 있는 거예요? 그 아줌마에게 원한 있어 보이지도 않는데.”
“나? 나 이 여자 몰라! 울화통이 터져서 그래.
으아아아! 너무 화가 나!”
“아니, 무슨 일이 있었길래요?”
“나 전에 이 집 주인이었거든? 그런데 술에 취해서 여기 주차장에 차 세우고 자버린 거야.
공기가 안 통해서 죽었나 봐!”
“하 아, 아니 무슨 그런….
그래서 억울했던 거네요? 그런데 그 이유로 여기 아줌마를 괴롭힌다고요?”
어찌 보면 웃기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원한도 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건 잘못되었다, 여기는 태월이다.
“야! 그 정도만 해도 너무 억울한 거, 맞거든!! 그런데 더 억울한 게 있긴 해.
그것만 해결해주면, 나 저 위로 올라갈게!”
하늘로 손가락을 세워 가리킨다.
“말해보세요. 가능한 거면 해드릴게요.”
“아, 이거 몇 년 만에 대화란 걸 해보게 되네.
혼자 떠들려니, 엄청 답답했거든.
나 쪼금 유명한 화가거든? 화가가 뭔지는 알지?”
“그림 그리는 사람요.”
“이 집 지하에 내 필생의 역작이 있어!
그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먹게 된 거거든!
죽은 것도 억울하지만, 그 역작을 내가 그린 걸 아무도 모른다?? 그게 너무너무 억울해!”
“그, 그럼, 그거 전시회라도 열면 되나요?”
“그, 그렇지! 그런데, 한 점 가지고는 전시회가 안 되지. 가족들이 그림을 죄다 팔아먹어서, 같이 전시할 그림도 없어….”
태월은 세상 경험이 적어 아직 어리다 보니,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스님 할아버지! 그림 한 점 가지고, 세상에 쫙 알릴 방법이 뭐가 있나요?”
“응? 그, 글쎄다. 전시회는 안 될 거고….
아! 맞다 있네. 그런데 유명해야 가능해.”
“아저씨! 유명한가요?”
“그, 그럼! 내가 마지막으로 판 게 30호, 아 넌, 사이즈 모르지. 저, 저 거울만 한 게 이천만에 팔렸어! 그런데 지하에 숨겨진 그것은 무려 200호야 거기다 내 필생의 대작이야!”
“스님 할아버지! 저기 저 거울만 한 게 2천만 원에 팔렸다는데요?”
“흠, 나도 그림 가격은 잘 모르지만, 그 정도면 꽤 유명한 분이신가 보다.
그럼, 딱 적당한 방법은 경매야!”
“그, 그래! 경매! 경매로 그림 애호가들에게 내 대작을 내보이는 거야!!”
“그럼 가족들한테 알리면 되나요? 그분들이 팔게 해드릴게요!”
“저, 절대! 안 돼! 내가 죽자마자, 그림들을 팔아서 자기들 배만 채운 인간들이야!
그리고 내가 죽었는데, 뒤에서 방긋방긋 웃더군! 아무도, 아무도 날 위해 진정으로 울어준 사람이 없었어!”
흥분해서 혼자 부르르 떨고 있는 상태다.
“스님 할아버지? 가족에게 안 준다는데요? 그럼 어디로 가나요?”
“뭐, 소유자가 따로 없으면, 유산으로 처리되어 가족으로 가게 돼 있어.”
“유산이 된다는데요?”
“으아아! 절대, 안 돼! 그, 그러면. 나랑 대화해주고, 내 한을 풀어주는 네가 가지도록 해.
귀신은 한 번 뱉은 말은 거둘 수 없어.
너에게 선물로 주마. 대신 꼭 경매로 날 알려줘! 약속!”
태월의 어린 생각으로는, 저 힘들어하는 아줌마를 도와주고 싶었고.
또 저기 억울하다고 말하는, 저 화가 아저씨도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그 그림이란 걸 받아야, 다들 행복하게 빨리 끝날 것 같았다.
“좋아요! 박태월의 이름을 걸고 약속할게요. 선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고 꼭 경매로, 아저씨의 숨겨 놓은 그 그림을 세상에 알려드릴게요.”
화가 아저씨와 대화를 하던 태월은 뭔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어? 나 전에는 귀신을 봐도 간단한 단어만 들렸는데? 뭔가 달라진 것 같아.
혹시 그 모녀에게서 받은 빛줄기 영향이려나?’
그거 외에는 특별한 계기가 없었기에 그리 여겨졌다.
“고, 고맙다! 아, 막힌 게 뻥 뚫리는 기분이야.
이제 숨겨 놓은 데로 가자!”
사실 숨겨지지 않았다면, 가족들이 알아서 팔았을 거고 그림도 알려졌었을 것이다.
다만 가족들에 대한 배신감이 더 커졌겠지만.
“태월이가 선물로 받기로 했나 보네.
얼마나 깊이 숨겨 놨기에, 가족들도 모르고 새로 이사 온 여기 사람들도 몰랐을까?
흠, 이건 이 집 안주인과 먼저 상의부터 해야 할 일일 듯하구나.”
노스님은 밖으로 나간 후, 그 집 안주인에게 상황 설명을 했다.
그대로 전부 설명하기엔 이해시키기 어려울 듯하여 살짝 비틀어 말을 해줬다.
전에 살던 주인이 무엇인가를 숨겼고, 그걸 줘야 할 사람에게 못 줘 그게 억울했다고.
그래서 귀신이 되어 딸에게 들러붙은 거라고.
“아니, 뭘 숨긴 건진 모르지만, 지금 내 딸만 정상으로 온다면 그게 대수겠어요?
그리고 어차피 우리 물건도 아닌데, 아쉬울 것은 전혀 없어요.
당장 가지고 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확실하게 각서도 써드릴게요.”
스님으로 살아왔지만,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굳이 써주겠다는 것을 말릴 이유도 없었고.
그래서 각서를 받은 후에 도명스님까지 데리고 지하로 내려갔다.
안주인은 그 귀신의 물건이 지하에 있다는 소리에 기겁하여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고.
“스님 할아버지, 이 벽이 판자로 막은 가짜 벽이래요. 두 번째 전등 갓을 당기면 문처럼 열린다고 하네요?”
도명스님은 태월의 말에 따라 의자를 놓고, 그 위로 올라 전등갓을 당겼다.
-드르르르륵!
미닫이문의 일종인 슬라이딩 도어였다.
문이 열리고 펼쳐진 정면 벽에는 거의 벽면을 다 차지하는 크기의 초대형 그림이 걸려있었다.
방긋이 웃는 여인의 품에 안긴 두 아이가 있는 인물화였다.
평화와 행복이 무엇인지를 보는 그 순간 느낄 수 있는 그림이다.
인물화의 200호 그림은 259.1*193.9 크기를 말한다.
“내가 이런 가족을 그리고 싶었어.
나 혼자만의 꿈이었던 거지. 나의 꿈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
“네, 꼭 그리되게 할게요. 약속해요.”
“그림 팔리는 것은, 보지 못하겠지만.
네가 진심임을 알고, 또 저기 땡중 영감도 믿을 만해 보여. 이제 내 한은 풀렸다고 봐야지.
아, 속이 다 시원하구나. 하아!”
“따라오면 되지 않아요?”
“난 너무 이곳에 오래 있어서인지, 다른 데를 못 가는 것 같아.
이젠 굳이 그러고 싶지도 않아졌고. 지금 이대로도 만족해. 그리고 내 이름은 최홍수야.”
그 순간, 화가의 몸에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에 보던 것과 같은 밝은 빛무리가 그에게 어렸다.
하늘로 솟아오르다가 그중 젤 밝은 빛줄기가 태월에게 쏘아져 왔다.
-쉬 이익!
“헉!”
한 번 경험했음에도 이번에도 또 헉 소리를 내었다.
“어디 부딪혔니?”
“아, 아니요. 그 아저씨가 하늘로 갔어요.”
“아, 옴마니반메훔!”
태월은 잠시 머리가 어지러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저번과는 조금 다른 양상이었다.
“많이 피곤해서 그러느냐?”
“네, 좀 앉아 있을게요.”
“그래, 오늘 고생 많았다. 좀 쉬도록 해.”
노스님은 위로 올라가 커다란 천을 구해와서는 그걸로 그림을 덮어 묶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일하는 남자 하나를 데리고 내려온다.
적어도 혼자서는 절대 들지 못하는 상황이다.
결국 도명스님과 그 남자가 같이 들고서, 그 집의 대문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도명스님은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아! 시주님? 오늘 바쁘신가요? 비용은 드릴 테니, 빠르게 와주실 수 있나요? 네네, 주소는 문자로 보내겠습니다.”
30여 분이 지나자 1t 탑차가 들어왔다.
그사이 노스님은 그 집 안주인의 감사 인사를 받으며 나오셨는데, 모두가 밝은 표정이다.
“꼬마 스님? 오늘 힘쓰셨다면서요? 감사해요.
자그마한 입학선물이라도 보내 드릴게요.”
“아, 아니, 전 괜찮아요.”
거절하면서 노스님을 보니 그냥 웃고만 계신다.
“태월인 나중에 나랑 따로 이야기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