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귀신이 보여
사형의 이야기에 홍무경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놀란다.
‘어라? 설희랑 같은 사주잖아!
우연의 일치치고는 기이하군. 쌍둥이는 아닐 것인데... 그냥 우연이겠지.’
홍무경도 두 아이의 출생 비밀까지는 몰랐다.
어미의 품에 안겨있던 건 설희 혼자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태월이란 아이가 인사를 한 후에도, 힐끗힐끗 홍무경을 본다.
사제가 하루 묵을 요량으로 접객방에 들자, 노스님은 태월과 법문 공부를 했다.
“그런데 넌 왜 사숙의 얼굴을 아까 그리 흘낏대며 봤느냐? 안면이라도 있던?”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허, 말해 보거라. 내가 아니면 누가 너의 이야길 들어주겠느냐.”
“작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앞뒤 다 자르고 하는 말에 노스님은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응? 작은 아이라니? 누가, 어디에 있어?”
“사숙님 옆에 여자아이가 따라다녀요.
빨간 모자를 썼는데, 칭얼대더라고요.”
노스님이 이해하기론 사제의 옆에 아이 귀신이 있단 의미였다.
과거에도 귀신을 보는 아이였으나, 한동안 법문을 외우고 다니면서 그게 없어진 줄 알았다.
다행히 해를 끼칠 의도가 없는, 아이 귀신을 본 거 같아 조금 안심은 됐다.
노스님은 악한 귀신을 느낄 순 있으나, 귀신 자체를 보진 못했다.
일종의 귀기에 민감하단 의미다.
그런데도 아이를 못 느꼈다면, 악귀는 아니란 소리였다.
“뭐라고 칭얼대었는데?”
“엄마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흠, 여기서 금강경을 외우고 있도록 해라.
잠시 다녀와야겠다.”
밖으로 나와 사제가 머무는 접객방에 들어가니, 오래된 서책을 하나 꺼내 읽고 있는 게 보였다.
“또 옛 문헌을 뒤져 절맥된 무예를 찾아보려고?”
“후, 뭐 제가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사제 홍무경은 어린 제자 외에는 특별히 하는 일이 그리 없기에, 저런 소일거리라도 하나 싶었다.
“사제 혹시 말이야. 빨간 모자 쓴 여자아이가 죽는 걸 본 적이 있나?”
“빨간 모자요? 음... 그거, 참.”
“왜 그러나?”
잠시 머뭇거리던 사제 홍무경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사연을 털어놓는다.
“한 달 전인가 대전 가는 진천쯤에서 차량 전복사고가 있었는데. 엄마가 운전하고 아이가 옆에 탔더라고요.
그 차가 사고 나면서 엄마는 바로 죽고.
아이는 제가 끄집어내서 응급실로 실려 갔지만, 하루를 못 넘기고 하늘로 갔죠.
그런데 사형은 그 애를 어찌 알고, 또 제가 본 것은 어찌 알았나요?”
사제의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사형이다.
의문이 든 눈빛으로 한참을 쳐다보는데, 사형이 그제야 눈을 떴다.
“이 이야긴 어디 가서 해선 안 되네.
식구든 누구든 간에...”
“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네가 아까 본 태월이는 귀신이 보인다네.
그래서 이곳에 부모가 잠시 있게 한 것이고 말이야.”
“그럼 그 애가? 그 사질은 그 현장에 없었는데, 그럼 혹, 혹시? 제 옆에 있다고 하나요?”
노스님이 고개를 끄덕여 그의 물음에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그 여자아이가 왜 있는지도 안다고 하나요? 요즘 몸이 이상하게 시달리는 기분이거든요.”
“아이가 엄마에게 데려다 달라고 한다더군.”
“아, 서로 죽은 곳이 거리가 멀어서 찾지 못하나 보네요.”
귀기를 잘 느끼는 사형으로 인해 귀신의 존재를 어느 정도 믿는 사제였다.
유사한 경험도 몇 번 있었고 말이다.
“그럼 사질을 데리고, 제가 그 사고 현장으로 다녀와도 될까요? 죽은 모녀간에도 좋은 일이고, 저도 짐을 벗어야 할 테죠.”
“나도 같이 가도록 하지. 주변에 잡귀가 들러붙으면 내가 나서야 하니.”
다음 날 아침, 사제가 타고 온 차에 노스님과 태월이가 동승해 대전 방면으로 향했다.
“태월아? 아직 그 아이 내 옆에 있니?”
“네, 사숙, 기분이 좋은지 생글생글하네요.”
“넌 대화도 가능하니?”
“아, 아주 간단한 정도만요. 제가 어려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아직은 그게 전부예요.”
“부모님은 안 보고 싶어?”
“매주 주말마다 오셨다 가는걸요.
제가 건강해 보인다고 참 좋아하셔요.
그리고 저도 내년 봄이 되면, 부모님과 함께 살 수 있는걸요.”
홍무경은 태월의 말에 사형을 쳐다보았다.
노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했다.
“학교 입학해야 하거든.”
“아 아, 맞네. 그렇겠네요.”
그러고 보니 홍무경의 제자인 설희도 그때쯤 학교를 입학해야 했다.
두 시간 정도를 가니 진천이란 곳이 나왔는데, 차는 그곳에서 멈추었다.
홍무경이 먼저 내리고 뒤따라 노스님이 태월의 손을 잡고 내렸다.
“사형, 저쪽입니다.”
사제의 뒤를 따라 10여 미터 정도를 가니 가드레일이 일그러진 장소가 나왔다.
흔적은 없앤다고 한 것 같은데, 약간의 혈흔과 타이어 마찰 자국 그리고 작은 유리 파편들이 조금 남겨져 있다.
태월이 주변을 둘러보는데 별다른 것은 눈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디선가 물 냄새가 나며, 가슴이 간질거렸다.
태월은 홍무경을 돌아보았다.
“사숙, 이곳과 제일 가까운 강이 있나요? 좀 전에도 다리를 건넌 거 같은데. 그 다리 말고 여기서 제일 가까운 강 쪽요.”
“넌 질문하는 형식이 꼭 탐정 같구나?
저쪽으로 차를 타고 가면 될 거다.”
다시 차를 타고 5분 정도를 가니 강이 나온다.
“음, 왼쪽으로 가주세요. 셋이 있는데 그중 두 분이 여자분이네요.”
태월이의 의견대로 차가 이동되었다.
홍무경과 태월 그리고 노스님이 거의 동시에 내리자, 귀신 셋 중 하나가 멈칫거린다.
홍무경의 옆에 붙어 있던 꼬마 아이가 그 여자에게 달려갔다.
“아, 찾긴 찾았는데, 저 두 귀신이 방해를 놓을 듯합니다.”
귀기가 느껴지는 데로 노스님이 앞장을 섰다.
“제가 모녀의 앞을 막아설 테니, 제 앞에 서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노스님의 손을 잡고 뛰다시피 달려가는 태월이다.
태월이 돌아서자, 그걸 신호로 알아차린 노스님은 그 앞을 막아서며 고함을 질렀다.
-갈(喝)!!
“옴 소마니 소마니 훔 하리한나 하리한나 훔 하리한나 바나야 훔 아나야 혹 바아밤 바아라 훔 바탁!!”
꾸짖는 소리에 이어, 항마진언이 노스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태월은 전날 노스님에게 받은 오래된 염주를 구슬처럼 가지고 주머니에 넣어두고 있었다.
그것을 손에 한가득 꺼내고는, 앞쪽 허공 어딘가를 향해 하나씩 던졌다.
18개의 염주 알 중 8개를 던지고 나서는 소리를 쳤다.
“스님 할아버지! 그 둘이 도망갔습니다.”
항마진언을 반복해 토해내던 노스님도 그제야 멈추었다.
태월이 뒤를 돌아보니 모녀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예를 전했다.
그리고 그들 주변 빛무리가 처음보다 점점 더 밝아지더니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빛무리 속에서 제일 밝은 빛줄기가 태월에게 쏘아져 갔다.
피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슉!
“헉!”
왼쪽 팔목으로 들어온 것이다.
태월의 놀란 소리에 노스님과 사숙이 쳐다보았다.
아직 이 현상을 확신할 수 없고,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 머리만 긁적였다.
“그 모녀는 갔느냐?”
“네, 방금 빛무리를 이루며 하늘로 솟아올랐습니다.”
태월의 이야기에 홍무경은 어이없다는 듯 말한다.
“아니? 뭐야? 저승사자 그런 게 오는 거 아니었어? 사형! 책에 나온 거랑 너무 다른데요?”
“에휴, 바로 죽어야 저승사자가 올 거 아닌가? 모녀가 피해 다니다가 이제 올라간 거네.
염불도 제대로 못 하는, 사제에게 뭘 바랄꼬.”
어제까지만 해도 조금 근엄하게 보이던 사숙이 오늘은 경망스런 캐릭터로 변신 되었다.
태월은 바닥에 떨어진 염주 알을 전부 회수하고는 차에 올라탔다.
“태월아? 너 그 염주 알로 던지면 귀신이 맞아? 맞아도 그게 아플까?”
“글, 글쎄요. 그래도 피하려 하던데요?”
“사제! 귀신이 육신이 있는 걸까? 아님, 혼령 상태일까? 그럼 천주교에서 성수를 왜 뿌리나? 물에 맞으면 아플까?”
“음, 염주가 딱딱하니, 더 아프긴 하겠네요.”
“헐, 관세음보살...”
차는 다시 하남 건곤암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이틀간 노스님 대신 사숙에게 수박(手搏)과 각희(脚戱)를 배우게 되었다.
노스님에게는 기본자세만 배운 상태였는데, 기본 활용도 배우게 된 셈이다.
수박은 손을 주로 쓰는 과거 태권도 형태고, 각희는 발기술을 사용하는 택견 형태였다.
사숙은, 일상 대화 때의 살가움이 무예의 배움에는 전혀 없었고, 엄하게 가르쳤다.
이틀간 기초의 틀을 제대로 가르쳤다며, 혼자 자축하던 사숙은 떠났다.
태어날 때 흡수된 호족의 영기는 태월에게 명석한 머리와 빠르고 강한 순발력을 가진 육체를 주었다.
두 가지를 매일 세 시간씩 해야 한다고 했다.
태월에게는 물 긷는 수고로움이 사라져서 나쁘진 않았다.
가끔 오는 사범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곽재진이라고 했다.
노스님의 제자인듯한데, 나이가 50대쯤 되어 보였다.
태월의 아버지인 박승철의 태권도 사부가 되는 한대석이란 분의 사형이라고 한다.
그 덕에 태월은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다른 일이 더 바빠 잊어버렸다.
오늘은 염주 알을 노스님에게 또 선물 받아서 즐거운 기분이었다.
구슬처럼 만지고 놀다가, 문득 그 당시가 떠올랐다.
“흠, 그때 그 빛줄기는 뭐였을까?
지금은 아무런 변화도 못 느끼겠는걸?
아픈 데도 없고 좋아진 데도 없고.
내가 잘못 본 걸까?”
주변에 아무도 없기에 혼자 떠드는 태월이다.
노스님의 시중을 드는 젊은 스님 한 분이 있긴 하지만, 외출이 잦기에 늘 있진 않았다.
노스님이 종종 부적을 그리기도 하시는데, 그걸 어딘가로 보내는 것 같았다.
그림글자인 것 같아 가르쳐 달랬더니, 지금 배우는 법문 독송을 다 외운 다음에 생각해보자고 했다.
금강경을 떼고 법화경에 들어섰을 가을 무렵이었다.
노스님이 승복을 잘 차려입고 나오더니, 태월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태월은 염주 알 담는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따라나섰다.
그날 이후로 가지고 다니면 든든한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젊은 스님인 도명스님은 오늘 기사 역할을 맡았는지 운전석에 있었다.
“스님 할아버지? 오늘은 무슨 일로 가는 건가요? 멀리 가나요?”
“허허, 궁금한 것도 많구나. 오늘은 구병의식을 하러 가는데, 들어는 봤지?”
“네, 달라붙은 귀신에게 법문을 알려주어, 불법에 귀의하게 만드는 거라고 알고 있어요.”
“오, 큰스님! 태월이가 너무 똑똑한데요?”
“그렇긴 하지. 조선 시대에 태어났으면 장원급제 감이지. 춘향을 만났을지도.”
운전하고 있던 도명스님의 말에, 노스님은 기분이 좋은지 잘 안 하던 농을 했다.
차는 송파구 잠실로 향했는데 커다란 정원이 잘 가꿔진 단독주택이었다.
도명스님이 노스님 몰래 태월에게 귀띔해주기로는, 집주인이 대기업 임원이라고 했다.
“어서 오세요. 큰스님!”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일단 따뜻한 차라도 한잔하시고….”
“그럽시다. 태월아 조심히 따라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