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살수-313화 (313/314)

313화.

아직은 갈 길이 멀었다.

섬서에서 지체할 여유 따윈 없었다.

혈천주를 호위하는 3대 혈궁주 검괴의 말에 적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해련의 필요성을 혈천주에게 보여줄 기회였다.

자신의 조부인 사망도제를 감히 부천주로 만족하게 만든 신비의 절대자.

혼세신마와 환마를 굴복시킨 혈천주에게 보여줘야만 했다.

“화산의 제자들이여! 섬서의 무혼(武魂)이여! 악도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자!”

“종남의 제자들은 검을 들어라!”

“목가의 형제들은…….”

화천기의 선창에 섬서무림은 사생결단을 선언했다.

대의를 위한 거룩한 결단이었지만, 그 결과는 결코 거룩하지 못했다.

“이…렇게 무너질… 수는… 우웩!”

섬서무림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사해련이 사파사세라도 사망도제의 죽음과 함께 전력이 반 토막 난 지금, 충분히 해 볼 만한 싸움이었다.

허나 예상치 못한 변절자들로 인해 균형이 점점 기울게 되었다.

혈천주는커녕 혈궁조차 나설 필요가 없었다.

“그때보다 약해졌군. 아쉽지만 이제 그만 죽게.”

“아직… 아직…! 컥!”

서걱!

화산 장문인 화천기는 강했다.

그러나 조급함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화산제자들은 물론, 섬서고수들이 죽어나가고 있기에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육참도부는 사냥하듯 화천기를 궁지로 몰았다.

두 사람의 무위는 비슷할지라도 결국 마음가짐의 차이가 생사를 좌우하게 되었다.

그렇게 대 화산 장문인 화천기는 화산과 운명을 함께 했다.

그의 죽음을 기점으로 섬서무림 역시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섬서무림 최고수들이 차례차례 죽음을 맞이하면서 전세는 더 이상 만회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제 정리… 컥!”

“뭐, 뭐야!”

결국 섬서무림의 생존자들은 검을 놓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싸움은 끝이 났다.

하지만 정확히는 끝이 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명의 진원지는 섬서무림의 고수들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사해련 고수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한월애루(寒月哀淚)!”

“으아악!”

“수월혈염(水月血染)!”

“커어억!”

검이 움직일 때마다 사해련 고수들의 목숨 역시 사라져갔다.

살이 아릴 정도로 차갑고 섬뜩한 검술이었다.

“한천마녀? 화산 장문인의 누이라고 했던가? 그럼 죽여줘야지.”

이가장에 있어야 하는 화옥령이 이곳 섬서에 와 있었다.

소문을 듣고 홀로 장원을 떠났던 것이다.

그런 그녀를 보며 공을 세울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귀혼도(鬼魂刀) 섭중백이 움직였다.

맹룡부주의 의제인 섭중백은 전(前) 감숙칠숙의 한 명이었다.

맹룡도객 자광이 강맹한 도법을 구사한다면 귀혼도 섭중백은 음험한 도법을 구사했다.

쾅!

“큭!”

“흐흐. 죽어라!”

칼과 검이 충돌하면 십중팔구 검이 밀린다.

칼이라는 무기 자체가 검보다 힘을 싣기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허나 그건 동일한 조건일 때의 이야기였다.

쾅! 쾅! 쾅!

“검 따위는 칼을 막을 수… 헉!”

“한월만천(寒月滿天)!”

본디 검이란 칼처럼 힘으로 밀어붙이는 무기가 아니었다.

화옥령은 섭중백의 칼을 막아내며 기회를 엿보다가 한월검결의 절초인 한월만천을 펼쳤다.

음험하고 괴랄한 도초가 생명인 귀혼도법을 펼쳤다면 몰라도, 어울리지 않게 힘으로 밀어붙인 섭중백은 한월만천을 온전히 막아낼 수 없었다.

공에 눈이 멀어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려던 섭중백은 본인의 실력을 완전히 발휘하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이게… 아닌…데…….”

“섭 아우!”

“형님!”

섭중백과 의형제 지간인 자광과 원후는 그의 이름을 외치며 화옥령에게 달려들었다.

내공 소모가 큰 한월만천을 펼친 직후였기에 화옥령은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섭중백과 비견되는 자광과 원후의 합공을 받으니 버텨내기가 쉽지 않았다.

쾅! 콰쾅!

“이년! 죽여버리겠다!”

“죽어라!!”

자광과 원후는 흥분한 상태였기에 위력이 강력한 만큼 동작 역시 컸다.

빈틈이 여럿 보였으나 화옥령은 그것을 쉽게 노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흥분한 와중에도 빈틈을 노리지 못하게 능숙하게 서로의 빈틈을 메워주었다.

콰쾅!

“으윽!”

“이제 죽… 컥!”

“커억!”

안 그래도 지친 화옥령으로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나가 떨어졌다.

허나 목숨을 잃은 자는 화옥령이 아닌 자광과 원후였다.

화옥령 대신 누군가 그들을 베었다.

“괜찮소.”

“너… 네가 감히!”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자는 외팔이의 사내였다.

화옥령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내를 향해 감사는커녕 분노를 터트렸다.

그럼에도 사내는 그녀의 상태를 걱정했다.

“흥분하지 마시오. 상처가 벌어지오.”

“죽어!”

흥분한 화옥령을 검을 찔렀다. 사내를 그녀의 검을 피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그의 옆구리가 베였다.

원래는 사내의 가슴을 노렸으나 그가 피하지 않자 화옥령이 자신도 모르게 검을 옆으로 빗겨냈기 때문이다.

“내 목숨을 원한다면 주겠소. 그러나 지금은 피합시다.”

“너… 네가 나에게 어떻게…….”

그를 찔렀다는 사실에 더욱 흥분한 화옥령은 말조차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더욱 가엽기만 했다.

그때 고수들이 그들을 포위했다.

사내는 그들을 베고 벗어날 생각인지 검을 쥐었다.

그때였다.

“모두 물러나라.”

“조, 존명.”

사해련 고수들은 혈궁주의 명령에 눈치를 보며 물러났다.

그들은 사해련 소속이었지만, 자신들의 련주가 혈천의 휘하임을 알기 때문에 혈궁주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혈뢰검마! 감히 배신자 주제에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났나!”

“검괴, 떠날 테니 그만 날 놔주게.”

자광과 원후를 베고 화옥령을 구한 자는 바로 전(前) 혈궁주이자 신비각주인 혈뢰검마였다.

혈천을 떠난 후 그는 이가장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현성이 없는 이가장에서 그의 기척을 감지할 고수는 없었다.

그는 화옥령이 이가장을 떠난 후에도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지금처럼 그녀가 위험할 때 구하고자 함이었다.

“네가 아직도 혈궁주인 줄 알더냐!”

“그분을 보좌할 너를 베고 싶지는 않다.”

“건방진……!”

혈뢰검마 대신 혈궁주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 검괴는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초대 혈궁주의 진전을 완전히 이어서 화경고수가 된 혈뢰검마와 달리, 검괴는 아직 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혈뢰검마는 난감했다.

아무리 혈천주 주윤문의 곁을 떠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마음속으론 주군으로 섬기고 있었다.

검괴를 죽여서 그분에게 폐를 끼칠 수 없었다.

그때,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괴, 물러나라.”

“조, 존명!”

혈궁주 검괴는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에게 명령을 내린 존재가 혈천주이기 때문이다.

혈천주가 다가오자 혈뢰검마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혈천주가 나직하게 말했다.

“언젠가 네 목을 거두겠다고 말했거늘… 그리도 죽고 싶더냐.”

“불충한 신을 죽이시고, 그녈… 살려주십시오. 부디… 신의 마지막 청을 들어주십시오!”

“누가… 누가! 날 살려달라고 했어!”

부복한 채 마지막 청을 하는 혈뢰검마를 바라보던 혈천주가 뒤늦게 악을 쓰는 화옥령을 바라봤다.

혈천주의 차가운 시선에 화옥령은 움찔했다.

무형지기로 압박한 것이 아님에도 그녀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너구나, 본좌에게서 그를 뺏어간 자가…….”

“그녀를 살려주십시오!”

혈뢰검마는 그가 당장이라도 화옥령의 목숨을 거둘 것 같아서 큰 소리로 사정을 했다.

혈천주는 너무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나의 일검을 막는다면 너희 모두를 살려주마.”

“그, 그런…….”

고작, 일검(一劍)이었다.

좌중은 혈천주가 그를 살려주려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혈뢰검마는 좌절했다.

자신은 물론 그녀의 목숨까지 거두겠다고 들렸기 때문이다.

“넌 거부할 수 없다.”

“…신(臣),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죽음을 각오했는지 혈뢰검마는 주군인 혈천주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 모습을 보며 검뢰와 혈궁 고수들은 분노를 터트렸다.

얼마 전까지 혈궁주였던 자가 감히 하늘과 같은 주군께 검을 겨누었으니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는가.

허나 혈천주는 결코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견해 했다, 자신의 일검을 받아내겠다고 각오한 그를…….

“약조는 지켜주마. 내 일검을 받아낸다면…….”

“혈(血)! 뢰(雷)! 멸(滅)! 천(天)!”

혈뢰검마는 자신의 최강 절초인 혈뢰멸천을 펼쳤다.

선천전기까지 불태워서 혈뢰멸천에 담았기 때문인지 하늘조차 일그러지는 허상이 보였다.

비록 직위를 박탈당했다고 해도, 혈궁주이자 신비각주였던 혈뢰검마다운 신위였다.

허나 혈천주는 팔왕(八王) 아니, 화경고수조차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안타깝군. 네가 혈뢰마검의 끝을 보길 원했거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혈천주가 가볍게 검지를 움직였을 뿐인데, 가공할 기세를 보이던 혈뢰멸천이 사라지고 혈뢰검마가 쓰러졌다.

“컥!”

“왜… 당신이 죽은 거야…? 왜…….”

화옥령에게 혈뢰검마는 원수였다.

임신한 자신을 베고, 아비 역시 벤 철천지원수.

허나 죽은 그를 부여잡고 절규했다.

혈뢰검마는 원수인 동시에 사랑했던 사내였다.

화옥령의 절규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 역시 혈천주의 손에 절명했기 때문이다.

“저들에게 손을 대지 마라.”

“존명!”

혈천주가 손짓을 하자 흙더미가 죽은 사람을 덮었다.

순식간에 무덤이 만들어졌다.

허공섭물조차 넘어선 신기였다.

그들의 죽음 이후 혈천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 * *

“그, 그런…….”

무림맹의 명숙들이 소림에 방문했다.

혈천을 막기 위해 성승께서 움직여 달라고 청하기 위함이었다.

허나 소림은 그 청을 거절하고 말았다.

“대, 대사님께 폐를 끼치긴 저희 역시 싫습니다. 허나 상황이…….”

“아미타불…….”

끝내 거절하는 소림장문 범천대사를 보며 명숙들은 결국 화를 내고 말았다.

성승이 아니면 이를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소림만 피해가겠단 말씀이십니까! 대사님!”

“어허…! 자네 말이 너무 심하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시주님.”

“이 친구의 말이 심하긴 했으나 료굉대사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무림은 끝입니다.”

그들은 절박했다.

무서운 속도로 무림을 장악하고 있는 혈천의 거침없는 행보는 무림맹만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소림 그리고 성승 료굉대사가 나서줘야 한다.

“천하의 어려움을 어찌… 본사가 모른 척하겠습니까?”

“그 말씀은……!”

범천대사의 말에 분통 터트리던 무림맹 명숙들의 얼굴에 희망이 생겼다.

허나 범천대사는 그들의 희망을 짓밟을 수밖에 없었다.

“허나 사조께선 나서지 못하십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미타불… 사조께선 천사존 사마 시주님을 막으신 후… 아미타불…….”

범천대사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불호를 대신 읊었다.

무림맹 명숙들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그의 뒷말을 깨달았다.

결국 그들은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세존이시여…! 이 시주께서 깨어나실 때까지 저희가 버틸 수 있게 해주소서.’

* * *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이른 시간부터 이가장은 무척이나 부산스러웠다.

귀환살수

— 문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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