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혼세신마나 환마도 이런 것이 가능했다.
허나 그들은 애써서 기세를 일으켜야 가능하지, 혈천주처럼 그저 툭 던진 한마디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혈천주가 진짜 인간이 맞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본좌가 혈영수라라는 유희를 그만둔 이상! 자네들만 믿고 맡길 수가 없구나.”
혈천주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천하가 아니었다.
허나 그가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만든 집단이 바로 혈천(血天)이었다.
그는 실질적인 권력을 부천주에게 맡긴 후 천하일통이라는 명분을 던져주었다.
혈천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준비 및 공작을 통해 대계를 준비해왔다.
어느 정도 뜻을 이룬 후 혈천주는 혈영수라는 가짜 신분을 만들어서 유희를 즐겼다.
고작 중원 하나 차지하겠다고 발버둥치는 저들을 보면서.
허나 아직 완벽하게 뜻을 이룬 후가 아니었기에 혈궁에서 때를 기다렸다.
그런 그가 혈영수라라는 유희가 아닌 혈천주로서 모두의 앞에 나왔다.
“신마.”
“예, 혈천주님.”
“운남으로 가게. 관일창왕과 독왕 그리고 천웅창제의 목을 가져오게. 지옥대제가 도와줄 걸세.”
“지옥…대제 말씀이십니까? 혼세신마, 혈천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혈천주의 말에 대장로인 혼세신마는 물론, 혈천의 고수들은 깜짝 놀랐다.
지옥대제가 거론된다는 것은 그 역시 이미 포섭이 되었단 뜻이다.
실질적으로 혈천을 이끄는 혼세신마나 환마조차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대군사는 알고 계셨소?
―그, 그럴 리가요. 저 역시 처음 듣는 이야깁니다. 대호법님. 지옥대제를 언제…….
혈천의 눈과 귀를 맡고 있는 자는 대군사 문인윤걸이었다.
대계의 전반을 조율하기 위해선 수시로 변화하고 있는 정세를 꿰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조차 지옥대제와의 일은 알지 못했다.
그들은 혈천주의 힘에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다.
“환마.”
“예, 혈천주님.”
혁련중광이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혼세신마에게는 화경고수들의 목을 요구했다.
자신에게도 그에 버금가는 명을 내릴 터이니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양의검성과 검왕을 벤 후 천사교를 지우게.”
“…혈천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혈천주의 입에서 나온 제거 대상은 전부 화경고수였다.
그런데 유일하게 세력인 천사교가 거론되었다.
천사존을 배출한 천사교의 잠재력은 충분히 위협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천사존이 건재했다면 아무리 환마라도 천사교를 지울 수 없었다.
그만큼 천사존은 성승과 함께 혈천주조차 인정한 강자였다.
허나 성승에 의해 쓰러진 천사존을 제거하고 천사교를 무림에서 지우는 것은 환마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본좌는 혈궁과 사해련만 이끌고 북경으로 가겠네.”
“……!!”
북경은 하북성 안에 위치한다.
허나 하북과 북경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혈천주의 입에서 하북이 거론되었다면 하북팽가의 도왕을 베겠단 의미로 생각할 수 있었다.
허나 혈천주는 하북이 아닌 북경을 콕 짚었다.
북경의 다른 명칭은 바로 황도(皇都).
황제가 거하는 도시였다.
무림의 힘이 미칠 수 없는 곳이다.
그런 북경에 무림고수 한두명도 아닌 대군을 이끌고 간다는 것은 무림만이 아니라, 황실과도 전쟁을 벌이겠다는 뜻이었다.
황실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백만금군은 물론 금의위, 동창, 구문제독부 등 수많은 고수집단이 황실을 수호하고 있었다.
알려진 것보다 숨겨진 힘이 더 많은 곳이 바로 황실이었다. 그런 황실과 무림이 충돌한다면 어느 하나 무사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황실과 무림은 불가침조약을 맺고, 그동안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이거 위험한데…….’
혈천주의 선언에 많은 고수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고래(古來)에도 중원무림만 아니라 황실까지 탐을 낸 자들이 존재했다.
인간의 탐욕은 원래 끝이 없는 법이니까.
허나 어느 한 명 뜻을 이룬 자가 없었다.
중원무림조차 일통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수차례 천마대전을 일으킨 마교조차 마지막에는 항상 실패를 해왔다.
하물며 황실까지 손에 넣을 힘을, 한 세력이 가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허나 혈천주는 오만하게도 중원무림만 아니라 황실까지 지배할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모두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어느 누구 하나 감히 나서서 반박하지 못했다.
혈천주에게서 항거할 수 없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제왕지기(帝王之氣).
수련을 통해서 익힐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고수라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그런 기운이 아니었다.
“…위대하신 혈천주시여, 미천한 종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대군사, 그대가 어찌 미천한 종인가. 허(許)하네.”
혈천의 모든 고수들은 문인윤걸의 말에 귀를 쫑긋했다.
문인윤걸은 심장이 쿵쾅쿵쾅 거렸다.
허나 혈천의 대군사로서 간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혈궁과 사해련의 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그들만으로 북경으로 향하시는 것은 위험하다고 사료됩니다. 부디, 오당팔각 그리고 혈천삼십육대의 절반을…….”
“대군사… 오당팔각과 혈천삼십육대의 절반을 대동하면 황실을 전복시킬 수 있나?”
“그, 그건…….”
혈천주의 말에 문인윤걸은 당황했다.
전(前) 태태감의 반역으로 인해 수많은 황실고수가 죽었음에도 황실의 힘은 아직도 건재했다.
북방 총사령관, 금의위 도독, 제독동창 등 화경고수가 여전히 황제에게 충성을 다했다.
초절정고수가 수십이고, 절정고수는 발에 차이는 곳이 황실이었다.
오당팔각과 혈천삼십육대의 절반이 아니라 혈천 전체가 움직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말문이 막힌 문인윤걸을 보며 혈천주가 미소를 지었다.
“본좌가 곧 혈천일세. 안 그런가, 대군사.”
“무, 물론입니다. 혈천주님.”
“본좌가 직접 움직인 이상 별도의 병력은 필요 없네. 그럼에도 혈궁과 사해련을 대동하는 것은 북경까지 가는 동안 번거로운 일을 피하기 위함일 뿐일세. 그리고 혈궁과 사해련만 날 호위할 것이 아닐세.”
“그 말씀은…….”
혈천주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눈치 빠른 문인윤걸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기에 곧장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혈천주는 하늘을 바라보며 차가운 조소를 지었다.
“이제 나의 것을 돌려받으러 가볼까?”
* * *
“커억!”
“으아악!!”
“사, 살려…….”
사해련에 의해서 사천무림이 유린된 지 수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사천무림은 또다시 피로 물들었다.
갑작스럽게 사천성을 침범한 수천의 무리에 사천무림은 즉각 대응했다.
허나 그건 실수였다.
그들은 너무도 강했고, 또한 무자비했다.
대항하는 순간 사천무림인들은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사천삼세를 제외하고 사천무림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힌다는 금양문주는 절규했다.
“사해련 놈들아! 도대체 우리 사천에 무슨 원한을 가졌기에 이러는 것이더냐!!”
“사해련? 무슨 헛소리인지 모르겠군. 우리는 혈천! 대업을 방해했으니 죽는 것은 당연하지.”
“혀, 혈천! 도대체… 컥!”
자신들을 학살한 무리는 사해련이 아니었다.
그들은 혈천주의 명을 받고 남하 중인 혼세신마와 혈천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사천무림이 아니었지만, 운남성으로 가는 길목에 사천성이 위치했기에 가로질러 가는 길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그들을 막았던 금양문과 사천북부는 완전히 초토화되고 말았다.
“대장로님을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실 거냐!”
“죄, 죄송합니다. 철혈방주님.”
사천무림에서 제법 콧방귀를 뀐다는 금양문주가 저항도 못하고 절명하는 것은 당연했다.
혈천십삼세의 하나인 철혈방주는 감히 금양문주가 감당할 수 없는 초절정고수였기 때문이다.
혈천주의 명령을 수행하는 혼세신마를 보좌하기 위해서 혈천의 장로와 호법들이 동행했다.
따라서 그토록 막강한 군세를 사천무림이 막아내는 것은 어려웠다.
그렇게 혼세신마를 필두로 혈천의 고수들은 자신들을 가로막는 적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리고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우웩! …젠장! 당가 애송이 놈, 죽여버리겠다!”
사천무림과 사천당가는 혈천주의 명령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사천무림을 방관할 수 없었다.
결국 혼세신마는 사천당가주인 암군 당자성의 목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그런 혼세신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철혈방주는 자청해서 당자성과 싸웠다.
허나 그건 그의 오만에 불과했다.
사망도제도 인정한 청해마왕이 당자성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철혈방주 역시 대단한 고수였지만, 청해마왕과 비교했을 때 비슷하거나 약간 처진다.
그런 그가 자신만만하게 나섰으니 망신을 당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만! 철혈 호법, 물러나게.”
“대, 대장로님 기회를 주십시오!”
망신을 당한 채 물러날 수 없었던 철혈방주는 최고의 절학으로 되갚아 줄 생각이었다.
허나 그런 그의 생각과 달리 혼세신마는 그를 물렸다.
당자성은 아직 앙천독강도 펼치지 않았다.
결국 철혈방주가 감당할 수 없단 뜻이었다.
“자네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닐세. 허나 암군 따위를 상대로 더 이상 시간을 버릴 수는 없네. 혈천주님의 명령을 잊었나?”
“아, 아닙니다. 대장로님.”
철혈방주가 암군 당자성에게 죽는다면 괜히 사기만 떨어진다.
그걸 알기에 철혈방주를 뒤로 물렸다.
대장로인 혼세신마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지 철혈방주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영광으로 알거라. 본 신마가 직접 죽여줄 테니까.”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혼세신마 본인이 나섰다.
비록 화경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앙천독강 덕분에 거의 그에 근접한 무위를 이룬 당자성이었다.
혼세신마에게서 풍기는 강력한 기세를 모를 수가 없었다.
혼세신마는 당자성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발악해라.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으면…….”
“쿨럭… 쿨럭…….”
당자성의 입에서 연신 거친 기침이 나왔고, 그의 눈에는 낭패가 어려 있었다.
강할 줄은 예상했으나 그의 강함은 상상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패색이 짙은 당자성을 향해 누군가의 오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이 정도 밖에 안 되나, 암군.”
바로 혼세신마였다. 과연 혈천의 대장로다웠다.
사천정벌을 위해서 성도를 침범했던 청해마왕을 죽인 자가 바로 당자성이었다.
그렇기에 사천고수들은 이번에도 그가 적을 무찔러줄 거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허나 그들의 희망은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혼세신마의 압도적인 신위를 본다면 누구나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구보다 당자성 본인이 가장 절망스러웠다.
‘괴물… 혈천은 도대체…….’
그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자신은 사천무림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 때문에 마교의 마학까지 손을 대었다.
이대로 포기한다면 자신의 결정이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오호? 앙천독강인가? 오냐, 얼마나 헛된 꿈을 꾸고 있는지 알려주마.”
“……!”
약해졌던 당자성의 기운이 다시 강렬하게 변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