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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살수-307화 (307/314)

307화.

자식이 그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혁련중광은 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 언중경에게 금제를 가했다.

아무리 언중경이라도 화경고수인 혁련중광에게 제압될 수밖에 없었다.

“진주언가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게. 세가는 내가 챙겨주겠네. 무림맹주이자 모용세가의 태상가주로서 약조하겠네.”

“…약조해주시겠습니까. 맹주님.”

아무리 야망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언중경은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금제를 당해 개 취급을 당하고도 참을 인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참은 것은 오직 가문을 위해서였다.

자신이 죽은 후 몰락할 진주언가에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었다.

“본가를… 부탁드리겠습니다.”

“…….”

언중경은 모용묵과 서문경에게 인사를 한 후 조용히 물러났다.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진 거인의 모습은 너무도 초라했다.

그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쯤, 서문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맹주님, 어찌 아셨습니까. 언 가주께서… 변절자라는 사실을…….”

“변절자는 언 가주만이 아니기 때문일세.”

모용묵의 씁쓸한 미소보다 그의 말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명색이 무림맹 대군사이건만 모르는 사실이 너무 많았다.

막강한 권력을 쥐었던 전임 대군사 대신 부리기 쉬운 자신을 택한 사실을 알기에 서문경은 씁쓸했다.

“…은밀하게 조사해주게.”

“…제 힘으로 가능할지…….”

“내가 힘을 실어주겠네. 그럼 가능하지 않겠나?”

“…해보겠습니다.”

자칫 무림맹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명색이 무림맹주이니.

‘이렇게까지 엉망일 줄 알았다면… 맹주가 되지 않았을 텐데…….’

사해련의 진정한 주인

“결국… 이렇게 되셨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다면 할아… 대사님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어찌 대협의 탓이겠습니까. 사조님의 결정이셨거늘… 아미타불…….”

료굉대사의 시신은 은밀하게 소림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의 죽음이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성승의 존재만으로도 소림을 포함한 중원, 전체의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런 성승의 죽음이 알려지게 된다면 숨죽이고 있던 사파무림은 물론, 혈살성의 주인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소림은 성승의 죽음을 숨기기로 결정했다.

“사조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빈승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혈살성이 깨어났다고…….”

“그렇군요. 제게 미안하다는 말씀이 그거였군요.”

“아미타불…….”

이현성은 혈살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눈치채고 있었다.

그 역시 한때 혈천의 비수였으니 혈살성의 주인을 유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혈천.

그런 혈천의 수뇌만 영접한 적이 있다는 괴물 중에 괴물, 혈천주.

성승이 걱정할 만한 괴물은 혈천주 외에 있을 리가 없었다.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이미 삼제(三帝)를 능가했다고 자부하지만, 일성일존(一聖一尊)에게는 역부족이었다.

하물며 성승이 우려하는 혈천주를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허나 성승은 자신을 믿었다.

그리고 천사존을 막아내고 눈을 감았다.

백의무제가 쓰러지고 지옥대제와 천웅창제로서는 역부족인 지금, 그나마 가능성을 가진 자는 오직 자신뿐이었다.

‘혈천의 음모를 막을 생각이지만, 설마 내 손으로 혈천주를 막아야 하는 상황까지 올 줄이야.’

전생에서는 혈천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던 이현성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과거로 돌아오게 되었다.

미래를 바꿀 기회로 여긴 이현성은 혈천에 대한 복수심으로 힘을 키우고, 그들의 행사를 꾸준히 방해해왔다.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설마 혈천주까지 자신이 막아내야 하는 상황이 올 줄은 몰랐다.

“대협, 돌아가시기 전에 사조님의 거처에 방문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대사님의 거처를 말입니까?”

“예. 사조님께서 대협께 남기신 것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 년 만인가…….”

료굉대사의 암자는 소림의 심처에 위치했다.

하지만 성승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작은 암자였다.

일 년 전, 백의무제의 부탁으로 소림에 들렀다가 이곳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 성승은 아낌없이 깨달음을 전해주었다.

이현성이 검신이란 별호에 걸맞은 신위를 갖게 된것도 그의 가르침이 한몫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후 고작 일년이 지났을 뿐인데, 이 암자는 주인을 잃고 말았다.

“이거구나, 할아버지께서 남기셨다는 것이…….”

암자 안은 겉보다 더 단출했다.

과연 료굉대사의 성품다웠다.

허나 이현성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곱게 접혀 있는 서신이 놓여 있었다.

이현성은 서신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네가 이 서신을 읽고 있다는 것은 내가 사마 시주를 설득하지 못했다는 뜻이겠구나.]

료굉대사는 이미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었다.

서신에는 천하를 걱정하는 료굉대사의 진심이 담겨져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측했음에도 천하를 먼저 걱정하는 그의 서신을 보니 료굉대사가 왜 생불(生佛)이라고 불렸는지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부끄러웠다.

검신이라 불리며 만인에게 추앙받게 되었음에도 마음 한편에는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다.

정확히는 혈천주의 손에 자신이 죽는다면 아들인 이천악과 부인들 그리고 이가장의 가솔들이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을 걱정했다.

아비이자 남편이며 장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지만, 대의를 위해서 목숨조차 초개처럼 생각하는 료굉대사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도 하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자신을 귀히 여겨라. 천하보다 귀한 것이 사람의 목숨이란다. 자신의 목숨이 귀한 줄 모른다면 남의 목숨을 어찌 귀하게 여길 수 있겠느냐.]

료굉대사의 서신을 읽던 이현성은 실소했다.

대의를 위해서 목숨을 초개처럼 던진 료굉대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덕분에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강해지기 위해서 발악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신기하네.”

분명 죽을 정도로 위험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드니 기분이 묘해졌다.

[…하늘의 뜻일지라도 네 자신을 먼저 생각하거라. 이 늙은 중은 그러지 못했지만…….]

료굉대사는 이현성에게 역천(逆天)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었다.

희생만 하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저 할아버지로서 손자에게 하는 말처럼 보였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이현성은 좀 달랐다.

그는 자신을 옥죄던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허나 단순히 느낌으로 그치지 않고 그대로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현성은 이 와중에도 깨달음을 얻었다.

어느 시대든 화경고수는 존재했으나 현경고수는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가 단순히 현경이란 경지가 더 높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현경은 반선지경(半仙之境).

즉, 신선의 경지에 한발 디딘 상태였다.

신선 혹은 부처란 속세에 얽매이지 않고 홀로 완성된 존재.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존재를 말함이었다.

현경이란 그런 집착에서 벗어났으나, 완벽하게 이기적이지 못하기에 아직 육신이란 그릇에 머무른 마지막 종착지였다.

만약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완벽하게 이기적이게 된다면 그땐 육신의 탈을 버리고 홀로 완성된 존재가 되어버린다.

료굉대사는 스스로의 목숨에 대한 집착조차 버렸다.

허나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는지, ‘천하의 안위’라는 집착만은 버리지 못했다.

‘덧없구나. 세상 그 모든 것이…….’

지켜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난 이현성은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그의 육신이 붕 뜨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영혼이 육신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지켜야 한다는 집착이야말로 그를 지금까지 버티게 만든 족쇄였다.

그 족쇄를 풀어버리자 육신이란 그릇에서 벗어나게 된 이현성은 홀로 완성된 존재로 변화되었다.

이현성은 곧 료굉대사의 거처에서 벗어나 하늘로 승천했다.

육신이란 그릇이 없으니 그를 가로막을 것이 없었다.

그렇게 승천하던 이현성 아니, 홀로 완성된 존재의 눈에 고통 받는 수많은 존재들이 들어왔다.

허나 집착에서 벗어난 그였기에 그들을 봐도 어떤 감흥도 없었다.

삶의 소소한 행복에 만족하는 자들이 보였다.

그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게 점점 하늘을 향했다.

그 시각, 정주 이가장에서는 웃음을 끊임없이 이어졌다.

* * *

“호호호… 우리 천악이는 너무 귀여운 것 같아요. 이대로만 큰다면 많은 소저들을 울리고 다니겠는데요. 언니.”

“피가 어디 가겠어? 서방님 때문에 우리도 마음고생 많이 했잖아.”

“하긴 그랬죠.”

갓난아기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제갈현지와 문교교.

그녀들의 입에서는 끝없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마음고생을 해왔지만, 이렇게 귀여운 아들까지 낳은 제갈현지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꼼지락거리는 이천악을 문교교는 친엄마인 제갈현지보다 더욱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동시에 너무도 부러웠다.

“뭘 그렇게 부러워해? 동생도 아기를 가졌으면서?”

“헤헤~ 신기해요. 제 뱃속에 천악이 동생이 있다는 사실이…….”

이가장에는 또 다른 경사가 생겼다.

제갈현지가 출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거늘, 이번에는 문교교가 회임을 했다.

출산으로 인해 몸이 약해진 제갈현지는 당분간 이현성과 잠자리를 할 수 없었다.

덕분에 이현성은 문교교가 독차지할 수 있었다.

나름 열심히 노력한(?) 덕분일까.

문교교 역시 이천악의 동생을 가지게 되었다.

사랑하는 님인 이현성의 아이를 홀로 가진 제갈현지를 항상 부러워하던 문교교였다.

그걸 알기에 제갈현지는 그녀의 회임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그녀들은 처음 약속한 것처럼 이현성의 부인들로서 투기를 부리지 않고 친자매처럼 너무도 잘 지내고 있었다.

이현성도 그런 두 사람에게 항상 고마워했다.

“천악아~ 조금만 기다려줘. 동생을 선물할 테니까~”

“아브…브브…….”

“호호호… 우리 천악이가, 아빠가 보고 싶나보네요. 언니.”

“천악이 아빠가 보고 싶어요~? 곧 오실 거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갓난아기인 이천악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괴이했으나 어미인 두 사람의 귀에는 ‘아빠’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인지 더욱 기뻤다.

벌써부터 말을 할 줄 안다고.

그때였다.

틱!

“어머! 동경이 왜 깨진 거죠?”

“동생, 다치진 않았지? 서방님께서 선물해주신 동경인데…….”

방의 한 쪽에 진열되어 있던 동경이 갑자기 깨졌다.

동경이야 얼마든지 다시 사면 되지만, 이현성이 그녀에게 선물했던 동경인 만큼 깨진 것이 무척이나 속상했다.

제갈현지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서방님… 무슨 일이 있으신 것은 아니죠? 천악이가 아빠를 많이 기다리고 있어요. 무사히 돌아와 주세요.’

귀환살수

— 문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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