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 * *
“이 말이 사실이렷다?”
“소인은 대주님의 서신만 전한 것이기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대호법님.”
혁련중광은 사내를 보며 피식거렸다.
그게 정답이었다.
괜히 어설프게 아는 척을 했다면 혁련중광이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었다.
“마옹의 보고와 다를 것이 없군. 야차도귀에게는 특이사항이 있으면 보고하라고 전해라.”
“존명!”
사내는 혈천삼십육대의 하나인 야차도대 소속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해련주의 호위를 맡기도 했다.
주인을 잃은 야차도대는 혈천에 복귀해야 하지만, 그대로 사해련에 남았다.
신임 련주인 적천우의 안위를 위함이라는 명분이지만, 사실은 그를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혁련중광은 흑천마옹만 아니라 야차도귀까지 은밀하게 포섭해냈다.
현재 건천각을 인계받고 있는 흑천마옹에 의하면 적천우가 사해련주가 된 사실에 취해서 자신이 허수아비란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야차도귀의 보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휘의 연락을 받지 못했지만 틀림없겠지.”
혈룡대의 두 조장이 변심해서 부대주인 혁련휘에게 붙인 이후 적천우는 혈룡대를 멀리했다.
정확히는 고립시켜서 정보를 차단시켰다.
명목상 혈룡대주는 여전히 적천우이고 사해련주인 만큼 혁련휘도 그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지금은 적천우보다는 혈룡대를 완벽하게 장악하는데 집중하라는 조부 혁련중광의 명령을 받은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적천우의 감시는 야차도대에 맡기고, 혁련휘는 혈룡대에만 집중한 상황이었다.
“휘에게 사해련을 넘겨주기 전까지 착각에 빠져 살거라. 애송아. 하하하!!”
겉으로는 사해련이 적천우의 것이 되었으나 실제는 혈천 대장로와 대호법이 쥐고 있었다.
진뢰궁귀를 내세운 대장로가 벽력마군과 음양색불을 끌어들였다면, 대호법은 흑천마옹을 내세워서 다정마녀를 포섭했다.
게다가 큰 기대도 하지 않았던 육참도부 역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비장의 패인 야차도귀까지 대호법의 편에 섰으니 사실상 대장로보다는 그가 더 우세한 상황이었다.
장손인 혁련휘가 혈룡대를 완벽하게 장악하면 서서히 사해련마저 흡수할 계획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은 비슷한 성세를 이루고 있는 대장로 혼세신마를 누를 수 있었다.
“신마(神魔)가 눈치채기 전에 끝을 내야 돼.”
* * *
“젠장!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무림맹 총단으로 복귀한 십절무왕 모용묵은 심기가 불편했다.
섬서정벌에 나선 사해련주를 벰으로써 자신의 위용을 알리려는 계획이 검신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다.
이어서 마공을 익힌 것으로 추정되는 사천당가주 암군 당자성을 징치하려고 했으나 그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허나 모용묵에게 굴욕을 준 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가 맹의 고수들을 이끌고 자리를 비운 사이 천사교가 움직이고 말았다.
다행이 소림의 성승이 막아주었기에 큰 희생이 발생하지 않고 마무리 될 수 있었다.
문제는 천사교의 도발 자체가, 무림맹주가 맹의 고수들을 이끌고 자리를 비운 것이 때문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런 모용묵의 곁에서 서문경과 언중경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사천당가 이후 신창과의 관계가 소원해졌기에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맹주님, 제가 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언 가주… 허락하겠네.”
신창과 관계가 소원해진 지금 언중경은 모용묵에게 중요한 인물이기에 그의 청을 수락했다.
모용묵의 허락이 떨어지자 언중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민심을 맹주님께 돌리기 위해선 그만한 위업이 필요합니다.”
“…알고 있네. 허나 마땅한 것이 없지 않은가.”
언중경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역시 위업을 만들기 위해서 섬서로 그리고 사천으로 떠났던 것이기 때문이다.
모용묵은 자신의 계획이 틀어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런 말을 하는 언중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사교를 치십시오.”
“……!!”
“어, 언 가주님, 그게 지금 무슨 말씀…….”
언중경의 예상치 못한 제안에 서문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그를 모용묵이 저지하며 언중경에게 되물었다.
“명분도 없이 움직일 수는 없지 않은가.”
“안휘를 향해 진격했다는 훌륭한 명분이 있지 않습니까?”
“허나… 성승께서 돌려보낸 자들입니다! 명분으로 삼기에는…….”
언중경의 말에 기겁한 서문경이 반대했다.
천사교 및 절강고수들을 되돌려 보낸 사람은 바로 성승이었다.
안휘성을 위협했다는 명분으로 천사교를 공격하는 것은 성승을 기만하는 행위가 된다.
성승과 소림이 불쾌하게 여길 수 있다는 뜻이다.
비록 맹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지만, 그래도 소림은 소림이었다.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행위였다.
“군사, 좀 더 들어보세나.”
“…예, 맹주님.”
언중경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막으려는 서문경과 달리 모용묵은 솔깃해 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언중경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천사존이 쓰러진 이상, 그들은 본맹을 막을 수단이 없습니다. 게다가 사망도제의 죽음으로 사해련 역시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맹주님께서는 사파무림을 무너트린 영웅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기회입니다!”
“…사파무림을 무너트린 영웅이란 말이지?”
입 꼬리가 올라가는 모용묵을 보며 서문경은 안절부절못했다.
천사교를 공격하는 것은 단순히 천사교 하나와의 싸움이 아니었다.
사파무림의 생존본능을 자극하는 일이 된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무는 법이었다.
사파무림은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들에 맞서 싸우게 될 수밖에 없었다.
즉, 정사대전이 개전된다는 뜻이었다.
물론 사망도제의 죽음으로 사해련이 예전 같지 않았다.
때문에 천사교만 무너진다면 사파무림을 상대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수월해질 수 있었다.
허나 그건 사파사세가 모두 건재할 때보다 수월하다는 것이지, 사파무림을 무너트리는 것이 쉽다는 뜻은 아니었다.
게다가 정기가 쇠한 것은 사파무림만이 아니었다.
태극검선과 신비무선 그리고 자하검제가 죽고, 백의무제가 쓰러졌다.
정사대전이 벌어지면 승리한다고 해도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언중경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무림맹주를 자극하는 그가 서문경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맹주님께서 결단을 내려주신다면 대회의를 추진…….”
“선봉은 진주언가가 서주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조금 전과 달리 표정이 차가워진 모용묵을 보며 언중경은 당황했다.
눈빛이 더 차가워진 모용묵이 나직하게 말했다.
“누군가……?”
“누…구냐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천사교를 치게 만들라고 지시를 내린 자가 누구인지를 묻는 것일세!”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가 감히 제게 지시를 내릴 수 있습니까! 본인은 언중경이오! 진주언가의 가주인!”
모용묵의 말에 당황한 나머지 언중경은 오히려 버럭 화를 냈다.
그 모습에 더욱 의심스러웠다.
허나 진주언가는 오대세가 대신 권력을 쥔 오대가문이었다.
그런 진주언가주인 언중경이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다는 것은 너무도 억지스러운 추측이었다.
“환마(幻魔).”
“……!!”
모용묵의 말에 언중경은 경악했다.
표정관리에 실패한 그를 보며 모용묵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변했다.
“그 표정을 보니… 맞나보군.”
“화, 환마가 누굽니까. 처음 들어본 별호인데…….”
우선 언중경은 발뺌을 했다.
허나 이미 확신한 모용묵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언중경은 너무도 확고한 모용묵의 눈빛에 식은땀이 났다.
“지금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수백 년 전, 혈교(血敎)라는 사교집단이 있었네. 허나 혈교는 일개 사교집단이라고 할 수가 없지. …마교의 부교주가 세운 집단이니 말이야.”
“…….”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모용묵을 보며 언중경은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한 채 듣기만 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서문경은 혈교란 말에 깜짝 놀랐다.
서문경의 가문인 서문세가도 나름 역사와 정통을 가진 명문세가였기에, 오래전에 사라진 혈교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마교 부교주였던 혈마는 권좌를 노렸으나 실패 후 탈교해서 혈교를 세웠네. 마교 부교주 시절부터 혈마를 따른 절세마두 중 한 명이 환마라더군.”
“혈교…는 이미 오래전에 마교의 손에 무너진 곳이 아닙니까?”
반역에 실패했다고 하지만 부교주였던 혈마를 따르는 마인이 많았다.
그렇기에 마교주는 그들이 탈교하는 것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세운 혈교가 차후 마교의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멸문시켰다.
혈마가 권좌를 노릴 때는 내부 권력쟁투이었지만, 탈교 후에는 입장이 다르다.
변절자의 처단이란 명분하에 은퇴한 원로까지 소집해서 혈교를 무림에서 지웠다.
마교의 원로들은 하나 같이 대단한 마두들이었다.
그들까지 나선 이상 혈교의 멸문은 예정된 일이었다.
“분명 혈교는 무너졌으나 생존자가 없을 리가 없지. 그리고 오랜 시간 부활을 꿈꾸고 있었겠지. …혁련세가. 그들이 환마의 후예가 아닌가.”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맹주님.”
더 이상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언중경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모용묵은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추궁을 하긴 했으나 끝까지 부정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모용세가와 함께 오대가문인 진주언가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마음이 착잡했다.
“자네 아들을 치료해주는 대가로 손을 잡았다는 것까지 알고 있네.”
“…….”
언중경이 혁련세가와 손을 잡은 이유는 바로 언유광 때문이다.
언중경은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 언유광과 제갈현지를 맺어줄 생각이었다.
허나 제갈세가에선 이를 거절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언중경이 아니었다.
석가장의 전대 장주인 석대환을 통해서 환락음양고를 구했다.
몸이 먼저 섞이면 그들로서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을 거란 계산이었다.
제갈현지는 진주언가의 계산대로 환락음양고의 음고를 복용했다.
하지만 이현성의 도움으로 그녀는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반면 언유광은 환락음양고의 양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해약을 복용하거나 음고의 주인과 음양합일을 이루지 못한 언유광은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환락음양고만 해도 지독한 고독이건만, 사실 그가 복용한 것은 열락음양고였다.
뒤늦게 해약을 복용했으나 이미 무인은커녕 사람 구실도 못할 정도로 망가진 후였다.
목숨이라도 건진 것은 다행이었지만, 진주언가의 대를 잇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석대환은 언유광의 치료를 대가로 진주언가를 엮을 수 있었다.
허나 그런 석대환도 이현성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때 나타난 자가 바로 혁련중광이었다.
“아들은 어떻게든 치료해주겠네. 그들과 손을 떼게.”
“광이 녀석이 문제가 아닙니다. 제게 걸린 금제는…….”
언유광이 진주언가의 대공자였지만, 최악의 경우 버릴 수도 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