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그만큼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때 적천우가 파안대소를 했다.
“하하하! 고맙소. 그리고 마옹께서 복용한 것은 마환단이오. 시험해서 미안하오.”
“아…! 이 늙은이, 끝까지 련주님, 아니, 가주님을 모시겠습니다!”
마환단(魔還丹)은 마도의 대환단이라고 불리는 영단으로, 마공이나 사술을 익힌 자들에게는 소림의 대환단 이상의 보물이었다.
마교의 몰락으로 더 이상 세상에 없는 보물이기도 했다.
적천우는 흑천마옹을 제어할 수 있는 수단으로 독약이 아닌 영단을 하사했다.
이는 몸이 아닌 마음에 족쇄를 채운 셈이었다.
그의 심계는 사망도제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적천우는 명목상 련주가 아닌 진정한 사해련주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혈천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십절무왕이 이끄는 무림맹 고수들이 드디어 사천의 성도에 도착했다.
* * *
“우리 사천무림을 위해서 먼 길을 오셨군요. 허나 사해련은 이미 도망쳤으니 굳이 오실 필요는 없으셨을 텐데…….”
“환영해주셔서 고맙네, 가주. 허나 본 맹주가 사천성도에 방문한 것은 사해련 때문이 아닐세.”
십절무왕과 암군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더 나아가서 무림맹과 사천당가, 사천무림 사이에도 긴장감이 맴돌았다.
비록 백호당과 멸사대가 도움을 주었으나 맹주를 위시한 맹 수뇌부가 도움을 준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사천무림은 무림맹에 그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현 무림맹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아닌 오대가문으로 권력구도가 바뀐 상황이었다.
따라서 사천무림 입장에서도 그들이 달갑지 않았다.
“그럼 왜 어려운 걸음을 아셨습니까, 맹주님.”
“그건 한가지 믿기 어려운 소문 때문일세.”
“믿기 어려운 소문이라… 뭔지 궁금하군요. 천하의 맹주님을 직접 거동하시게끔 한 소문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암군은 당당한 태도를 고수했다.
덕분에 그가 마공을 익혔다고 알고 있는 오대가문의 수뇌들은 오히려 당황했다.
허나 이곳까지 방문한 이상 그냥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대가 마공을 익히고 있다는 소문이 있네.”
“설마 맹주씩이나 되신 분이 그런 소문을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암군의 태도에 십절무왕은 조금 불쾌했으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먼저 화를 낸다는 것은 지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말하긴 미안하지만, 가주의 실력으로 청해마왕을 죽인 것을 믿을 수 없었소. 소문대로 마공을 익힌 것이 아니라면 말일세.”
“참 실례가 되는 말씀이군요. 맹주께서도 무림맹주가 되셨는데, 저는 청해마왕을 이길 수 없어야 합니까?”
당자성과 모용묵 사이에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듣다못해 신창양가의 가주 신창이 끼어들었다.
“어허…! 당 가주. 맹주님께 말이 좀 그렇군.”
“양 가주님, 본 가주는 지금 맹주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양 가주께서 끼어들 자리가 아닙니다.”
나름 중재하려던 신창은 암군의 말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까마득한 후배인 암군이 자신을 오히려 아랫사람처럼 대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허나 암군은 그런 신창의 변화에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맹주님께서도 힘드시겠습니다. 수하라는 자가 때도 가리지 않고 끼어드니 말입니다.”
“이놈!”
십절무왕을 무림맹주로 만들고, 실질적으로 맹을 이끌고 있는 신창으로서는 당자성의 건방진 태도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창을 휘둘렀다.
십절무왕은 암군의 말처럼 함부로 나선 신창이 아니 꼬았으나 제지하지는 않았다.
건방을 떠는 암군의 실력을 볼 생각이기 때문이다.
괜히 신창(神槍)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산동악가와 함께 중원창술의 자존심이라는 신창양가의 가주가 바로 그였다.
비록 화경에 오르지 못했기에 창왕이라 불리지는 못했으나 그의 실력은 진짜였다.
신창의 창이 무서운 기세로 암군을 노렸다.
허나 이 정도로 눈 하나 깜짝할 암군이 아니었다.
“헉! 미친!”
“그렇게 죽고 싶다면…….”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신창의 창날을 암군이 잡아버린 것이다.
공수탈백인(空手奪白刃).
맨손으로 칼날을 잡는 고도의 수법이었다.
실력 차이가 크다면 몰라도 근소하거나 고수를 상대로 공수탈백인의 수법을 펼치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그럼에도 당자성은 신창을 상대로 성공하고 말았다.
암군의 실력을 입증한 셈이었다.
“그만! 자네도 그만하게.”
“매, 맹주님 아직… 알겠습니다.”
빠드득……!
암군을 하수로 생각해서 전력을 다하지 않은 신창의 실수였다.
덕분에 망신만 당하고 말았다.
신창이 전력을 다했다면 암군이라도 앙천독강을 숨긴 채 이처럼 창날을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맹주 역시 계속 싸운다면 신창이 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역시 신창의 기를 꺾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직접 신창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기에 암군을 이용한 셈이었다.
“그럼 가주가 마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는가?”
“…저도 소문을 들은 것이 있습니다. 맹주님.”
“본 맹주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을 셈인가?”
“제가 들은 소문부터 들어주십시오. 그 후에 대답하겠습니다.”
십절무왕은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제 할 말을 하는 암군의 태도가 너무도 짜증스러웠다.
허나 주변의 눈도 있기에 짜증을 참았다.
그런 그를 보며 암군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말해보게. 그 소문이라는 것을…….”
“감사합니다. 맹주님. …수십 년 전, 중원무림은 큰 전쟁을 겪었지요. 모두 아실 겁니다. 바로 천마대전입니다. 당시 마교 수뇌인 십팔진마는 악마와 같은 힘으로 중원무림을 피로 물들이고 말았지요.”
암군이 예상치 못한 중원무림의 치욕을 건드리니 다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중에는 당시 참전했던 이들도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암군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당시 유마(幽魔)를 죽인 대단한 무림세가가 있었지요.”
“…본가를 언급하는 이유가 뭔가?”
마교 십팔진마인 유마를 죽인 가문이 바로 십절무왕의 가문인 모용세가였다.
당시 후기지수였던 십절무왕 역시 참전했다.
모용세가는 유마를 죽일 수 있었으나 그 대가로 수많은 고수를 잃었다.
그중에는 당시 가주였던 십절무왕 모용묵의 부친도 있었다.
십팔진마인 유마를 죽인 영광스러운 가문이 되었음에도 실질적으로는 남은 것이 없었다.
실질적인 권력은 오대세가와 중원문파들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변방인 요녕에 위치했고, 한족이 아닌 선비족의 후예라는 이유로 유마를 죽인 모용세가는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게 모용묵의 한이자 모용세가의 한이었다.
“유마를 죽였음에도 중원무림은 모용세가의 공을 크게 인정하지 않았지요. …물론 본가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죄송합니다.”
“이미 지난 일일세.”
십절무왕은 암군이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위해 자신에게 잘 보이려 한다고 생각했다.
허나 암군이 노리는 바는 이게 아니었다.
“당시 가주셨던 비천검성 님을 위시한 많은 고수들께서 돌아가시면서 모용세가는 많은 비전을 잃었다고 들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그럼에도 맹주님께서 화경에 오른 이유가… 유마의 구유마공(九幽魔功) 때문이란 소문… 큭!”
“…죽고 싶나.”
암군의 말에 십절무왕은 분노를 숨기지 않고 무형지기를 발산했다.
화경고수의 무형지기가 얼마나 강력한지 십절무왕의 곁에 있는 자들까지 휘청거릴 정도였다.
직접적으로 무형지기에 노출된 암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에도 암군은 굳건히 두 다리로 서 있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허나 저 역시… 같은 마음입니다. …제가 마공을 익혔다니요. 헉… 헉…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십절무왕은 분노했으나 무형지기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암군이 자신을 모욕했으나 어찌 보면 그건 자신이 먼저였다는 뜻이었다.
결국 십절무왕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 더 이상 추궁할 명분은 없었다.
암군은 도박을 성공한 셈이었다.
‘빌어먹을!’
사천당가주가 마공을 익혔다는 혐의는 분명 큰 문제였다.
그러나 무려 무림맹주가 마공을 익혔다는 혐의보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도 유마의 구유마공이 거론되었다.
사천당가주와 마찬가지로 무림맹주 역시 증거는 없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 추궁할 수가 없었다.
사천당가주의 의심도 의심이었지만, 무림맹주를 향한 의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무려 무림맹주이며 구유마공은 십팔진마의 마공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개자식… 언젠가 반드시 죽여주마!’
무림의 살아 있는 전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 )…….”
범천대사는 소림 장문인으로서 바쁜 와중에도 불자로서 하루의 시작과 끝을 불경의 참오로 했다.
그의 스승인 공심대사가 생전에 그랬듯이.
불경의 참오를 마무리하고 잠자리를 준비하려고 할 때 범천대사는 느닷없이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사조님. 말씀하셨으면 소승이 찾아뵈었을 터인데…….”
“허허… 우리 장문인께서 날로 불심이 깊어지시는구려.”
범천대사는 문이 열리기 전에 이미 누군가의 기척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기척의 주인공이 사조인 료굉대사라는 사실까지 눈치챘다.
실제로 문이 열리고 료굉대사가 들어왔다.
료굉대사의 말처럼 범천대사의 불심은 날로 깊어지고 있었다.
허나 범천대사가 그의 기척을 느낀 것은 일부러 료굉대사가 기척을 드러내서였다.
백보신권(百步神拳)이라고 불리는 범천대사였지만, 이미 자연과 조화를 이룬 료굉대사의 기척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늦은 밤에 미안하네, 장문인.”
“아닙니다. 사조님. 하교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새겨듣겠습니다.”
아무리 범천대사가 소림 장문인이라도 료굉대사는 소림의 전전대 장문인이자 그의 사조이었다.
무림의 살아 있는 전설인 성승께서 이 늦은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것으로 보아 보통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기에 범천대사는 긴장이 되었다.
그런 그를 보며 료굉대사는 자비스러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아무래도 소림을 떠나야 할 것 같네. 장문인.”
“…사대금강을 준비시키겠습니다.”
료굉대사는 자신의 사손이자 장문인인 범천대사의 배려를 거절했다.
“아닐세. 그러지 말게. 이 늙은 중이 장문인을 찾아온 까닭은 소림의 제자로서 장문인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기 위함일세.”
“마지막…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조님!”
범천대사는 흥분해서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뒤늦게 이를 깨닫고 고개를 푹 숙였다.
“소승이… 사조님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사조님.”
“아닐세. 뭐가 무례고 뭐가 용서란 말인가. 그런 말 하지 말게. 장문인.”
범천대사의 행동은 어찌 보면 기사멸조(欺師滅祖)의 죄를 범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허나 료굉대사는 고개 숙인 범천대사를 꾸짖지 않고 오히려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리곤 슬픈 눈으로 위를 바라봤다.
그의 눈이 향한 곳은 방장실의 천장이었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천기였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