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제갈현지는 뛸 듯이 기뻤다.
사랑하는 임의 아이를 갖게 되었으므로 기쁜 것이 당연하였다.
허나 임신 사실을 이현성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큰일을 하기 위해서 떠난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로 인해 이현성은 첫째 아들이 태어나는 순간의 행복을 만끽하지도 못했다.
“…그게… 정말이오!”
“오! 장주! 오셨소이까!”
누군가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가장에 날아왔다.
경공술 최고의 경지 중 하나인 육지비행(陸地飛行)을 펼친 채로.
육지비행을 펼칠 수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은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검신 이현성이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는 현 무림 최고수 중 한 명이었다.
“부인은 어떤가, 부각주.”
“한 소저께서 무사하시다고 하셨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주님.”
“부인을 보고 싶은데, 들어가도 되겠나.”
문교교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갈현지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그렇기에 이가장 일행들을 두고 육지비행을 펼치면서까지 먼저 달려온 것이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방의 문이 열렸다.
“장주님. 들어오셔도 됩니다.”
“아… 고맙소. 한 소저.”
출산과 제갈현지의 건강을 확인 중인 한은설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현성은 그제야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는 아기를 조심스럽게 안고 있는 시비와 기진맥진한 채 쓰러져 있는 제갈현지가 있었다.
이현성은 아기보다 제갈현지에게 먼저 다가갔다.
“미안하오, 곁에 있어야 했는데… 왜 진즉에 연락하지 않았소. 그랬다면 조금 더 서둘렀을 것을…….”
“아…니예요. 아녀자의… 일로 사내의 앞길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
문교교는 진즉에 이현성에게 제갈현지의 임신 사실을 알리려고 했으나 그가 사해련과 싸우기 위해 섬서로 떠난다고 하니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섬서까지 동행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야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현성은 뛸 듯이 기뻐했다.
다행히 출산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충분히 제갈현지의 출산 전에 도착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열흘이나 일찍 진통이 오면서 결국 아기가 나오는 순간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어찌… 어찌 방해란 말이오. 부인. 나는 남편으로서도, 아비로서도 실격이라오.”
“아니…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이현성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기진맥진한 제갈현지는 조금 답답했으나 그의 품이 싫지는 않았다.
그의 품에 한참 안겨 있던 제갈현지가 나직하게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 이제 우리… 아기를 봐주세요.”
“알겠소, 부인.”
제갈현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이현성은 그제야 시비의 품에 안겨 있는 갓난아기를 건네받았다.
갓난아기를 안아본 적이 없기에 이현성의 자세는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따뜻한 갓난아기, 아니, 자신의 아들을 보며 이현성은 알 수 없는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은 결코 불쾌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기쁨이었다.
자신의 아들에게 정신을 빼앗긴 그를 보며 제갈현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우리…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아…! 그렇지.”
제갈현지의 말에 이현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심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은 천악, 이천악이다!”
이현성은 첫째 아들의 이름을 이천악으로 지었다.
아무도 모르지만, 천악은 살수천자의 본명이었다.
세상에 잊혀진 또 다른 제왕.
이현성은 아들이 세상의 권력을 탐하지는 않지만, 누구보다 자유스러운 제왕이 되길 바랐다.
그렇게 검신의 후계자 이천악이 세상에 태어났다.
이가장에 경사로운 일이 벌어졌을 때, 사파사세는 혼란을 겪고 있었다.
흉마
“젠장! 등신 같은 놈! 왜 하필 지금 죽고 지랄이야!”
독왕의 이탈로 흔들리고 있는 지옥성을 안정화시키고 있던 지옥대제는 분노했다.
사망도제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사파사세의 주인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지옥대제는 사망도제와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망도제의 죽음에 분노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개같은 놈! 그렇게 뒈질 거라면 그딴 제안이라도 하지나 말 것이지!”
출사표를 던진 직후 사망도제는 지옥대제에게 은밀한 제안을 했다.
운남무림을 압박해줄 테니, 남만을 정벌하라는 제안이었다.
사망도제의 제안에 지옥대제는 솔깃했다.
마음 같아서는 독왕을 찢어죽이고 싶었으나 운남무림을 등에 두고 남만을 공격하는 것은 위험했기에 지금까지 참고 있었다.
예전과 달리 운남무림에도 화경고수가 탄생해서였다.
독왕이나 관일창왕 한 명씩이라면 지옥대제가 능히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라도 화경고수 둘을 동시에 감당하는 것은 버거웠다.
그렇기에 속만 끓이는 상황이었는데, 사망도제가 가려운 부분을 긁어준다니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사해련 사천정벌군은 사천정벌 후 운남무림을 압박할 예정이었는데, 이를 눈치챘는지 운남고수들이 아미산에 나타나면서 일이 어긋났다.
남만정벌을 준비하던 지옥대제로서는 짜증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검신 놈…! 감히 번번이 날 방해해!”
사망도제의 죽음이 검신의 소행은 아닐지라도 영향을 준것은 사실이었다.
그것과 상관없이 지옥대제의 시선에선 검신이 번번이 자신을 방해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검신에 대한 증오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때 지옥대제가 날이 선 목소리가 말했다.
“건방진 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멋대로 들어오느냐!”
“큭!”
지옥대제의 손에 누군가의 목이 잡혀 있었다.
비록 위세가 줄긴 했으나 지옥성은 여전히 사파사세였고, 지옥대제는 오제의 일인이었다.
쥐새끼 하나 놓칠 거인이 아니었다.
제압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지 지옥대제의 손에 붙잡힌 복면인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흥미가 생겼는지 지옥대제는 복면인을 집어던졌다.
복면인도 보통이 아닌지 허둥거리지 않고 지옥대제의 앞에 섰다.
허나 그뿐이었다.
지옥대제를 위협할 수 있는 자는 아니었다.
“손속에 사정을 두셔서 감사합니다. 성주님.”
“아직 널 살려둔다고 결정한 것은 아니니, 너무 고마워하지 말거라. 네 정체와 용무를 밝혀라. 내 마음에 들면 살려줄 수도 있으니까…….”
지옥대제의 협박에도 복면인은 그 어떤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가소로웠는지 지옥대제는 복면인을 다시 제압하려고 무형지기를 끌어올렸다.
허나 지옥대제는 무형지기로 복면인을 제압하지는 않았다.
“혈궁에서 왔습니다. …주군께서 대제님이 함께하시길 원하십니다.”
“혈…궁? 중원에 그런 집단이 있던가?”
혈궁이란 집단은 듣도 보도 못했으나 지옥대제는 그리 감이 없는 자가 아니었다.
특히 자신의 입장에서는 별거 아니지만, 눈앞의 복면인도 상당한 고수였다.
지옥성에서도 흔치 않은 초절정고수였기 때문이다.
그런 복면인을 일개 밀사로 보냈다는 것은 만만한 집단은 아니란 뜻이었다.
그렇기에 지옥대제는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았다.
“…혈천이란 집단은 들어보셨습니까?”
* * *
“꺄!”
“커억!!”
갑작스러운 괴한들로 인해 수많은 여인들이 죽어갔다.
풍류를 즐기러 온 이들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고얀 놈들! 귀한 분들이 계신 자리다! 당장 꺼지지…컥!”
“귀한 모가지 베기 전에 찌그러져 있어라.”
호위무사는 살육을 저질러버린 괴한들에게 호통을 쳤으나 그 대가로 목이 떨어졌다.
이곳은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그런 주루가 아니었다.
최고의 명주와 뛰어난 기녀들이 즐비한 만큼 그 값이 상당했다.
그 때문에 이름난 부호나 고관 등 어깨에 힘 좀 준다는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런 자들의 안위를 책임지는 호위무사들이 약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괴한의 일검을 막지 못하고 목이 떨어졌다.
이런 압도적인 실력에 경거망동하는 자들은 없었다.
어설프게 나섰다가 목숨을 잃는다면 자신만 손해였다.
허나 주루의 입장은 다르다.
이런 식으로 신용을 잃는다면 더 이상 장사를 할 수 없었다.
“놈! 여기가 어디… 소, 소교주님께서 여긴… 꺄!”
“루주는 어디에 있지?”
“루, 루주님께선 여기 안 계… 컥!”
“루주가 없다는 개소리하면 모두 죽는다.”
살육을 자행하는 자는 바로 천사교의 소교주 사마염이었다.
그런 그가 뒤집어놓은 곳은 사파무림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거대한 집단인 환희루였다.
환희루 고수들은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움직였으나 괴한의 정체를 깨닫고는 쩔쩔맸다.
환희루주인 환희요후는 천사교 오대교령이기도 했다.
즉, 소교주는 그들의 직속상관은 아닐지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내 말이 하찮단 말이지? 사도(死刀), 괴검(怪劍).”
“예. 소교주님. 하명하십시오.”
사마염은 홀로 환희루에 쳐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동한 고수의 수도 고작 셋에 불과했다.
천사교에 고개를 숙였다고 해도 환희루는 사파무림에서 손꼽히는 집단이었다.
고작 넷이서 어쩔 수 있는 집단이 아니었다.
전대 거두인 음양쌍파와 환희팔선자. 살법을 포함한 여러 기예를 익힌 기녀들이 있었다.
따라서 주제를 모르고 날뛰다가는 골로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환희루였다.
아무리 사마염이 천사교 소교주라 해도 셋만 대동한 것은 무모하였다.
그걸 모르는지 사마염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루주가 나올 때까지… 죽여.”
“소, 소교주님. 루주께서… 컥!”
“사, 살려… 으아악!
사마염에게 손을 댈 수 없기에 환희교 고수들은 다급하게 그를 불렀으나 그때는 이미 괴검과 사도가 그녀들을 베기 시작한 후였다.
다시 시작한 살육에 그녀들은 살기 위해서 저항했다.
푹! 서걱!
허나 저항은 무의미했다.
괴검과 사도는 평범한 호위무사가 아니었다.
천사교 오대교령 다음으로 강한 호교사자들. 그리고 그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들이었다.
환희교의 고수들이 감당할 수 없었다.
서른쯤 죽었을 때, 무시무시한 살기가 괴검과 사도를 압박했다.
“큭!”
“물러나도 좋다.”
초절정지경에 오른 괴검과 사도를 살기만으로 압박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특히 환희루에서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그들의 앞에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매혹적인 노부인이 음험한 노파 둘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노부인은 섬뜩한 살기를 거두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이오, 소교주… 본녀를 이해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리 소교주라도 본루를 걸어서 나갈 수 없을 게요.”
“하하하! 역시 계셨구려. 그러게 왜 다들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노부인의 정체는 환희루주인 환희요후.
사파무림의 거두로, 호교사자인 괴검과 사도는 물론 소교주인 사마염이라도 감당할 수 없는 절세고수였다.
그런 환희요후가 눈이 뒤집어진 상황이었다.
아직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지는 않았으나 당장이라도 사마염을 찢어죽일 기세였다.
그럼에도 무슨 배짱인지 사마염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런 사마염의 태도에 환희요후는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칠 것 같았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