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그러므로 추공처럼 대장로나 대호법이 손을 쓰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흑천마옹과 진뢰궁귀가 적천우를 따른다면 오히려 꿍꿍이를 의심해야 할 판이었다.
“대주님의 신임 련주 추대는 본천의 결정사항입니다. 봉공들께서도 딴생각은 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대군사께서 대주님을 지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
적천우는 상당히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낙관적으로만 생각하기에는 상황이 매우 불리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임 련주 자리를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자신을 믿고 남아준 이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새로운 권력을 쥐어야 했다.
‘대군사… 당신의 본심이 뭔지 궁금하군.’
적천우가 문인주희에게 회의적인 태도를 보여준 것은 그녀에 대한 시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인주희의 뒤에 있는 대군사 문인윤걸의 본심도.
상황이 달라진 만큼 사람들에 대해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었다.
내 편과 적 그리고 중립을 지킬 자를 구분하는 것.
‘너무 좋아하지 마라, 혁련휘.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니까.’
* * *
“젠장. 어쩌란 거야.”
사해련으로 회군 중인 흑천마옹은 골치가 아파왔다.
사망도제의 죽음은 그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현 사해련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자는 바로 흑천마옹이었다.
무리한다면 사해련주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결코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흑천마옹은 그런 욕심을 부릴 수 없었다.
사해련의 뒤에 혈천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혈천 상부에서는 진뢰궁귀와 함께 적천우를 신임 련주로 옹립하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상당한 잡음이 있겠지만, 자신들이 나선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여기까지라면 그가 이렇게 골치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부천주는 압도적으로 강했으니 고민거리도 안 됐는데… 대호법의 손을 잡는 게 과연 옳을까.”
적천우의 예상대로 흑천마옹과 진뢰궁귀에게 대호법과 대장로가 손을 뻗었다.
결국 사해련 신임 련주는 적천우로 결정되어서였다.
대장로와 대호법으로서는 적천우를 지지한 대군사가 찢어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으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대장로로서는 대호법에게 사해련을 빼앗기는 최악의 경우는 피해야 했다.
물론 대호법 역시 대장로보다는 적천우에게 사해련을 넘기는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대장로는 진뢰궁귀를, 대호법은 흑천마옹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건천각주 자리가 탐이 나긴 하는데…….”
현재 건천각주는 여전히 천패 구황이었다.
허나 그는 죽지만 않았을 뿐, 더 이상 무공을 펼칠 수 없는 폐인이 되었다.
그렇기에 건천각주의 직위를 유지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
대호법 혁련중광은 그 건천각주 자리를 조건으로 내걸어 흑천마옹을 유혹하고 있었다.
팔각 내에 공식적인 서열은 없으나 은연중에 건천각을 첫째로 보고 있었다.
건천각이 팔각 중 가장 강하기 때문이었다.
혈천의 일개 호법 때보다 훨씬 더 큰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사해련주란 자리를 욕심낼 수 없다면 건천각주 정도는 가져야 그도 남는 장사였다.
그럼에도 쉽게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대호법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대장로와 적이 된다는 의미였다.
현재 대장로와 대호법의 힘은 백중지세다.
아직은 대장로가 세력면에서 미세하게 우세하지만, 충분히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즉,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지는 알 수 없는 상황.
동아줄인 줄 알고 잡았다가 썩은 동아줄이라면 끝이었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애초 내게 선택권이 있었던가.”
흑천마옹은 결단을 내렸다. 누군가의 편에 설지를.
그렇게 사망도제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듯 보였다.
허나 사망도제의 그림자가 생각보다 짙다는 것은 그들도 예상치 못했다.
청해성에 먹구름이 끼고 있을 때, 소림에서는 공심대사의 다비식이 진행되었다.
* * *
“이 불은 삼독의 불이 아니라 여래일등삼매(如來一燈三昧)의 불이니…….”
거화편을 읊으며 노승이 화장장에 불을 붙였다.
화장장이 활활 타오르자 모든 승려들이 법경을 읊기 시작했다.
공심대사의 다비식은 무척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떠들썩하게 진행하기에는 좋지 않은 일이었다.
따로 초대하지 않았음에도 소림을 찾아온 자가 있었다.
“허… 대사님께서 그리 가실 줄이야.”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홍 시주님.”
“공심대사님의 다비식인데 어찌 모른 척할 수가 있겠소. 공벽대사님.”
“아미타불…….”
소림을 찾은 손님은 개방의 태상호법인 장왕 홍무개였다.
소림과 개방은 같은 하남에 터를 잡고 있는 만큼 오랫동안 교류를 해왔다.
공심대사와 홍무개는 연배나 배분 등 그 위치가 비슷하기에 적지 않은 교분을 나누었다.
이현성이 운남으로 떠나기 전, 소림에 방문했을 때도 홍무개가 와 있을 정도였다.
공심대사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사제인 공벽대사 역시 홍무개와 연이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소림원로인 그가 직접 홍무개를 맞이하고 있었다.
“화가 놈 때문에 화산에 가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따라갔어야 했는데…….”
공심대사만큼은 아니지만 홍무개 역시 자하검제 화월천과 친분이 있었다.
허나 무림 정세가 심상치 않다 보니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런 사달이 났으니 홍무개는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그래도 검신 이 시주께서 사해련주를 무찔러주셨으니 대사형께서도 만족하실 겁니다.”
“그가 조금만 더 빨리 도착했다면 좋았을 것을…….”
홍무개는 딱히 이현성을 탓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일부러 늦은 것도 아니고, 공심대사가 그랬듯이 검신 역시 선의로 섬서로 간 것이다.
그때 한 중년승이 다가와 그들을 향해 합장을 했다.
“범양아. 무슨 일이더냐?”
“사부님. 이가장의 장주 부인이신 문 부인께서 본사에 방문하셨습니다.”
“검신의? 으음… 장문인께선 뭐라고 하시더냐?”
범양은 소림의 장로이자 공벽대사의 제자였다.
제자의 말에 공벽대사는 장문인의 의중을 되물었다.
공벽대사가 아무리 소림의 원로라도 현 소림을 이끄는 것은 장문인이기 때문이다.
“장문 사형께서 본사를 찾아오신 객을 물리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장문인의 뜻이 그렇다면… 모시게나.”
“예. 사부님.”
소림은 여인의 방문을 거부했다.
그렇기에 분향객의 경우도 소림 본산이 아닌 지정된 사찰까지만 허용했다.
예외라고 해봤자 아미파의 비구니 정도였다.
비구니는 여인이 아닌 불제자였기에 약간의 관용을 베푼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원칙적으로 문교교의 방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길고 긴 소림의 역사 중에 이런 예외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예외 역시 황실의 황후 혹은 황녀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허나 그 외의 속세 여인의 방문은 처음으로 허용된 일이었다.
잠시 후 이남일녀가 산문을 넘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사님. 이가장의 문교교라고 합니다.”
“아미타불… 공벽이라고 합니다. 본사에는 어인 일로 방문해주셨습니까?”
“공심대사님의 일을 듣게 되어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부군이신 장주께서 직접 인사를 드리고 싶었으나 장원에 급한 일이 생겨서… 소녀가 대신 오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습니까, 여시주님.”
낙양을 지나던 이현성은 공심대사의 다비식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가장 일행은 장원에 복귀하기 전에 잠시 소림에 들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현성은 장원에서 급보를 전해 받아 소림에 방문할 수가 없었다.
“이가장의 호법인 구연청이 금강신승 공벽대사님과 장왕 홍무개 노사님을 뵙습니다.”
“이가장의 객, 한승이…….”
예외적으로 문교교의 방문을 허용했으나 독고혜와 야래향까지 동행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가장 고수들과 함께 산문 아래에서 대기했고 문교교의 호위는 구연청과 한승이 대신 맡았다.
그런 그들을 보며 홍무개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가장이야말로 용담호굴이라고 듣긴 했는데, 역시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노사님.”
홍무개는 개방의 태상호법이었다.
이가장의 저력이 이미 무림세가를 넘어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가장의 호법인 적양신장 구연청과 객인 천검 한승을 보고 그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렇게 그들이 이가장을 대표해서 공심대사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을 때, 이가장은 발칵 뒤집어졌다.
* * *
“아직, 아직 오시지 않으셨는가!”
“죄송합니다. 귀혼을 보냈으나…….”
귀림의 대장로였으나 이가장에 귀속된 후 이가장의 장로가 된 귀백의 다그침에 귀령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의 잘못이 아님을 알지만, 귀백은 속이 타들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 이가장은 큰일을 치르고 있었다.
“장주께서 빨리 오셔야 하거늘…….”
“서두르지 않고 뭐 하는지 모르겠소.”
이가장의 가장 웃어른인 귀백과 규염은 안절부절못했다.
장강어옹 규염은 몰라도 평소 냉정하게 보일 정도로 침착한 귀백까지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이가장에는 큰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아~아~악!!”
“이런! 시작되었구나!”
여인의 비명 소리에 규염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귀백은 규염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 마음이 다급해졌다.
여인의 비명과 신음 소리가 이어질수록 두 사람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시진이 지나고 있었다.
불안감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찰싹! 찰싹!
“으~응애! 으~응애! 응~앵!”
“아… 태어나셨구나.”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울음소리만으로도 아기가 얼마나 건강한지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한 중년 여인이 밖으로 나왔다.
“벽 부각주! 지아, 아니, 제갈 부인은 어떤가!”
“공자님인가, 아가씨인가!”
두 노인의 물음에 풍운각 부각주인 귀매 벽하연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장주를 빼다 박은 멋진 공자님이에요. 그리고 지치긴 하셨으나 주모께서도 무사하십니다!”
“하하하! 드디어 소장주께서 태어나신 것이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우렁찬 울음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이현성과 제갈현지의 아기였다.
아직 후계가 없었던 이현성과 이가장에 소장주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천웅방주와의 격전에서 이현성이 쓰러진 소식을 듣고도 제갈현지는 문교교만 대신 보냈을 뿐, 정작 그녀는 장원에 남았다.
장주인 이현성이 부재중인 상황에서 장주 부인 둘 모두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이유도 있었으나, 제갈현지가 남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임신을 해서였다.
백의무제의 부탁을 받고 이현성이 장원을 떠났을 때만해도 제갈현지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문교교와 제갈현지가 장주 대리로서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중 제갈현지는 평소와 달리 몸이 빨리 지치는 것을 느끼고 불안한 마음에 한은설에게 진맥을 받았다.
한은설은 축하의 말과 함께 임신 사실을 알려주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