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하지만 무림맹의 총군사인 서문경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암군이 진짜 마공을 익혔다고 한들, 이를 입증할 증거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어설프게 압박하다가는 오히려 역풍만 맞을 가능성이 있었다.
자신들은 사파가 아니었다.
아무리 힘이 우선 되는 무림이라도 명분이 없다면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지는 해일지라도 오대세가는 오대세가였다.
그들의 저력을 얕보는 것은 정말 위험하였다.
서문경은 증거도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맹주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서문경은 제갈윤호가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에는 힘이 없었다.
“사천에 나가 있는 백호당을 맹으로 복귀시키게. 본 맹주가 직접 당가주를 만나보지.”
“존…명.”
결국 십절무왕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맹주인 그의 입에서 결정이 나온 상황이었기에 서문경도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아무리 예감이 좋지 않다고 해도.
십절무왕은 사해련의 일은 아깝지만, 대신 자신의 존재감을 알릴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허나 당자성도 그리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 * *
“역시… 눈치챈 건가.”
당자성은 청해마왕을 상대로 앙천독강을 펼쳤을 때부터 최악의 경우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앙천독강을 끝까지 숨길 수가 없었다.
청해마왕은 앙천독강의 도움 없이 죽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당자성은 청해마왕을 제거한 후 서둘러 앙천독강의 흔적을 지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완벽하지 못했는지 꼬리를 밟히고 말았다.
무림맹주가 직접 사천으로 오고 있음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조금 더 빨리 정리했어야 했거늘…….”
사천당가는 성도에 암행 중인 무림맹 첩자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놔둔 것은 어설프게 손을 쓰면 오히려 의심만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무림맹의 첩자들이 자신이 마공을 익힌 사실을 알아차리고 만 것이다.
당자성과 사천당가로서는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당자성은 절망하지 않았다.
앙천독강을 익히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막강한 앙천독강의 힘에 취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독마의 마공을 익히기로 결심한 순간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눈치챈 것은 아쉽지만, 증거가 없으니 무림맹주라도 뭘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첩자를 심어둔 게 무림맹만은 아니었다.
당자성 역시 당가와 연관이 없는 무림맹의 고수를 포섭했다.
직위가 그리 높은 자가 아니었기에 중요한 기밀을 빼올 수는 없었으나 맹주의 동태나 무림맹의 움직임쯤은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다.
덕분에 당자성은 섬서에서 허탕을 친 무림맹주가 본맹으로 복귀가 아닌 사천행을 결정한 사실을 빠르게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맹에서 자신이 마공을 익혔다는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무림맹에 심어둔 포섭자를 통해서 알게 된 정보가 아니었다.
첩자 중에도 포섭자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모든 첩자를 포섭한 건 아니었기에 정보를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으니… 대비는 해둬야겠지.”
아무리 증거가 없더라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일을 그르치는 법.
당자성은 오만한 자였지만, 결코 미련한 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당자성은 만약을 대비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안정되지 않은 사천무림에 또다시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허나 그런 먹구름은 사천에만 밀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 * *
“주군… 맹광이… 죄송합니다.”
사해련주라는 구심점이 사라진 후 서안을 침범했던 사해련 고수들은 각자 도생하기 위해서 뿔뿔이 흩어졌다.
검신의 자비로 추격은 없었으나 분노에 찬 섬서무림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에 그들은 정신없이 도주했다.
적천우의 혈룡대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적천우는 조부인 사해련주의 사망소식을 야차도귀가 보낸 고수에게 전해 받고서야 알게 되었다.
사해련주의 죽음은 숨긴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혈룡대 내에도 은연중에 그의 죽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으음… 그런가. 그게 어찌 자네가 죄송할 일인가.”
“…죄송합니다.”
맹광은 그를 따르는 4인의 조장 중 한 명이었다.
조부의 사망소식에도 의연한 태도를 보였던 적천우였지만, 지금만큼은 씁쓸함을 숨길 수 없었다.
혈룡대는 혈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혈룡대 구성원 상당수가 혈천십삼세, 오당팔각 등 혈천 수뇌들과 연관이 되어 있었다.
그런 혈룡대의 4할이 적천우를 따른다.
이는 적천우의 인망과 매력에 의한 것이지만, 오로지 적천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뒤에 있는 부천주를 의식한 점 역시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런데 적천우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던 부천주의 죽음은 혈룡대 내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결국 우려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적천우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자들 중 이탈자가 나왔다.
그렇게 이탈한 자들은 안타깝게도 부대주인 혁련휘의 휘하로 들어갔다.
부천주의 죽음으로 끈 떨어진 신세가 된 적천우보다는 이제 새로운 권력의 중심이 된 대호법의 손자인 혁련휘에게 붙는 것이 득이라 판단한 것이다.
일개 대원들의 이탈도 적천우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데, 무려 조장인 맹광의 이탈은 그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맹광으로 끝이 아니었다.
“설마… 자네도?”
“…죄송합니다.”
서걱!
놀란 적천우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던 사내는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의 왼팔을 베었다.
벤 부위의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의 고통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적천우는 급히 사내의 어깨의 혈을 눌러서 지혈해주었다.
허나 사내는 여전히 적천우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큭! …주군을 끝까지… 끝까지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건 진심입니다. …죄송합니다.”
“…자네의 뜻…을 존중하네. 추공…….”
말은 그렇게 했으나 적천우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같은 조장이라도 맹광과 추공은 전혀 다르다.
호탕하지만 멀리 볼 줄 몰라서 적천우에게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맹광과 달리 추공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실수 없이 해내서 적천우가 왼팔로 생각하는 자였다.
그렇기에 맹광의 이탈은 씁쓸한 걸로 끝이었지만, 추공의 이탈은 달랐다.
적천우는 자신의 팔을 잃은 듯한 고통을 느꼈다.
허나 추공의 이탈이 자의가 아님을 모르지 않았기에 막을 수도 없었다.
‘젠장, 부정(父情)인가.’
추공은 혈옥의 부옥주인 추성의 아들이었다.
부옥주인 추성은 원래 같은 오당인 추살당의 부당주였다.
추살당의 임무는 배신자의 추살 및 뒤처리였다.
그리고 혈살객 양성에도 지원되었다.
그가 부당주였던 당시 한천마녀의 방해로 혈살객 후보의 가족을 제거하는 임무를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추성은 이를 은폐했다.
어린아이를 놓친 것보다 한천마녀와 얽힌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혈천은 만만한 조직이 아니었다.
결국은 은폐한 사실이 들통 나고 말았다.
그로 인해 하루아침에 추살당 부당주에서 혈옥의 수인 신분이 되었다.
하지만 추성은 혈옥의 수인이 아닌 부옥주였다.
추성도 추성이지만, 그의 아들 추공 또한 뛰어난 인재였다.
부천주는 추공을 적천우의 심복으로 만들기 위해서 추성에게 기회를 준 셈이었다.
물론 좌천지와 같은 혈옥에 배속된 것만으로도 그의 출세는 막혔지만.
부천주의 의도대로 추공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 적천우의 왼팔이 되었다.
대호법은 추성의 출세를 대가로 추공의 변심을 요구했다.
마음이 흔들리기는 했으나 쉽게 변심할 자라면 대호법이 탐을 낼 필요도 없었다.
허나 부천주의 죽음으로 추공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고, 결국 주인을 바꾸게 되었다.
“…자네들도 원한다면 떠나도 좋다.”
“…죽는 날까지 따르겠습니다.”
“밥맛없는 혁련 부대주를 따르느니 차라리 혈룡대를 나가겠습니다. 대주님.”
둘이 떠났고, 둘이 남게 되었다.
허수아비 대주는 면했으나 적천우의 영향력은 급격하게 줄게 되었다.
그에 비해 혁련휘의 영향력은 막강하게 되었다.
또 다른 부대주인 문인주희가 적천우에게 힘을 실어주지 못한다면 혈룡대는 혁련휘에게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추 조장도 떠났군요. 대주님.”
“부대주, 오셨소.”
총명한 문인세가의 혈육답게 문인주희는 바닥을 적신 피와 팔이 누구의 것인지 바로 눈치챘다.
추공의 사정은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적천우를 찾아온 것은 다른 용무 때문이었다.
“대군사님의 연락을 받았는데…….”
“날 끝까지 믿고 남아준 이 친구들에게 숨길 일은 없소. 부대주.”
큰일을 겪어서인지 적천우는 특유의 유들거림이 사라져 있었다.
아니, 애초 이 모습이야말로 적천우의 진면목이었다.
문인주희는 두 조장이 있는 자리에서 조부의 전갈을 말해도 될지 고민했으나 적천우의 뜻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대군사님께서 사해련 신임 련주로 대주님을 추천하셨다고 합니다. 사해련이 흔들리기 전에 장악하라는 지시입니다.”
“…대군사께서 말이오? 부대주.”
“예. 대주님.”
조부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다 가시기도 전에 적천우는 새로운 지시를 받게 되었다.
사해련의 신임 련주.
무척이나 탐이 나는 제안이었다.
조부의 죽음을 잠시 잊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허나 적천우는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되물었다.
“내가 아무리 조부님의 손자라고 해도 사해련 내에는 큰 힘이 없는데 가능하겠소?”
“두 분 봉공께서 지지해주신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청해마왕과 음풍귀조의 죽음으로 이제 봉공은 단둘만 남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흑천마옹과 진뢰궁귀는 사해련 안에서도 직위나 무위가 가장 높았다.
그런 만큼 두 사람의 입김은 더욱 강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흑천마옹과 진뢰궁귀가 적천우를 지지해주고, 혈천이 뒷공작만 해준다면 그를 충분히 사해련주로 만들어줄 수 있었다.
허나 문제는 그들이 과연 자신을 지지해주냐는 점이었다.
“조부님께서 돌아가신 지금, 그들이 날 지지하겠소? …이제 입장이 많이 달렸는데 말이오.”
“그건…….”
적천우의 날카로운 지적에 문인주희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왼팔인 추공조차 적천우의 곁을 떠난 상황이었다.
하물며 흑천마옹과 진뢰궁귀가 그를 지지할 거란 보장이 없었다.
그들이 사망도제를 따랐다고 하지만 그건 그가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죽은 사망도제의 손자인 적천우를 따를 이유가 없었다.
사망도제에 대한 충심?
애초 그들이 사망도제를 따른 이유는 그의 가공할 힘에 굴복했기 때문이며, 그에 따른 막대한 보상 때문이었다.
허나 적천우는 사망도제가 아니었다.
적천우는 아직 그들을 굴복시킬 무위도, 기대에 충족할 만한 보상을 해줄 권력 또한 없었다.
게다가 혈천의 호법 직위만 가진 흑천마옹과 달리 진뢰궁귀의 경우, 혈천의 오당팔각 중 진뢰각주이기도 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