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하하하… 물론입니다. 아무리 제가 부궁주직을 맡고 있다고 하지만 감히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팔 수 있겠습니까? 대군사님.”
“그야… 그렇지만…….”
대장로와 대호법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적천우를 신임 련주 후보로 거론한 것은 대군사 자의가 아니었다.
혈영수라가 회의장을 떠나기 전에 그에게 전음입밀로 청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혈궁이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가 대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혈천 공식 서열 5위인 대군사와 달리 혈궁의 부궁주는 30위권 내에 있어서였다.
그럼에도 대군사는 혈영수라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건 혈영수라의 청이 아닌 ‘그분’의 지시였기에 가능했다.
“정말 그분의 지시가 맞다면 공식적으로 알리는 것이 낫지 않겠소? 그게 적 대주를 사해련주로 세우는 데 수월할 텐데 말이오.”
“그분께선 아직 여러분을 지켜보기로 하셨습니다. 부천주님처럼 실망시키지 않기를…….”
“그, 그 말씀은…….”
혈영수라의 말에 대군사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그를 보며 혈영수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분께서 오랜 칩거를 깨시는 순간 모든 것은 정리가 될 것입니다. 중원무림은 물론 본천 역시… 이는 대군사께도 마지막 기회입니다. 더 이상 그분을 실망시키지 마십시오. 그러라고 그분께서 절 보내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
탐욕의 화신인 사망도제를 부천주의 자리에 만족하게끔 만든 괴물.
이 거대한 혈천을 만든 장본인.
그런 그가 전한 최후의 경고.
세 치 혀로 부천주, 대장로 그리고 대호법 사이를 조율해왔던 대군사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대군사에게 무거운 짐을 던져준 혈영수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분께 받은 지시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부, 부궁주!”
대군사의 부름에도 혈영수라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처음부터 이 자리에 없었던 사람처럼.
홀로 남은 대군사는 10년은 더 늙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만큼 그에게는 무거운 짐이 생겼다.
허나 그는 아직도 몰랐다.
혈영수라의 말과 달리 혈천주는 이미 칩거를 깨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 * *
“그가… 정말… 백의무제… 나의 조부라고…….”
이가장 일행과 헤어진 철우는 무당산으로 향했다.
불교 사찰만큼은 아니었지만, 도교의 도관인 무당파에는 많은 유람객과 향객이 방문한다.
물론 무당파 본파는 외부인 출입금지였기에 본파 이외의 도관에서 향객을 받았다.
그러나 현재 무당파는 향객을 받지 않았다.
그간 무당파는 여러 큰일을 겪었기 때문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백의무제가 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철우는 무당파 본파의 출입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검신 이현성의 서신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믿기지 않으나… 소협께서 검신 님의 말씀대로 무제 님의 손자가 맞다면 말입니다.”
“…….”
철우는 매우 착잡한 눈으로 누워있는 백의무제를 바라봤다.
그의 몰골은 무척이나 처참했다.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철우는 그를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잠깐이지만 무림맹 신산각에서 당시 맹주였던 백의무제를 봤다.
적이었던 그가 알고 보니 자신의 조부였다는 사실은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철우조차 믿기 어려운데, 무당파 진인들이라고 쉽게 믿을 수 있었을까.
허나 서신을 보내온 자가 바로 검신이었다.
그는 결코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철우는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꺼냈다.
“이것과 같은… 문신이 있다고 성님께 들었…습니다. 확인하고 싶습니다.”
“허… 정말이었구려.”
철우는 이현성의 입장을 생각해서 무당파 진인에게 존칭을 사용했다.
무당파 진인은 철우의 목걸이를 보며 놀라워했다.
목걸이의 문양은 분명 백가의 문양이었다.
철우의 청에 무당파 진인은 조심스럽게 백의무제의 상의, 정확히는 가슴 부분을 보여주었다.
“……!!”
백의무제의 가슴에는 상당히 그을려 있었으나 분명 목걸이의 문양과 같은 문양이 자리하고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
덕분에 철우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차라리 몰랐다면 이렇게 화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대단한 자가 자신의 조부가 아니었다면 그래도 참을 만했을지도 모른다.
“왜… 왜… 당신이! 내 조부냐고!!”
“오, 오라버니. 이러시면 안 돼요!”
당혹스럽기는 적묘 역시 다르지 않았다.
혈살객으로서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면서 전우들을 잃은 것은 물론, 자신 역시 사경을 헤매게 된 것은 눈앞의 노인, 백의무제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연인관계인 철우의 조부란 말을 들었을 때는 믿기지 않았다.
허나 자신이 느낀 당혹감은 철우에 비할 바가 아님을 알기에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예상한 것 이상으로 철우가 분노를 터트리니 적묘로서는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무당파 진인은 철우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당황했다.
짝!
“정신 차려요! 저분을 원망한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에요! 회복하시면… 회복하시면 그때 하세요!”
“적묘…….”
얼얼해진 뺨을 어루만지며 철우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화가 나서 정신이 살짝 나갔기에 백의무제의 몰골이 정상이 아님을 잊고 있었다.
철우는 무당파 진인을 향해 물었다.
“회복, 아니… 얼마나 살 수 있습니까, 진인.”
“태의(太醫) 님께서 치료해주셔서 급한 불을 껐으나 그분조차 장담하지 못하셨소, 소협.”
얼마 전, 웬 노의원이 무당산에 올랐다.
노 의원은 범상치 않은 고수들 수십여 명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노 의원의 신분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허나 이곳은 무당파.
범상치 않은 고수들일지라도 함부로 통할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당파에선 노 의원을 매우 정중하게 대했다.
노의원이 정체가 황족의 건강을 책임지는 태의(太醫)였기 때문이다.
만독궁의 독왕, 죽은 성수 백우종과 함께 삼대신의로 불리는 그였다.
태의는 물론, 황실의원들은 황명 없이는 황도를 벗어날 수 없었다.
특히 황실의원의 수장인 태의는 황제 외의 황족조차 그에게 명령할 수 없었다.
다르게 말하면 황제의 명 없이는 이토록 먼 호북에 있어선 안 되는 존재란 뜻이다.
“태의라… 황실의 그 태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태의께서 어떻게…….”
“천하에 태의는 한 분뿐이라오. …검신 님께서 황실에 요청하셨습니다.”
“성님께서…….”
번왕이라도 감히 황제에게 태의를 요청할 수 없었다.
명예 왕작을 부여받은 검신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검신은 황제에게 주청을 올렸고, 황제는 그 주청을 들어주었다.
그건 검신이 황제에게 받은 사면령을 거두는 조건이었기에 가능했다.
반역을 제외한 그 어떤 죄도 사면해주는 사면령이었다.
황후를 죽인다고 해도 죄를 물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권한을 가진 사면령을 조건으로 내세웠기에 황제는 태의를 보내주었다.
신의라는 태의조차 장담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상 절망적인 상황이란 뜻이다.
그만큼 백의무제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애초 그니까 지금까지라도 살아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미 진즉에 고혼이 되었어야 했다.
“태의 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빈도가 무제 님의 치료를 할 테니 소협은 포기하지 마십시오.”
“…….”
“…부탁드리겠습니다. 진인.”
무당파의 전대 의약전주인 적현진인의 말에 철우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 그의 곁에 있던 적묘가 대신 허리 숙여 부탁을 했다.
적현진인은 철우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무제 님을 원망한다고 해도 곁에 계셔주었으면 합니다. 소협. 무제께서 포기하지 않으실 수 있게…….”
반송장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백의무제가 생명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가 어쩌면 잃어버렸던 손자를 만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적현진인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철우가 백의무제의 손자로 확인된 지금, 그를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백의무제를 바라보는 철우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당신이… 왜…….”
경사
“그 말… 사실인가?”
“증거는 확보하지 못한 상황입니다만… 사실인 듯싶습니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는 법이다.
하물며 무림맹주가 친히 맹의 고수들을 이끌고 섬서까지 왔다.
빈손으로 돌아가자니 영 체면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사해련주는 이미 검신에게 패배해서 도주를 했고, 사해련의 잔당들 역시 도망친 후였다.
무림맹의 고수들을 움직인다면 잔당들 정도는 정리할 수 있으나 체면상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보고를 받게 되었다.
“암군이 마공을 익혔다라… 이게 사실이라면 무림맹주로서 좌시할 수 없지.”
“허나 방금 말씀드린 대로 아직 증거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당가만 아니라 오대세가의 거센 반발이…….”
독종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감히 사천의 성도에 무림맹의 눈과 귀를 심어둔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독종의 화경고수에 버금가는 힘과 독선적인 성격은 무림맹으로서도 부담스러웠다.
허나 그의 죽음과 사해련에 의해 사천무림이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틈이 많아졌다.
무림맹은 사천무림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 맹의 눈과 귀를 심어두었다.
혹시 사천당가가 사고 칠것을 우려한 것이다.
그러던 중 예상을 벗어나는 짓을 벌였다.
황실에서 금지한 노(弩)를 제작한 것으로도 부족해서 사천당가주인 암군 당자성이 마공을 익힌 정황이 나왔다.
전자의 경우는 무림맹이 나서서 문제 삼을 필요까진 없었다.
노를 금지한 곳은 황실이었으니까.
허나 후자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명문정파인 사천당가의 주인이었다.
따라서 정파무림 연합체인 무림맹의 맹주로서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다만 마공의 정체가 독마의 앙천독강이란 사실까지는 알아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일개 마공이 아닌 마교의 마공이란 사실이 밝혀진다면 사천당가는 무림공적으로 지정되어 정사무림 모두에게 배척은 물론, 멸문을 당할 수도 있었다.
“상관없네. 반발 따위도 누르지 못해서 어찌 큰일을 하겠는가. 안 그런가. 신창.”
“맞습니다. 맹주님.”
애송이라고 생각했던 암군이 청해마왕을 죽였다는 연락을 박았을 때, 신창은 경악했다.
청해마왕이라면 신창 본인도 장담할 수 없는 강자였다.
죽은 독종이라면 몰라도 그 아들인 암군의 손에 죽을 청해마왕이 아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청해마왕은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형편없는 자였거나 암군에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암군이 마공을 익히고 있다고 하니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수도 없는 법 아닌가.”
‘이참에 사천도 무림맹 아니, 내 영향력 하에 두고 말이야.’
사천무림은 무림맹의 영향력이 미약한 지역이었다.
거리가 멀다는 점도 문제였으나 사천무림의 실질적인 패자인 사천당가의 독선적인 태도가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런 사천무림을 복속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를 놓칠 십절무왕이 아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