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수라검귀와 수라검대가 사라지자 야차도귀는 이를 갈았다.
“…네놈이 이 일에 관련되었다면 결코 살려두지 않겠다!”
* * *
“빌어먹을… 고작 사천(四川) 따위에게 이렇게 고전할 줄이야.”
청해마왕의 죽음으로 사해련 사천정벌군의 새로운 군단장이 된 흑천마옹은 짜증이 났다.
전임 군단장인 청해마왕이 애송이라고 생각한 암군 당자성에게 죽임을 당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 이후 많은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뒤늦게 도착한 무림맹의 지원군 때문에 성도 함락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벽력마군은 언제쯤 당도한다더냐!”
“한 시진 거리에 당도하셨습니다! 군단장님!”
그나마 위안거리는 아미파 본산을 점거했다는 것 정도였다.
아미파 비구니들은 목숨을 걸고 옥쇄하려고 했으나 막대한 머릿수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들은 눈물을 머금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청성의 대라신군(大羅神君)과 점창 사일검군(射日劍君)의 만류가 아니었다면 도망이 아니라 산화하려고 했을 것이다.
즉, 아미파 본산을 점거했으나 아미파 자체를 무너트리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흑천마옹은 성도에서 후퇴한 벽력마군과 그가 이끄는 이천여 군세가 도착하면 산 아래 포진한 아미파의 잔당과 운남 고수들 그리고 청성의 대라신군 모두를 섬멸할 생각이었다.
“이제 곧 섬멸한다. 모두 준비시켜라!”
“존명!”
막대한 머릿수 차이에도 그들을 섬멸하지 못한 것에 흑천마옹은 자존심이 상했다.
이미 사해련에게 몇 번이나 된통 당했던 사천무림이 독이 바짝 올라서 죽을 각오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번에는 다르다.
위아래서 밀어붙인다면 중간에 낀 그들은 결국 전멸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전투 준비를 지시한 흑천마옹은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들었다.
“구, 군단장님!!”
“…무슨 일이더냐!”
출전에 앞서서 정신을 가다듬고 있던 흑천마옹은 방해를 받자 심기가 불편한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덕분에 보고하려던 부관은 움찔했다.
그런 모습이 흑천마옹을 더욱 짜증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전투를 앞두고 고수인 부관을 죽여서 좋을 것은 없었다.
“려, 련주님께서…….”
“련주께 무슨 일이 있으시더냐!”
흑천마옹은 부관의 말에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그의 언성이 높아졌다.
부관은 움찔했으나 이번에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검신에게 패배를 해서 도주… 아, 아니, 후퇴하셨다고 합니다!”
“뭐, 뭐라고!!”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흑천마옹은 기가 막혔다.
그가 아는 사해련주는 절대자였다.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강자였다.
사해련만 아니라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혈천에서도 그보다 강한 자는 없었다.
있다면 아직 한번도 영접하지 못했던 신비에 쌓인 혈천주뿐이었다.
그런 사해련주가 검신이라는 애송이에게 패했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더냐! 네놈의 목을 걸고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군단장님… 사, 사실입니다. 섬서에서 지급으로 온…….”
쾅!
움찔!
흑천마옹이 휘두른 주먹에 의해 벽이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흑천마옹은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는지 아직도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젠장!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암군 당자성에게 죽은 청해마왕도 어이가 없는데, 검신 이현성에게 사망도제마저 패배했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가 않았다.
흑천마옹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해련주가 후퇴를 했다는 것은 섬서정벌만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사해련의 출정 자체가 실패했다는 의미였다.
애초 감숙을 제외하고 정벌해내지 못한 상황이다.
그리고 감숙조차 돌려줘야 할 판이었다.
우드득…….
“회…군할 준비를 하라…….”
예상치 못한 청해마왕의 죽음, 운남무림과 무림맹의 지원군.
그리고 봉문한 청성 대라신군의 참전 등으로 일이 많이 틀어졌으나 충분히 사천무림을 정벌할 자신이 있었다.
벽력마군과 이천여 군세를 합치면 최소 육천이 훌쩍 넘는 대군세였으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흑천마옹은 포기했다.
사해련주가 물러난 이상 사천무림을 정벌한다 해도 끝까지 지켜낼 수 없었다.
‘젠장! 물러나는 것은 이번뿐이다!’
원망
“사부님! 너무하세요!”
“미안…하구나, 영아.”
이현성과 이가장 고수들은 서안을 떠났다.
서안에 남아 있기 불편해서였다.
그런 그들을 그냥 보낼 수 없는지 화산 장문인 화천기는 부상당한 화산의 제자들을 인솔하며 동행했다.
감사의 뜻을 전하며 화산에서 대접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서안을 벗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무리를 만나게 되었다.
화옥령에 의해서 의식을 잃었던 이현영과 그녀를 호위하는 신룡표국이었다.
이현영의 투정에 화옥령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홀로 전장으로 떠난 사부를 걱정했던 이현영은 화옥령이 무사한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투정은 작은 심술일 뿐이었다.
“영 누이, 화 사부님께서 몸이 편치 않으니 그쯤 하시오.”
“이 소협이 날 구해주었단다. 네 아우라고…….”
“예. 사부님. 현호야, 고마워. 사부님을… 사부님을…….”
“아니오, 누이. 누이의 사부님이 아닙니까.”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을 때, 화천기가 이현성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검신 님. 드릴 청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장문인.”
이미 화천기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도 이현성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때 이현성의 귓가에 화천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천기는 육성이 아닌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이현성에게 뜻을 전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다.
제법 심각한 대화였는지 화천기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그러더니 그가 이현성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라니요? 아닙니다. 제 누이의 사부님이 아닙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다행히 대화가 잘 되었는지 화천기의 얼굴에는 기쁨과 후련함이 엿보였다.
그는 이현성에게 제 누이인 화옥령을 부탁했다.
제자인 이현영과 함께 지내면서 마음을 추스르길 원했다.
다만 그 속에 담긴 비사를 모두에게 밝히는 것은 꺼려졌기에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설명했다.
그렇게 속이 후련해진 화천기와 달리 이현성은 아직 숙제를 풀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철우에게 말하지 못했구나. 하…….’
* * *
“이 자식,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많이 폈다? 이 형님은 그 고생을 하고 계셨는데.”
“형님은 개뿔!”
어울리지 못하고 이가장 무리와 조금 떨어져서 움직이는 이남일녀가 있었다.
그들은 막역한 사이인지 매우 친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옥과 같은 시간을 무려 십여 년이나 함께 버텨 온 형제이자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보다 의외군. 너 같은 곰에게 여인이라니…….”
“흠흠… 이게 너와 이 형님의 차이 아니겠느냐. 하하하!”
그들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여인은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진면목을 아는 자라면 경악할 일이었다.
손속이 잔혹하기로 유명한 적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보다 성님은 뵈었어?”
“잠깐…….”
“…그렇군. 성님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지?”
“그럴 리가? 내가 어찌 형님을 원망할 수 있겠어.”
이가장 고수들과 동행한 초운비는 다행히 이현성을 만날 수 있었다.
허나 깊은 대화를 나눌 여유는 없었다.
그로 인해 아직 풀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이현성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마음은 사실이었다.
그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는 혼란스러웠고, 잠시나마 원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허나 그런 원망은 얼마 가지 않고 사라졌다.
이젠 지옥과 같은 옛 시간을 술안주 삼아서 웃고 넘기고 싶을 뿐이었다.
“미안하구나. 진즉에 너희를 찾았어야 했는데…….”
“형님, 아닙니다. 이렇게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따름입니다.”
“맞습니다. 성님.”
화천기와 함께 선두에 있던 이현성이 후미에 있는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들 역시 이제 이가장 식구였지만, 아직은 어색한지 서먹했다.
아무래도 장주의 의제란 신분이 기존 식솔들로 하여금 다가오기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 역시 사교적인 성격이 아닌 만큼 먼저 이가장 식솔들에게 다가가지도 않았다.
이현성은 두 의제들을 보며 감회가 새로웠다.
그가 혈무곡에서 도망쳤을 때, 결심했던 일 중 하나가 바로 혈천에 두고 온 의제들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걸 이제야 이루었다.
허나 자신의 힘이 아닌 의제들 스스로 이룬 일이었다.
그렇기에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장원에 돌아가면 많은 이야기를 하자. 그간 하지 못한 이야기를…….”
“예. 형님.”
“그리고… 철우 네겐 따로 할 말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성님!”
씩씩한 철우를 보며 이현성은 나직하게 말했다.
“목걸이는 잘 간직하고 있느냐?”
“물론입니다. 성님.”
이현성은 철우를 다시 만난 후 그의 목걸이를 돌려주었다.
고아인 철우의 신상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는 목걸이라 생각해서였다.
허나 그건 추측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가문을 상징하는 목걸이였다.
“…그 목걸이의 문양과 똑같은 문신을 하신 분을 알고 있다.”
“…!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님.”
철우는 의형 이현성의 말에 당황했다.
그런 그를 보며 이현성은 말을 이었다.
“그분께는 오래전, 잃어버린 손자가 있다고 하더구나. 아무래도 그분께서 네 조부님 같단다.”
“…….”
철우는 멍해졌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평생 고아로 살아왔기에 자신에게도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허나 진짜 가족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만약 가족이 있었다면 자신이 다리 밑에서 거지로 살아왔을 이유가 없다.
충격을 받은 듯한 철우를 보며 이현성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분께서 많이 위독하시단다. …뵙고 오거라.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
철우는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수백의 적을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철우였지만, 이번만큼은 충격이 컸다.
그런 그를 보며 이현성은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단순한 행동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철우는 마음이 편해졌다.
“어딥니까? 내 조부일지 모르는 자가 있는 곳이…….”
허나 철우는 아직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조부…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기에는 그가 그간 겪은 시간이 너무도 지옥과도 같았다.
그런 철우를 보며 이현성은 다그치지 않았다.
그건 그와 백의무제 간에 풀어야 할 숙제였다.
“그분은…….”
* * *
“헉… 헉… 헉…….”
“으으~윽!”
방에는 뜨거운 열락의 열기와 야릇한 신음 소리만 가득했다.
그 중심에는 땀투성이가 된 남녀가 있었다.
얼마 후 열기와 신음이 잦아졌을 때, 사내는 난데없이 웃고 있었다.
“크크크… 놈은 네가 내 아래에 깔려 있는 것을 알고 있을까?”
“쓸데없는 소리… 약속은?”
“걱정 말라고, 나도 원하는 바이니까.”
사내의 정체는 천운현. 천씨세가 주인 천운성의 아우였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