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칼을 쥐었던 오른팔을 잃었으니까.
아무리 가공한 회복력을 가진 불사마공도 사라진 팔을 회복시킬 순 없었다.
물론 팔 하나 잃었다고 살아가는 데에 지장은 없다.
허나 무림인의 삶에는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팔 하나 없는 것만으로도 몸의 균형은 무너진다.
화경고수인 사망도제는 그 정도 약점을 충분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허나 같은 화경고수를 상대할 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전쟁을 끝내볼까?”
이현성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내공이 실린 그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육합전성(六合傳聲).
사자후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음공이었다.
“전쟁은 끝냈다! 사망도제는 도망쳤다! 더 이상 무고한 피를 흘리지 마라!!”
사해련 섬서정벌군과 섬서무림 양측 합쳐서 수만이 되는 이들 모두 이현성의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외침에 희비가 갈렸다.
특히 사해련 섬서정벌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발광했다.
“려, 련주님께서 패하셨을 리 없다고! 련주님은 천하제일이라고!!”
“도, 도망을 쳤다고!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야!!”
사망도제의 패배도 믿을 수 없는데, 도망쳤다는 말은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절대로 그와 같은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허나 검신의 외침에도 사망도제의 반박이 없었다.
이는 그가 이곳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건 죽은 것이 아니면 검신의 말대로 사망도제가 도망쳤다는 뜻이다.
사해련 섬서정벌군은 믿고 싶지 않았으나 더 이상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반대로 섬서무림은 일제히 환호했다.
“와! 검신께서 승리하셨다!”
“사해련을 무찌르자!!”
이로서 전쟁은 끝이 났다.
그렇게 혼란해진 틈을 타서 사해련의 중견고수들은 급하게 도망을 쳤다.
사망도제가 도망친 이상 자신들에게는 이제 승산이 없었다.
더 이상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없었고, 제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해서 도망치는 방법밖에 없었다.
“노, 놈들이 도망친다!”
“마, 막아!!”
사해련의 중견고수들이 도망치자 눈치만 보던 하위무인들 역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를 보며 섬서무림인들은 당황하며 막으려고 했다.
그때 검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치는 자! 그만 놓아주시오. 저 많은 자들을 모두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그, 그런……!”
“검신 님의 말씀대로요! 우린 정파입니다! 더 이상 무고한 피를 흘리는 일은 그만둡니다.”
“뭐가 무고한 피입니까! 저놈들이… 저놈들이!!”
이현성의 외침에 화산장문인 화천기가 거들었다.
허나 사태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피를 나눈 가족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들을 잃은 그들로서는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도망치는 자들까지 쫓아서 죽이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이 일을 어떻게 마무리 짓는가에 따라서 정사대전으로 발전하느냐, 아니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본인이 사해련주를 막은 것은 그가 무고한 생명을 해하는 것을 막고 싶었기 때문이오! 추후 사해련주가 복수를 위해서 다시 섬서를 침범했을 때 본인은 더 이상 그대들을 돕지 않겠소! 그대들 역시 저들과 다를 바가 없으니 말이오! …본장의 형제들은 더 이상 섬서무림에 관여하지 말고 모두 물러나라!”
“존명!”
이현성의 외침에 이가장 고수들은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을 보며 섬서무림인들의 얼굴은 무척이나 복잡해졌다.
항복한 자들이나 도망친 자들까지 모두 죽이려는 마음이 점점 희석되었기 때문이다.
섬서무림의 명숙들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독려했다.
“검신 님을 원망하지 마시게나.”
“원통하지 않은 자, 누가 있겠소. 허나 너무 많은 피를 흘렸소. 우리 섬서무림만 아니라 이가장분들도… 그리고 공심대사님도…….”
반야신승(般若神僧) 공심대사가 언급되자 모두가 숙연해졌다.
존경받는 그의 죽음에 그들 모두가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사해련의 섬서 정벌은 실패로 마무리 되었다.
그 시각 서안에서 도망친 사망도제는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 * *
“죽여버리겠어!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도망치는 사망도제의 입에서 검신을 향한 저주와 거친 욕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검신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오른팔을 잃고 도망친 것은 그에게 일생일대의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섬서 정벌의 실패는 물론, 이제 혈천 내에서 그의 입지까지 흔들릴 판이었다.
아무리 사망도제라도 오른팔을 잃은 이상 대장로와 대호법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검신!!”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칼을 오른손처럼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선 분명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기필코 해낼 것이며, 이 원한을 갚고 말 것이라 거듭 다짐했다.
그러한 일념으로 사망도제는 도망쳤다.
흠칫!
그때 누군가의 기척을 느낀 사망도제는 왼손으로 주변 나뭇가지를 꺾었다.
그리곤 기척이 느껴진 곳을 겨누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칼은 오른팔과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누구냐! 감히… 음?”
“모시러 왔습니다. 부천주님.”
사망도제의 눈앞에 한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사망도제의 적이 아닌지 매우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
사망도제는 겨누고 있던 나뭇가지를 거두었으나 의심을 거두지는 않았다.
자신이 이곳을 지나고 있음을 저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 무척 의심스럽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런 의심은 곧 사라졌다.
정확히는 의심도 하지 못할 정도로 당황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아… 혈뢰 호법 아닌가! 그대가 여기는 어떻게…….”
사망도제를 찾아온 무리의 중심에 혈뢰검마가 있었던 것이다.
자하검제를 암살한 이후 잠시 연락이 끊겼던 그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웠다.
그런 그를 보며 혈뢰검마가 입을 열었다.
“주군께서 만약을 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처, 천주께서 칩거를 끝내신 것인가!”
사망도제는 혈뢰검마의 말에 당황하고 말았다.
혈천주가 혈궁에 칩거한 지 수십 년.
그 덕분에 부천주인 사망도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쥘 수 있었다.
만약 혈천주가 오랜 칩거를 깨고 전면에 나온다면 지금까지 누린 권력을 빼앗길 수밖에 없으니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건 아닙니다.”
“그, 그렇군.”
사망도제는 혈천주가 아직 칩거를 깬 것이 아니란 말에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혈뢰검마가 나직하게 말했다.
“저희가 호위하겠습니다. 부천주님.”
“…부탁하겠네. 혈뢰 호법.”
혈뢰검마가 눈짓을 하자 그와 함께 온 고수들이 사망도제를 포위하듯 호위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사망도제는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버리며 헛기침을 했다.
자신의 꼴이 우습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부천주님.”
“음? 무슨 일인가 혈뢰 호…컥!”
예상치 못한, 아니, 경악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혈뢰검마의 검이 사망도제의 목에 꽂혔다.
긴장이 풀렸던 사망도제는 혈뢰검마의 검을 피하지 못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목에 꽂힌 검과 혈뢰검마를 쳐다봤다.
“큭… 왜…….”
“맹세했다. 내 장인을 죽인 네놈을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이겠다고…….”
“미…친…….”
사망도제는 남은 왼손을 뻗어서 혈뢰검마의 사혈을 노렸다.
허나 혈뢰검마가 더 빨랐다.
사망도제의 목에 꽂힌 혈뢰검마의 검이 그의 목을 완전히 베었다.
순간 사망도제의 머리가 허공에 떠오르더니 곧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리 불사마공이 가공한 회복능력을 가졌다고 한들, 목이 떨어진 이상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지 그의 육신 역시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사망도제의 피를 뒤집어썼음에도 혈뢰검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향해 한 사내가 비단천을 건넸다.
혈뢰검마는 비단천을 건네받아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았다.
“수라검귀(修羅劍鬼), 이 일은…….”
“저희가 도착했을 땐 이미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고맙네.”
“아닙니다. 뒷수습은 저희 수라검대가 할 테니, 먼저 돌아가십시오.”
혈뢰검마와 동행한 자는 놀랍게도 혈천삼십육대의 수위를 차지하는 수라검대였다.
혈천십삼세의 주인들 모두 원하지만, 손에 넣지 못한 무력대가 바로 수라검대다.
대주인 수라검귀가 혈천주 외에는 그 누구도 섬기지 않겠다고 밝혀서였다.
그게 아니라도 누구도 수라검귀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가 강했고, 수라검대 역시 강했기 때문이다.
“…먼저 돌아가겠네.”
“예. 혈궁주님.”
혈뢰검마가 사라진 직후 한 무리가 나타났다.
수라검대는 검을 겨누며 경계했다.
상대의 무리 역시 그들을 발견했는지 칼을 겨누고 있었다.
허나 곧 당황하고 말았다.
“수라…검대? 수라검귀 네놈이 여긴 왜 있는 거지?”
“상부의 명령이다. 도귀.”
그들의 정체는 바로 야차도대. 수라검대와 견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무력대였다.
혈천삼십육대 최강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만큼 두 무력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대주인 야차도귀는 수라검귀에게 경쟁의식이 강했다.
“명령? 무슨… 명……!!”
수라검귀에게 따지듯 묻던 야차도귀의 눈이 커졌다.
수라검대에 의해서 가려졌던 누군가를 발견한 것이다.
“주, 주군!!”
야차도귀가 발견한 것은 바로 목이 베인 채 죽은 사망도제의 시체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부천주이자 사해련주인 사망도제가 이렇게 죽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야차도귀는 수라검귀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야차도대는 혈천삼십육대의 하나인 동시에 사해련주의 친위대 역할도 수행했다.
검신과 혈전을 벌이던 사망도제가 갑작스럽게 도주하면서 야차도대는 그의 곁을 지킬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만 이런 사달이 나고 말았다.
야차도대와 수라검대는 서로를 향해 도검을 겨누며 경계했다.
챙!
“네놈! 무슨 짓을 벌인 것이더냐!!”
“진정하게, 도귀(刀鬼). 설마 내가 부천주님을 죽였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야차도귀의 칼을 막은 수라검귀는 뻔뻔하게 되물었다.
그런 그를 보며 야차도귀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정황상 그가 범인이라는 것은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이 상황에서 무슨 개소리야!”
“그건 내가 할 소리다. 내가 무슨 수로 부천주님을 죽이지?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아닌가 도귀.”
“그, 그건…….”
상황만 본다면 분명 수라검귀의 짓이었다.
허나 야차도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수라검귀가 강하다고 한들, 화경고수인 부천주를 죽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임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칼 치우게. 우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돌아가신 후였어. 안 그래도 부천주님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했는데… 자네에게 맡기지.”
“…….”
눈 한번 깜짝하지 않는 수라검귀를 보며 야차도귀는 의심스러우면서도 더 이상 압박할 수가 없었다.
결국 야차도귀는 칼을 거두었다.
수라검귀에 대한 의심이 사라졌다기보다는 주군인 사망도제의 시신을 계속 널브러뜨려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