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게다가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수개월 전, 그는 벽을 깨고 초절정지경에 올랐다.
그 때문에 점잖은 구연청답지 않게 싸우고 싶어 한 것이다.
벽을 깬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야래향 역시 초절정지경에 오를 수 있었다.
“림주도 나가도 좋네.”
“아닙니다. 장로님. 제 임무는 주모님의 호위입니다. 그리고 제가 아니라도… 저분들이라면…….”
“하긴… 저들이라면… 허, 사람들은 알까? 이가장이야말로 용담호혈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야래향 역시 실력발휘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이가장의 일원이 되면서 겸손한 마음이 더욱 커졌다.
그녀 역시 초절정지경에 올랐으나 이가장에는 그녀보다 뛰어난 고수가 상당히 많았다.
눈앞의 독고혜는 물론, 구연청과 한승 그리고 몇 개월 전 장원을 찾아온 사내.
그 외에도 이가장의 장로, 호법들 중 자신보다 약한 자는 없었다.
초절정고수가 되었음에도 그러했다.
‘이가장의 일원이 된 것은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어.’
* * *
“천검출세(天劍出世)!”
“적양신장(赤陽神掌)!”
이가장의 활약은 대단했다.
흑룡대와 묵룡대도 대단했으나 이가장의 식객인 천검 한승과 호법인 적양신장 구연청의 활약은 독보적이었다.
사해련 섬서정벌군에 속한 초절정고수들은 섬서무림의 초절정고수들에게 발이 묶인 만큼 그들을 막을 자가 없었다.
허나 두 사람 만큼 대단한 무위를 보이는 자가 있었다.
“혈라산화(血羅散花)!”
십여 자루의 단검이 허공을 갈랐다. 직후 십여 명이 쓰러졌다.
사내는 흡사 비도술의 대가처럼 보였다.
그의 양손이 움직일 때마다 십여 명이 절명했다.
이에 사해련 섬서정벌군은 눈이 뒤집어졌다.
“놈의 단검이 무한할 리가 없다! 죽여라!”
“놈! 죽어라!!”
이성을 잃은 사해련 섬서정벌군 수십 명이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불나방처럼 사내에게 달려든 대가로 그들의 절반이 사내의 단검에 절명했다.
허나 그들의 희생의 대가로 사내의 손에는 이제 두 자루의 단검만 남게 되었다.
덕분에 사해련 섬서정벌군은 기뻐하며 사내를 갈기갈기 찢어죽일 생각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내는 비도술만 능한 것이 아니었다.
순간 사내의 양손에 쥐어진 두 자루의 단검이 움직였다.
“혈망회회(血網恢恢)!”
“컥!”
“으악!!”
“뭐, 뭐야!!”
사내의 양손에 쥐어진 두 자루의 단검이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그 모습이 흡사 허공에 그물을 짜는 것 같았다.
사해련 섬서정벌군은 스스로 그물에 빠졌다.
피(血)의 그물(網)에.
그로 인해 그들은 수십 조각의 고깃덩이가 되어버렸다.
너무도 잔혹한 모습이었다.
그 때문에 사해련 섬서정벌군만 아니라 섬서무림인들까지 흠칫 놀랄 정도였다.
‘후… 적을 베는 것에 열중하다 보니 내가 좀 과했나보군. 형님께 폐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어.’
사내가 이가장 고수들과 함께 온 만큼 섬서무림인들은 그를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진 않았다.
하지만 두려운 기색은 숨길 수 없었다.
이를 느낀 사내는 비록 적을 벨지라도 손속에 사정을 둬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비록 잔혹한 검술 때문에 가려졌으나 그의 무위는 결코 이가장의 호법인 구연청의 아래가 아니었다.
이는 그가 구연청 못지않은 고수란 것을 의미했다.
‘그보다 철우, 이놈은 어디로 간 거야? 이 형님이 이토록 고생하시는데?’
사내는 철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내는 철우의 형제이자 악우였기 때문이다.
혈견살객(血犬殺客) 초운비.
반년 전, 호남성 동정호에서 혈천 상부의 지시로 천사교의 소교주 사마염의 암살에 나섰던 그였다.
당시 초운비는 천웅방의 천패 구황의 권강에 죽음을 맞이했다.
허나 그건 초운비의 노림수였다.
자신의 죽음을 위장하기 위한 은폐작업이었다.
그러나 당시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도 사실이었다.
덕분에 하남 이가장으로 가는데, 수개월이나 걸렸다.
고생 끝에 간신히 이가장에 도착했으나 곤란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줄 철우나 이현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의외의 인물이 그의 존재를 증명해주었다.
그건 바로 이현호였다.
철우가 이가장에 지내면서 가장 가까이 지낸 인물이 바로 이현성의 친제인 이현호였다.
이현호는 철우를 통해서 초운비에 대해 많은 것을 들었기에 그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철우 놈은 나중에 혼내주고, 우선 저놈들부터 정리해야겠어.’
* * *
쾅! 콰쾅!
“놈! 제법이구나!”
사망도제와 검신의 격돌은 어느 한 명이 승기를 잡지 못하고 팽팽한 접전을 이루었다.
독왕과 함께 팔왕의 수위를 차지한 공심대사조차 사망도제에게 일방적으로 밀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검신이 팔왕보다 한 수 위임을 다시 한번 증명한 셈이었다.
덕분에 섬서무림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련주께서도 듣던 것보다 강하십니다.”
“건방진 놈!”
검신을 향한 사망도제의 말투가 흡사 하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현성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 정도에 흔들릴 정도로 정신력이 약했다면 진즉에 죽었을 것이다.
이현성이 항상 강자를 상대했음에도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냉철한 이성이 크게 한몫 했다.
혈기가 왕성한 나이라면 이 정도 도발에 쉽게 발끈할 텐데도, 넘어오지 않는 그를 보며 사망도제는 입맛을 다셨다.
‘발끈하면 쉽게 끝냈을 텐데 아쉽군.’
사망도제는 이현성의 세치 혀 역시 보통이 아니었기에 시간낭비란 것을 깨달았다.
그는 더 이상 도발을 해서 틈을 만들 생각을 접었다.
“슬슬 끝을 내자! 사망유희(死亡遊戲)!”
“끝은 제가 냅니다! 천중비화(千重飛花)!”
이미 수십 합이 오고 갔음에도 어느 누구 승기를 잡지 못했다.
이러다가는 이겨도 모양새가 별로라고 판단한 사망도제는 사망도법의 절초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에 이현성 역시 암천살무로 대응했다.
사망도제의 칼이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며 이현성의 사혈을 노렸다.
허나 일천 강기의 꽃잎으로 육신을 보호하는 천중비화를 모두 피해서 그의 사혈에 적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현성의 검술이 한층 더 성장한 덕분이었다.
쾅!
“큭! 젠장!”
“절 너무 가볍게 보셨습니다.”
반야신승도 이 정도 도격을 쉽게 감당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하지만 검신은 너무도 쉽게 사망도법의 절초를 막아냈다.
덕분에 오히려 사망도제가 조급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사해련주이자 혈천의 부천주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오냐! 기필코 죽어주마!”
흠칫!
사망도제의 눈빛이 바뀌었다.
단순히 눈빛만 바뀐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 역시 바뀌었다.
흡사 사람이 바뀐 것처럼 기질 자체가 달라졌다.
덕분에 이현성 역시 검을 꽉 주었다.
순간 사망도제의 칼이 움직였다.
“사망군림(死亡君臨)!”
“천중… 큭!”
간결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사망도제의 도격은 흡사 도법의 교범을 보는 것 같았다.
이현성은 천중비화를 펼쳐서 그의 도격을 막았다.
사망도제의 도격은 기세처럼 완전히 바뀌었다.
다행히도 천중비화로 사망도제의 사망군림을 막아냈으나 이현성은 다섯 보나 밀려났다.
그런 그를 보며 사망도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놈, 제법이군. 하지만 그뿐이지. …영광인 줄 알아라. 네놈의 죽음에는 과한 힘이니까.’
반야신승에 이어서 검신을 상대하는 것이 사망도제에게도 버거웠는지 결국 숨기고 있던 힘을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반야신승의 목을 거둔 그 힘을.
허나 힘을 숨기고 있었던 것은 사망도제만이 아니었다.
이현성 역시 아직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
파지직! 파지직!
사망도제와 검신의 기세가 충돌한 것만으로도 불똥이 튈 정도 강렬했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사망진천하(死亡振天下)!”
“파천황(破天荒)!”
콰쾅! 콰쾅!
쾅! 쾅! 쾅!
공심대사와 충돌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났다.
충격으로 대지가 흔들리고 성벽이 무너질 정도였으니, 민가들은 이미 와해된 후였다.
허나 충격은 받은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중심에 있는 사망도제와 검신 역시 무사할 수 없었다.
“쿨럭… 네, 네놈이 어떻게…….”
“우웩!”
사망도제는 검신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이번 도격은 결코 검신이 아닌, 그 누구도 막아낼 수 없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사망진천하는 사망도법의 정수로, 그 위력은 최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나 그것만으로 그가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자신한 것은 아니었다.
또 다른 비밀이 있었다.
“퉤! …사파에서도 금지 아니었습니까? 불사마공을 연성하는 게?”
“젠장…! 눈치챘군. 그게 어쨌다는 거지?”
사망도제의 숨겨진 한 수는 바로 불사마공(不死魔功)이었다.
사파고수 중에는 마공을 익힌 자가 적지 않다.
모든 마도의 마공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암묵적으로 연성이 금지된 마공 역시 존재했다.
그건 바로 마교의 마공이었다. 천마대전 당시 마교와 싸운 것은 정파무림만이 아니었다.
사파무림 역시 한 손을 거들었다.
나름 성세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마교가 천하를 잡으면 그들 역시 입장이 난처해진다.
천마대전 이후 정파무림만이 아니라 사파무림에서도 마교의 마공만은 연성이 금지되었다.
마교의 씨앗이 다시 퍼지는 것은 정사지간을 넘어서 모두 두려워했다.
게다가 불사마공은 무려 마교 십팔진마인 괴마(怪魔)의 독문마공이었다.
사파무림의 정점에 있는 칠사(七邪)인 사망도제가 이렇게 십팔진마의 마공을 익히고 있는 것은 비난받을 만했다.
독마의 앙천독강에 이어서 또 다른 십팔진마의 흔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차피 네놈만… 죽이면 본좌가 불사마공을 익힌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괴마의 불사마공을 익힌 사실이 밝혀지면 비난을 받겠지만, 그가 곤란할 정도는 아니었다.
평화의 시기라면 무림공적으로 몰리며 정사무림의 적대를 받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미 무림정세가 혼란한 시기였다.
불사마공을 익힌 것만으로 정파무림은 몰라도 사파무림까지 자신을 적대할 수는 없었다.
자신과 사해련만을 적대하면서 정파무림을 상대할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곧 혈천이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그때는 불사마공을 익힌 것이 흠이 되지 않는다.
혈천 내에는 마교의 마공을 익힌 자가 수두룩하니까.
그럼에도 이현성을 죽여서 비밀을 지키려는 것은 불사마공이 그의 마지막 한수였기 때문이다.
‘비밀은 비밀일 때 가장 빛나는 법이니까.’
불사마공에는 많은 비밀이 있지만, 최대 장점은 바로 경악스러운 회복능력이었다.
심장이 찔려도 죽지 않을 정도로 가공할 회복능력을 가진 괴공이 바로 불사마공이었다.
실제로 천마대전 당시 괴마를 보며 수많은 중원고수들이 치를 떨었다.
찌르고 베어도 죽지 않고, 달려드는 그의 괴이함에.
물론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었다.
불사마공에도 약점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괴마 역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그 약점 역시 사망도제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지금은 비록 검신의 강함이 예상을 뛰어넘었기에 큰 부상을 입었으나 불사마공의 회복능력 덕분에 빠르게 회복 중이었다.
“만물에 불사(不死)란 없소, 련주.”
“…닥쳐! 네놈을 곧 죽여줄 테니까!”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