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자가 호통을 쳤다.
“감히 어디 냄새나는 계집 따위… 큭! 이 사혈광도님을 물로… 컥!”
“부, 부대주님!”
사해련에서도 나름 중견이라고 할 수 있는 사혈광도는 여인의 일검을 막아냈다.
허나 그뿐이었다. 이어진 이검까지는 감당치 못하고 절명하고 말았다.
사해련 중견급 고수인 사혈광도조차 여인의 이격을 막아내지 못했으니 사해련의 고수들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여인의 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커억!”
“제엔장!!”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피해가 누적된다면 사해련 입장에서도 좋을 게 없었다.
그때 또 다른 사해련 고수가 나섰다.
“역시 쓰레기 같은 놈에게 부대주 자리를 주는 게 아니었어.”
“…….”
사내는 지금까지 여인이 벤 자들과는 달랐다. 기세부터가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사해련 서열 100위권 이내에 속한 고수였다.
중견고수라도 사혈광도와는 급이 다르다.
“대, 대주님!!”
“병신 같은 것들. 비켜라! 내가 상대하겠다!”
사내의 호통에 사해련 고수들은 움찔하곤 바로 물러났다.
사해련은 강자존, 강자는 약자 위에 군림하는 곳이었다.
강자인 사내가 약자인 저들을 막 대하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쓰레기라도 내 수하들을 죽인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거다.”
“…….”
여인은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다.
사내는 예상했는지 여인의 검을 어렵지 않게 막았다.
챙! 채챙!
몇 합 나누지 않았는데 사내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여인의 정체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한월마검? 허…! 누군가 했더니 한천마녀였군. 한천마녀가 이곳에는 왜… 음?”
“…….”
챙!
여인의 정체는 화산에서 떠난 화옥령이었다.
그녀가 휘두른 검이 이번에는 사내의 검에 막혔다.
“대답하기 싫다? …뭐 상관없지. 한천마녀라면 내 진혼검을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니까.”
“……!”
화옥령의 눈이 커졌다.
진혼검(鎭魂劍) 위광.
사해련 58위의 고수이자 진혼대주였다. 절정의 극에 오른 검객이기도 했다
화옥령이 온전한 상태였다면 충분히 벨 수 있는 상대였지만, 내상을 회복하지 못한 지금의 그녀에게는 버거운 적이기도 했다.
‘반드시 벤다.’
화옥령의 머리에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적을 베어서 아군을 구하는 것. 그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상대가 버겁다’, ‘위험하다’는 생각 따윈 없었다.
그랬다면 애초 화산을 떠나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검이 차가운 기운을 흘렸다.
“크크…!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화옥령의 검과는 다르지만 위광의 검에서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때 두 사람이 움직였다.
쾅!
“흐음…….”
“끄응… 크크…! 좋아, 좋아!”
화옥령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조금 전 충격이 간신히 누르고 있는 내상에 영향을 주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내상이 도질 정도는 아니었다.
충격을 받은 것은 진혼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피가 끓기 시작하며, 그는 오히려 기뻐했다.
진혼검 위광.
비록 자신보다 약자를 쓰레기 취급하는 오만한 자였지만, 검에 한에서는 무척이나 진지한 사내였다.
피가 끓기 시작하자 그의 검은 더욱 난폭해졌다.
쾅! 쾅! 콰쾅!
울컥!
“우웩!”
“음? 고작 그걸로 토혈(吐血)을 해? 젠장, 뭔가 이상하다고 했더니 내상을 입고 있었군.”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위광의 검을 상대하던 중 화옥령은 억누르고 있던 내상이 도지고 말았다.
진혼검과 같은 고수의 검을 오래 상대하기에는 그녀의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
토혈하는 화옥령을 보며 흥이 식었는지 위광의 얼굴에 짜증스러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
“짜증나네, 그만 죽어라!”
챙!
“우웩!”
“가지가지 하는군!”
화옥령은 위광의 검을 간신히 막았다.
허나 그 충격으로 쥐고 있던 검을 놓쳤을 뿐만 아니라 내상은 더욱 깊어졌다.
그로 인해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렀다.
‘이렇…게 가는 건가… 미안하구나 영아. 사랑하는 나의 제자야…….’
화옥령은 죽음을 직감했다.
그렇기 때문인지 그녀의 눈앞에 제자 이현영과의 추억이 빠르게 스쳐갔다.
그러는 사이 위광의 검이 화옥령의 심장을 향했다.
“커억! 미…친…….”
“부인, 괜찮으십니까?”
단발마의 비명과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비명과 욕설은 화옥령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죽음을 각오했던 그녀가 눈을 뜨자, 허망하다는 듯 눈을 뜬 채로 절명한 위광이 보였다.
누군가 그의 가슴에 꽂힌 검을 뽑았다.
그제야 화옥령은 자신이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괜찮습니다. 은공께선 누구이신가요?”
“이가장의 이현호라고 합니다.”
화옥령은 이가장이란 말에도 큰 감흥이 없었다.
이씨 성은 천하에서 가장 많은 성씨인 만큼 이가장이란 이름은 가진 장원 역시 수없이 많았다.
“화옥령이라고 해요… 화산의… 구해주셔서 감사…….”
“화, 화 사부님이셨군요! 이런 우연이 있다니!”
살짝 흥분한 사내를 보며 화옥령은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사내를 처음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 누이가 화 사부님의 제자인 이현영입니다. 화 사부님.”
“…!! 그대가… 그럼 검신의?”
“예 맞습니다. 검신께서 제 형님이십니다.”
사내의 정체는 이현성과 이현영의 아우인 이현호였다.
허나 이곳에 온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현재 장원의 고수들과 함께 왔으니 걱정 마십시오. 화 사부님!”
“혹… 검신께서도?”
이현호는 화옥령의 물음에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그의 미소에 화옥령의 눈이 커졌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도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거, 검신이시다!!”
“이가장에서 지원이 왔다!!”
십절무왕과 무림맹의 지원을 기다렸던 섬서무림인들은 검신과 이가장의 합류에 더욱 환호했다.
* * *
“뭐? 검신! 짜증나는 새끼가 여긴 또 언제 기어들어온 거야!”
공심대사를 벤 이후 사해련주는 직접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나서지 않아도 이미 승기는 기울었다.
무엇보다 화경고수인 그가 칼을 쥐게 할 만한 적이 없었다.
하찮은 것들을 베기에는 체면이 서지 않았다.
어차피 나서지 않아도 기세가 꺾인 섬서무림인들을 베고 서안을 함락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 다 된 밥에 재를 뿌렸다. 검신 이현성이 도착한 것이다.
“그렇게 죽고 싶단 말이지? 오냐! 죽여주마!”
사해련주의 절대적인 살기에 적아를 불문하고 모두가 휘청거렸다.
그때 누군가 사해련주의 살기를 끊어버렸다.
쾅!
“사해련주이십니까? 이제라도 그만 물러나실 수 없습니까?”
“검신? 창사(槍邪)에게 당해서 사경을 헤맨다는 놈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나서!”
사해련주는 사내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차렸다.
저런 어린 나이에 자신의 살기를 벨 수 있는 고수가 흔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검신을 보며 짜증이 머리끝까지 오른 사해련주는 무형지기를 폭사시켰다.
초절정고수라도 위협을 느낄 수 있는 강력한 힘이었다.
허나 상대는 검신.
오제와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는 그였다. 그러니 무형지기 정도로 흔들릴 리가 없었다.
이현성 역시 무형지기로 대응했다.
파지직!
두 사람 사이에 작은 불똥이 튀었다.
그것만으로도 검신의 실력이 자신의 아래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뭐야! 아무리 천요후가 실패했다고 해도 의식을 되찾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쌩쌩해? 쳇, 귀찮게 됐군.’
사해련주는 혈천의 밀사를 통해서 천요후의 실패는 물론 검신이 의식을 되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허나 의식을 잃을 정도로 깊은 부상을 입고 깨어난 지 고작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몸 상태가 온전치 않을 거라 판단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는지 검신의 무형지기가 자신에 버금갈 정도였다.
그럼에도 사해련주는 자신이 패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겐 숨겨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반야신승의 목숨을 거둔 강력한 힘이 있었다.
허나 그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이현성은 내상이 깊어서 오랫동안 의식을 잃은 것이 아니라 심연 속에서 수련 때문에 깨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게다가 그의 정기를 노린 천요후가 도리어 자신의 내공(진원진기)을 그에게 빼앗겼다.
힘을 숨기고 있는 사해련주와 한층 더 도약한 검신.
승패를 쉽게 점칠 수 없었다.
그들의 격돌이 본격화되고 있을 때, 이가장의 합류로 섬서무림은 숨통이 트였다.
* * *
“이 자식들아 정신 차려! 고작 기백이 합류했을 뿐이다!”
“곧 련주께서 검신을 꺾으실 거다! 저 하찮은 놈들에게 밀리지 마라!”
사해련 섬서정벌군의 중견급 고수들은 수하들을 독려했다.
이가장의 합류로 꺾였던 섬서무림의 사기가 다시 회복하면서 전쟁의 승패는 다시 오리무중이 되었다.
양측 합쳐서 수만이나 되는 전쟁이었다.
고작 기백이 합류해 봤자 대세에는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라면.
“본장 최강은 우리 묵룡대다! 흑룡대에게 밀리지 마라!”
“무슨 소리! 우리야말로 최고다! 묵룡대에게 뒤처지는 새끼는 장원에 돌아가서 지옥훈련이다!”
검신의 이가장.
그런 이가장 최고의 무력대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흑룡대와 묵룡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피똥 쌀 정도로 혹독한 훈련을 해왔다.
그렇다고 해서 불만을 드러내는 자는 없었다.
검신의 최강 무력대란 자랑스러운 명예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기특한지 이가장의 장로와 호법들이 가르침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검신의 최강 무력대라는 명칭에 걸맞은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귀림은 다가오는 적을 베되, 주모님의 호위를 최우선으로 하라!”
이가장의 지원군은 흑룡대와 묵룡대만이 아니었다.
이가장의 주모인 문교교를 호위하기 위해서 귀림의 고수들 역시 동행했다.
원래는 장주이자 남편인 이현성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문교교가 그를 만날 채비를 했다.
그런 그녀를 호위하기 위해서 편성된 인원이었다.
호위대로서는 좀 과한 병력이었지만 검신의 부인의 안위를 생각하면 결코 과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이가장을 나선 그들은 다행히 길을 엇갈리지 않고 무당산에서 만날 수 있었다.
허나 만남도 길지는 못했다.
위험에 빠진 섬서무림을 구하기 위해서 이현성이 떠나야 할 예정이었다.
문교교는 그만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볼 수 없다면서 함께 가겠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현성은 난감했다.
위험한 전장에 무공도 모르는 그녀를 동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결정이라 여겼다.
허나 그녀는 무가의 안주인으로서 위험하다고 물러나는 것은 가모로서 옳지 않은 행동이라며 오히려 이현성을 설득했다.
보다 못한 독고혜와 야래향이 그녀를 지키겠다는 첨언에 이현성도 결국은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교교의 곁에는 내가 있을 테니, 구 호법은 나가셔도 좋아요.”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저도 주모님 곁에 있으니 걱정 마세요.”
“흠흠… 그렇다면…….”
독고혜의 말에 이가장의 호법인 적양신장 구연청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 그를 보며 귀림의 고수들을 이끌고 온 귀왕 야래향이 첨언했다.
결국 구연청은 기쁜 마음으로 뛰쳐나갔다.
구연청 역시 무림인이었기에 몸이 달아올라 근질근질했던 것이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