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그들 역시 성수의가와 함께 몰살되었다는 것이 가장 타당한 생각이나 이현성의 생각은 달랐다.
혈천, 그 지옥에서도 살아남은 녀석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리가 없다고 믿었다.
‘개방의 도움을 받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 장인어른께 도움을 청해야겠어.’
제갈세가의 무영대라면 개방만은 못하지만 제법 뛰어난 정보집단이었다.
과거에는 혈천의 정보교란에 의해서 철우를 찾아낼 수 없었으나 지금은 다르다.
살아만 있다면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할아버님을 살리기 위해서 반드시 그분의 도움이 필요해.’
그날 한 마리의 매(鷹)가 하늘을 가르며 황도로 향했다.
* * *
쾅!
“암군!”
청해마왕의 얼굴이 노기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미 성세가 기울어진 사천당가였다.
그렇기에 손쉽게 성도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허나 그건 크나큰 오산이었다.
사천당가는 역시 사천당가였다.
독종(毒宗) 당철영이 죽고, 본가가 유린당했다고 하지만 사천의 패자는 여전히 사천당가였다.
그러한 이유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철저히 준비했는지 그들의 독과 암기에 의해 사천정벌군 중 일천이나 당했다.
사천당가에게는 이렇다 할 피해도 주지 못한 채.
“폭마! 진천뢰(震天雷)는 넉넉하겠지!”
“재료가 부족하고 시간이 없어서 많이는 준비하지 못했으나 놈들을 날려버릴 정도는 됩니다. 마왕님.”
사해련주에게 굴복한 이후 성격이 많이 바뀌었으나 분노로 인해 흉흉했던 과거로 돌아온 듯싶었다.
벽력탄만 해도 뛰어난 화기이건만 진천뢰를 거론할 정도로.
화기는 제작하는데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마나 사해련이란 막강한 지원이 있었기에 빠르게 재료를 충당할 수 있었다.
허나 벽력탄도 제조하는 것이 까다롭기에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한데, 최강이라는 진천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는가.
특히 벽력마군은 태양마종과 함께 사천성에 침범한 이후 사천무림을 견제하기 위해서 감숙성까지 다녀왔다.
때문에 진천뢰를 만족할 만큼 충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청해마왕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벽력마군을 몰아세운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기에 꾹 참았다.
어차피 사천당가만 날려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럼 폭마(爆魔) 그대가 놈들의 일각을 무너트리게. 그 직후 내 직접 놈들 진형을 무너트릴 테니까.”
“알겠습니다. 마왕(魔王) 님.”
마음 같아서는 당장 홀로 사천당가를 때려잡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청해마왕이 강해도 극독과 암기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무사할 리가 없었다.
괜히 사해련 고수 일천이 그냥 당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무리 주군인 사해련주의 명령이 사천정벌이라지만, 사천당가를 무너트린다고 끝이 아니었다.
사천을 되찾기 위한 정파무림의 반격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기에 더 이상 희생을 늘릴 수가 없었다.
다행히 방법은 있었다.
벽력마군의 진천뢰.
최강의 화기라는 진천뢰라면 사천당가의 방어 일각을 무너트릴 수 있다.
그 틈을 이용한다면 그들의 방어를 일시에 재기불능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때 나머지 사천정벌군 사천의 고수들을 투입하면 순식간에 사천당가를 짓밟을 수 있었다.
“익일, 해가 뜨기 전에 우린 성도의 땅을 밟고 있을 것이다! 준비하라!”
“존명!”
사천당가를 무너트릴 계책을 결정하고 있을 때, 사천당가 역시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 * *
“우모침이 부족합니다!”
“이화정이 부족…….”
“독갈분의 여분이…….”
천씨세가와 칠웅방에 의해 본가가 털린 것이 무척이나 뼈아팠다.
많은 재화를 상실한 것도 문제였지만, 오랜 시간 축적한 독과 암기가 사라진 것 역시 사천당가로서는 큰 문제였다.
절독을 보관한 상급 독고는 심처에 숨겨져 있었기에 무사했으나 하급 독고와 하급 암기고가 털렸다.
일 년도 되지 않는 시간 안에 다시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한 문제가 오늘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철시가 아니라 암기를 제작했어야 했나.”
“아닙니다. 가주님. 이렇게 당했으니 놈들은 분명 폭마의 화기를 앞세울 겁니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철시는 꼭 필요합니다.”
암기가 부족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철시(鐵矢)를 제작했기 때문이다.
화살촉만 철로 제련하는 일반 화살과 달리 철시는 화살 전체가 철로 제련된 만큼 철 소모량이 클 수밖에 없었다.
철시 하나라면 작은 우모침의 경우 백 개 이상도 만들 수 있으니 어찌 보면 사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철시만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목시(木矢) 역시 상당히 많이 준비해두었다.
이 모든 것이 벽력마군의 화기에 덴 기억 때문이다.
그렇기에 화살을 만드는 일에 소홀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암기가 부족해진 상황이 왔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놈들도 화기를 많이 준비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코 놈들에게 틈을 보이지 마라!”
“물론입니다. 가주님.”
당자성의 말에 장로들과 당가팔수 등 가문의 수뇌들은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사천당가에서는 직계만 아니라 방계까지 동원해서 독과 암기를 준비했으나 사해련은 다르다.
재료야 준비가 가능하지만 화기 제작이 가능한 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중심에 있는 벽력마군이 감숙에서 왔던 것을 생각하면 화기 제작을 할 여유가 그리 많지 않을 거란 것을 추정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방심할 수는 없었다.
벽력마군의 벽력탄과 진천뢰는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이번이야말로 네놈들의 목을 물어뜯어 주마!”
* * *
어둠을 틈타서 한 무리가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워낙 절묘해서 평범한 사람은 보고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들이 일정한 위치에 도착하자 다시 몸을 숨겼다.
그들은 벽력마군의 친위대인 폭마대(爆魔隊)였다.
벽력마군에게 벽력공(霹靂功)을 전수받았으나 그보단 은신술과 투술(投術)에 능한 이들이었다.
대규모 전투 시 벽력탄을 멀리 던져서 적의 심장부를 노리는 것이 그들의 양성 목적이었다.
하물며 지금 그들은 벽력탄도 아닌 진천뢰를 던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폭발 범위를 생각하면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그들이 던지는 것이 옳았다.
틱! 틱! 틱!
진천뢰는 화기이기에 심기에 불을 붙여야 폭발한다.
허나 폭마대는 삼매진화를 일으킬 수 있는 수준의 고수가 아닌 이상 부싯돌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폭마대원 중 한 명이 진천뢰에 불을 붙인 후 사천성도의 문을 향해 던졌다.
정확히는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슈웅!
“…컥!”
콰쾅! 쾅! 쾅!
“으아악!!”
“폭발이다! 모두 정신 차려라!”
진천뢰는 사천성도의 문에 도달하지 못했다.
애초 던지지도 못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의해 폭마대원이 사살되었기 때문이다.
순간 쥐고 있던 진천뢰가 바닥에 떨어졌고, 그와 일대를 폭사시켰다.
그 폭발은 기습을 준비하던 폭마대를 위시한 사천정벌군만 아니라 사천당가를 필두로 한 성도의 무림인들을 크게 놀라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젠장! 성벽에 궁수가 숨겨져 있다.”
“놈들! 눈치채고 있었구나!”
화기를 앞세운 기습은 사천당가 역시 눈치챘기에 이미 성벽에는 그간 훈련시켜둔 궁수들을 배치했다.
무공을 익힌 무인들답게 빠르게 궁술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물론 백발백중의 명중률이나 고도의 궁술을 단기간에 익히는 것은 불가능했다.
허나 십 장 이내라면 상당한 명중률을 자랑했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들의 양성 목적은 벽력미군의 화기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폭마대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다시 진천뢰에 불을 붙였다.
“포기하지 말고 임무를 수행… 컥!”
쾅! 콰쾅!
여기저기서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폭마대는 화살에 맞아죽거나 주저하다가 진천뢰가 폭발해서 죽고 말았다.
허나 모두가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나 혼자… 큭! 죽지 않는…다!”
화살을 맞으면서도 진천뢰를 던진 폭마대원이 있었다.
진천뢰를 성벽 안으로 날려 보내지는 못했으나 성벽까지 던질 수는 있었다.
콰쾅!
“커억!”
“으아악!”
진천뢰의 폭발에 직접 휘말린 것은 아니었지만 간접적인 충격에 의해서 성벽 위에서 시위를 당기던 궁수들과 성벽을 지키던 무림인들이 성벽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 높이도 상당한데 충격에 의해서 추락했으니 목숨을 건지기는 어려웠다.
설사 목숨을 건진다고 해도 반신불수를 면치 못한다.
“궁수를 양성해봤자 그 수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해서 진천뢰를 던져라!”
“벽력탄을 나눠주어라!”
활은 무시무시한 무기다.
전쟁에서 활의 존재감은 단연 으뜸이었다.
그렇기에 황실에서는 활을 개인적으로 소지하는 것을 금했다.
생존활동을 위한 사냥꾼들은 예외였으나 대량의 소지는 여전히 중죄에 해당된다.
궁수를 정식으로 양성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사해련의 진뢰궁수단은 그 존재 자체가 불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청해성 자체가 중원, 특히 황도에서 먼 변방이었고 사해련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모른 척할 뿐이었다.
명문정파인 사천당가에서 다수의 궁수를 양성했을 리가 없었다.
실제로 사천당가에서 양성한 궁수는 일백도 채 되지 않았다.
활의 힘을 극대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궁수들이 화망을 형성해야 한다.
수십의 궁수만으로는 전세에 큰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슝! 슈슝! 슝! 슝!
“도대체 얼마나 궁수를 준비한 거야!”
수십의 궁수 정도로는 성도의 성벽도 모두 담당하기 버겁다.
그런데 고작 수십여 명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화살이 쏟아졌다.
덕분에 폭마대는 성공하지 못한 채 전멸했다.
게다가 진천뢰 역시 공중에서 화살을 맞고 성벽에 닿지 못한 채 떨어지고 말았다.
동이 트고 새벽이 되자 청해마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궁수의 수가 예상을 상회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미친! 노(弩)라니! 미친놈들이 노를 제작했단 말인가!”
노(쇠뇌)는 화살보다 멀리 쏘고,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서 만든 무기다.
노와 강노의 경우는 전략무기에 해당되었기에 활과는 그 처벌 자체가 다르다.
사해련조차 진뢰궁수단을 양성했지만, 노만큼은 보유하지 못했다. 그런데 사천당가는 그런 대명률을 어기고 노를 제작한 것이다.
이 일이 알려진다면 황실은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고, 사천당가는 큰 곤욕을 치러야 한다.
그럴 모를 리가 없음에도 사천당가는 비장의 무기로 노를 준비했다.
단기간에 궁수를 양성하는데 한계가 있었기에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대책으로 한 일이었다.
“찢어 죽여도 부족한 놈들이!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독과 암기에 의해 일천을 잃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화살에 의해서 이미 수백을 잃었고, 지금도 계속 죽어갔다.
이런 피해를 입고도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
“내가 길을 뚫겠다!”
“헉! 군단장님! 젠장! 모두 군단장님의 뒤를 따른다!”
반쯤 이성을 잃은 청해마왕은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승부를 보기 위해서 달려 나갔다.
그의 호신강기라면 그깟 화살쯤은 통하지 않는다.
다만 성벽에는 궁수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