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흠흠… 차라리 검신께 요청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이미 부상도 회복했다고 들었는데…….”
“검신께서 요청한다고 움직이겠는가. 본맹 소속도 아니시거늘…….”
“지금까지는 청을 들어주지 않았는가.”
“그야 전(前) 총군사께서 검신의 처조부셨으니까 그렇지.”
순간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작게 소곤거렸다고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중 고수 아닌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십절무왕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은 당연한 상황이었다.
“황산파 연 장문인께선 본 맹주가 못 미더우나 보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맹주님. 다, 다만 맹주님께서 직접 움직이실 필요가 있나 싶어서… 하, 하…….”
황산파 연 장문인의 변명에도 맹주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황산파가 위치한 황산은 안휘성에 존재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남궁세가와 친분이 두터웠다.
오대세가를 밀어내고 권력을 쥔 오대가문.
특히 모용세가의 십절무왕은 연 장문인의 말이 곱게 들리지 않았다.
“맹주라고 해서 총단만 지킬 수는 없는 법! 본 맹주가 직접 사해련주를 막아 보이겠소! 모두 도와주시겠소?”
“…물론입니다. 맹주님.”
좌중은 반신반의하며 맹주의 뜻을 존중해 주었다.
분명 팔왕과 오제의 격차는 크다.
게다가 십절무왕의 경우는 화경에 오른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무위 역시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일말의 희망을 버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 외에는 나설 화경고수도 없는 상황이니, 막을 명분도 없었다.
‘내가 뭘 익힌 지 모르니, 저딴 개소리를 할 수 있는 거겠지. 사망도제? 놈, 날 위한 제물이 되어라!’
그는 몰랐다. 누구도 모르게 황산파 연 장문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내렸다는 사실을.
* * *
“놈, 언제 사고 한번 칠 줄 알았지.”
권좌에 앉은 천사교주는 피식거렸다.
그런 그의 태도에 천사교 고수들은 오히려 당황했다.
그의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을 생각하면 자신보다 먼저 사고를 친 사해련주를 떠올리며 광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이 오히려 모두를 두렵게 만들었다.
“본좌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
“…….”
천사교주의 말에 좌중은 죽은 듯이 입을 다물었다. 입을 잘못 놀렸다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오래 기다려 줄 생각이 없는지 천사교주가 누군가를 지목했다.
“요도,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소장은 오직 주군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동영출신으로 천사교 오대교령까지 오른 요도의 대답에 천사교주는 피식거렸다.
그가 그런 대답을 할 줄 이미 예상했기 때문이다.
천사교주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향했다.
“요후, 그대는?”
“…본녀의 생각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교주님의 뜻대로…….”
“물론 그렇지. 그렇다고 해도 그대의 생각이라는 것이 있을 것 아닌가. 말해보게.”
요도와 함께 오대교령인 요후는 평소처럼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웬일인지 천사교주가 집요하게 물었다.
이쯤 되니 더 이상 에둘러서 말할 순 없었다.
그렇기에 환희요후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본녀의 소견으로는… 본교와 교주님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본교 역시 정벌에 나서야 한다?”
“예? …예, 교주님.”
이번 역시 천사교주는 환희요후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환희요후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내색할 수는 없었다.
‘저 늙은이가 오늘따라 왜 저러는 거야? 불편하게.’
그러한 환희요후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천사교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덕분에 천사교 대전 안은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천사교주는 그 정적을 깨며 나직하게 말했다.
“…본교 역시 대업을 준비하라!”
“소장 요도, 신명을 받드나이다.”
“노신…….”
“속하…….”
천사교주의 선언에 대전 안의 오대교령 및 호교사자 등 천사교 중추들은 그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그는 천사교의 독재자이자 절대자이기 때문이다.
대전의 한쪽에서 마지못해서 명을 받드는 자가 있었다.
‘안 되는데… 본교가 이대로 저년에게 놀아나면 안 되는데…….’
그의 시선이 환희요후에게 향하고 있었다. 천사교주 다음으로 힘과 영향력을 가진 오대교령의 일인인 환희요후를 노려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허나 그가 소교주인 사마염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모두 그렇게 알고 준비하라!”
“존명!”
천사교주의 축객령에 대전 안의 모든 이들이 물러났다.
감히 그의 명을 거역할 자는 없었다.
사마염 역시 대전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소교주는 남아라.”
“예… 교주님.”
그렇게 대전 안은 천사교주와 소교주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천사교주가 입을 열었다.
“내 명령에 불만이라도 있더냐?”
“아, 아닙니다. 감히 제가 교주님의 명에 어찌 불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천사교주는 모든 교도 위에 군림하는 존재. 혈육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마염도 그를 조부가 아닌 교주로서 대해야 했다. 그게 그들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긴. 네 생각을 말해보거라.”
“…제 좁은 소견으로는…….”
천사교주의 종용에 사마염은 용기를 내기로 했다.
이대로 이용당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본교의 대업을 달성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중요하지만?”
꿀꺽.
용기를 내고 있음에도 사마염은 두려움을 완전히 떨칠 수 없었다.
오만한 사마염도 천사교주 앞에서만큼은 겸손(?)해졌다.
천사교주는 혈육의 정에 연연하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일에 배후가 있는 듯싶습니다. 자칫 이용…만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명령을 재고하심이… 어떠실지…….”
“배후라… 네 생각에는 누가 배후 같더냐?”
사마염은 대답하는 와중에도 천사교주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떠듬거렸다.
혹시 그가 불쾌하게 여길 것을 우려했다.
다행히 천사교주는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사마염은 안도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견으로는 사해련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환희요후…가 그의 지시를 받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환희요후라… 그게 다냐?”
“예?”
“그게 다냐고 물었다?”
사마염은 천사교주의 의중을 알 수 없기에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럼에도 그의 의중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런 사마염을 보며 천사교주가 피식거렸다.
“네 말이 틀리지는 않다. 환희요후가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있고, 사해련주와 연관이 있으니까. 허나 그만이 아니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천사교주의 말에 사마염은 깜짝 놀랐다.
이렇다고 할 증거가 없었기에 의심만 하고 있는 자신과 달리 조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환희요후를 놔두었다는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성격이라면 결코 살려둘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신다면서 어찌…….”
“왜 아직까지 살려두었냐고? 그건 때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젠 정리할 때가 되었지.”
순간 천사교주의 눈에서 사이한 기운이 번들거렸다.
살기나 광기를 넘어선 정체를 할 수 없는 사이한 기운이었다.
“네가 한번 정리해보겠느냐.”
“제, 제가 말입니까.”
사마염은 깜짝 놀랐다.
자신에게 이러한 중책을 맡길 줄은 상상도 못했다.
소교주이며 초절정고수라고 하지만 천사교 내에서 그의 권력은 오대교령만 못하기 때문이다.
“왜? 못하겠느냐.”
“그러한 중책을 맡겨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만…….”
“네 힘만으로는 버겁겠지. …사도(死刀), 괴검(怪劍) 그리고 흉마(凶魔)를 붙여주마.”
“흐음… 흉마도 말입니까.”
별호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사마염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사도, 괴검, 흉마.
천사교 호교사자 중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들로, 오대교령에는 조금 떨어지지만 초절정고수들이었다.
그들과 오대교령의 차이는 무공수위와 독자적인 세력이 있느냐 정도였다.
사도와 괴검은 호교사자 중 상위에 속하지만, 오대교령에 비해 이름값이 많이 가볍다.
그러나 흉마는 다르다. 직책은 호교사자였지만, 그 이름값은 오대교령을 능가한다.
한때 최강의 호교사자라고 불렸던 맹검조차 흉마와 비교하면 한수 접어줘야 할 정도였다.
“왜? 부담스럽더냐. 흉마도 제어하지 못한다면 본 교주의 뒤를 이을 자격이 없다.”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나… 맡겨주신다면… 제가 감당해보겠습니다.”
천사교주는 사마염의 말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정도 배짱도 없었다면 소교주 자리도 차지할 자격이 없다.
하지만 사마염이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흉마는 그냥 호교사자가 아니었다. 한때는 그의 사숙이었다. 게다가 소교주 자리를 놓고 사마염의 부친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그를 죽일 정도로 흉포한 자였다.
손자인 사마염과 달리 천사교주의 총애를 받은 아들이었다. 그 자리에서 흉마가 천사교주의 손에 죽지 않은 것만 해도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인재인지 알 수 있었다.
허나 흉심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소교주 자리는커녕 오랜 시간 갇혀 있던 인물이었다.
사실 사마염이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천사교주는 흉마를 사마염에게 내주었다.
오대교령을 죽일 수 있는 자가 흉마뿐이기 때문이다.
“네게 맡겨보마. 한번 쥐새끼들을 정리해보거라.”
“소교주 사마염, 신명을 받드나이다!”
* * *
“커억!”
“으아악!!”
청해마왕을 필두로 한 사해련의 사천정벌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이미 몇 차례나 사해련에게 농락당한 사천무림인들은 그들의 소식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검을 쥐었다.
그런 그들을 청해마왕은 가차 없이 처단했다.
그로 인해 사천정벌군이 지나간 길에는 피가 마르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 곧 청성산인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으음… 봉문한 청성까지 무너트릴 필요는 없지 않소?”
감숙을 정벌할 때, 공동파와 난주사가만 무너트린 것처럼 사천 역시 사천삼세와 몇몇 문파만 무너트리면 된다.
만약 사천무림인들이 먼저 달려들지 않았다면 이렇게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천정벌군의 군단장을 맡고 있으나 청해마왕은 청성파를 멸문시키는 것이 꺼려졌다.
일전에 한 대라신군과의 약속 때문이다.
그걸 알기에 흑천마옹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색불과 고수 오천을 붙여줄 테니, 마옹께서 아미를 무너트려주시겠소? 본인이 당가를 맡겠소.”
“군단장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파죽지세로 밀어붙인 덕분에 벌써 사천의 중부까지 도달한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청해마왕은 사천정벌군은 둘로 나누었다.
그는 이미 사해련주가 감숙을 정리하고 섬서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미 아미나 당가는 정기가 많이 훼손되어서 사천정벌군이 모두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사천정벌군을 절반으로 나누어도 그 군세가 오천이나 된다.
아미와 당가. 그리고 그들을 돕기 위해 움직일 사천무림인들을 계산해도 충분히 짓밟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청해마왕은 병력을 나누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