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장문인은 어떤가?”
“내상이 깊긴 하나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적성 사숙.”
백의무제가 혈마신을 상대하고 있을 때, 한 무리가 다가왔다. 그들은 백의무제와 함께 형주 건원장에서 출발한 태극검성 적성진인과 무림맹 멸사대였다.
인근까지 오던 백의무제가 돌연히 사라졌다.
화경고수답게 제법 거리가 있음에도 혈마신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적성진인과 멸사대는 당황했으나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의 이유를 눈치채고는 곧바로 따라왔다.
허나 그들과 백의무제의 격차를 알려주듯 그가 혈마신과 격돌한 후에나 도착할 수 있었다.
“으음… 그나마 다행이구나.”
적성진인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비록 자신을 포함한 무당삼검성이 생존했다고 해도 자신들은 지는 별이었다. 이제 무당은 현원진인과 무당칠자 등이 이끌어가야 한다.
게다가 현원진인은 사적으로 적성진인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러니 더욱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못난 사부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구나.’
적성진인은 태극검선의 제자로서 그의 그림자만 보며 살아왔기에 자신의 제자인 현원진인에게 큰 애정을 쏟지 못했다.
너무도 큰 사부의 그림자만 쫓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제자는 대견하게도 스스로의 능력으로 무당의 당대 장문인이 되었다.
내색하지 않았으나 대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 내 이런 옹졸함이 오히려 날 옥죄는 것은 아닐까… 무랑수불…….’
적성진인은 스스로의 아집을 깨닫게 되었다.
그로 인해 그를 가로막고 있던 벽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혈마신과 백의무제의 격돌은 절정에 도달하고 있었다.
쾅! 쾅!
혈마신과 백의무제 사이에 수십 합이 오갔다.
‘공심대사가 놓칠 만하구나.’
건원장으로 날아온 전서구에는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으나 이곳까지 오는 도중 개방의 협조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물이 호북성으로 남하하게 된 것은 소림의 반야신승과 충돌했기 때문이란 사실이었다.
반야신승이 마물을 막아내긴 했으나 마물의 도주를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반야신승 역시 내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비록 팔왕이 화경고수들 중 하위에 속하지만, 반야신승은 소림의 전대 장문인이었다.
소림무학은 마물과 천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소림무학을 익힌 반야신승이 놓쳤을 뿐만 아니라 내상까지 입을 정도라면 보통 마물이 아니란 뜻이었다.
‘허나 여기까지다!’
마물은 분명 강력했다. 금강불괴의 육신과 절세마공을 연상케 하는 마기 그리고 괴물과 같은 회복력.
마물임을 충분히 입증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마물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는 느낌이 아니었다.
게다가 반야신승과의 충돌로 마물 역시 온전하지는 못한 듯싶었다.
백의무제의 느낌은 옳았다. 주인의 부재로 폭주하면서 혈마신은 본능에 의존한 살육만 가능하게 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괴물 같은 회복력 역시 만족스러운 흡혈을 하지 못한 탓에 조금씩 더뎌지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오제의 일인인 백의무제를 상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만 사라져라! 무한신장(無限神掌)!
크아앙!!
백의무제의 손이 수십 수백으로 분열되어서 혈마신의 전신을 노렸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혈마신은 혈마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려서 전신을 보호했다.
백의무제의 무한신장은 철옹성처럼 단단한 혈마신의 혈마기를 수없이 때렸다. 혈마기는 금이 가고 부서지긴 했으나 백의무제의 무한신장을 버텨내고 있었다.
허나 백의무제 역시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무한지검(無限指劍)!”
무한신장을 막아냈다고 하지만 혈마신의 혈마기는 이미 약해진 상황이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백의무제는 무한지검을 펼쳤다.
무한지검은 지공(指功)인 동시에 강기공이기도 했다.
백무강이 백의장제(白衣掌帝)가 아닌 백의무제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서걱!
백의무제의 무한지검은 아직 회복하지 못한 혈마기를 베는 것은 물론 금강불괴지신인 혈마신의 육신마저 베었다.
과연 오제다운 신위였다.
허나 백의무제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상대가 화경고수가 아닌 화경급 마물이란 사실을 잊고 혈마신을 벤 순간 방심한 것이었다.
“이제 그만… 이런!”
콰쾅!!
무한지검에 의해 베인 순간 혈마신의 혈마기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 폭발이 얼마나 가공한지 일대를 모조리 집어 삼켰다.
“헉!!”
“모, 모두 물러나라!!”
제법 멀리 물러나 있던 무당과 제갈세가의 고수들은 기겁하며 물러났으나, 안타깝게도 일부는 휘말릴 정도로 그 여파는 너무도 강력하고 강대했다. 그런 가공한 폭발이었으니 지척에 있던 백의무제라도 무사할 순 없었다.
“커억…! 우웩!!”
백의무제를 상징하던 백의는 이미 폭발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전신 피부는 화상과 혈흔으로 붉어져 있었다. 결정적으로 외상만큼이나 내상 역시 심각한지 피까지 토하고 있었다.
적성진인은 무당파 제자들의 상황을 살피던 중 피투성이가 된 백의무제를 발견하곤 깜짝 놀라서 달려갔다.
“이, 이런! 무제 님!”
“으…으…….”
한참 피를 토하던 백의무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적성진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섬서와 호북을 공포로 물들였던 마물, 혈마신은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허나 그 대가는 너무도 컸다.
무당과 제갈세가의 수많은 고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그 이상으로 많은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무엇보다 백의무제 백무강 역시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 * *
“저 때문에 장원이 사라졌군요. 죄송합니다. 장원은 제가 책임지고 다시 지어드리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검신 님.”
건원장을 휩쓸어버렸던 기의 폭풍이 사라진 후 검신 이현성은 너무도 멀쩡한 모습으로 깨어났다. 지금까지 쓰러져 있었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가 의식을 잃은 사이에 많은 시간이 흘렀다. 제갈윤호를 통해서 그간의 사정을 들은 이현성은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자신에 의해서 건원장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아닙니다. 장주님. 당연히 제가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암월 호법.”
“…예, 주군.”
이현성의 부름에 모습을 드러낸 암월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이현성은 어리둥절했다.
“암월 호법, 왜 그러는…….”
“죄송합니다. 주군! 죽여주십시오!”
죄를 청하는 암월을 보며 이현성은 당황했다.
허나 죄를 청하는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그의 뒤에 귀림의 호위들 역시 부복한 채 죄를 청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이현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왜 이러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요… 때문인가 보군.”
“저는 더 이상 주군의 호법으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죽여주십시오!”
“죽여주십시오!”
이현성이 쓰러진 이후 암월과 귀림의 호위들은 지척에서 그를 암중호위했다. 그러나 딱 한 번 자리를 비웠다.
의봉 백인혜가 방문했을 때였다. 검신의 치료를 위한 대법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접근을 차단당했다.
암월은 고민했으나 주군의 목숨이 달린 일이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천요인 줄도 모르고.
뒤늦게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암월은 자괴감에 빠지고 말았다.
“소, 손서 그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네. 설마 의봉이 천요일 줄은… 나 역시 몰랐으니…….”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는 저의 호법입니다.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처조부님.”
제갈윤호는 암월을 변호했다. 그를 이현성의 곁에서 벗어나게 설득한 사람이 바로 제갈윤호였다.
허나 이현성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한 그를 보며 제갈윤호는 다시 한번 당황했다.
그런 제갈윤호를 뒤로 한 채 암월과 귀림의 호위들을 바라봤다. 그리곤 나직하게 말했다.
“호법과 호위로서 잘못을 인정하나.”
“물론입니다. 주군.”
“인정합니다. 장주님.”
그들의 얼굴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이현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죄가 뭐지.”
“주군의 곁을 지키지 못해서 주군을 위험하게…….”
“아니, 그대들의 잘못은 내게 자네들의 죽음을 청한 것일세.”
“예?”
“호법과 호위들은 나와 본장을 지키기 위한 존재들일세. 그러니 그대들의 죽음은 나와 본장을 위협하는 적과 싸울 때만 허용되네. 그런데 감히 내 앞에서 죽음을 청해!”
이현성의 호통에 좌중은 움찔했다.
상황이 이상해지는 것도 못 느낄 정도로 이현성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로 인해 모두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두 번 다시 내게 죽여 달라는 어리석은 청은 하지 말게.”
“허, 허나…….”
“암월 호법… 그대는 이제 날 주군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아, 아닙니다. 주군.”
단호한 그의 반응에 암월은 더 이상 죄를 청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현성의 말을 들은 금검대 및 백호당 고수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사파처럼 작은 실수에도 가혹한 처벌을 내리진 않으나 명문일수록 상벌에 철저한 법이었다.
그래야 조직이 잘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호법과 호위들의 실수로 조직의 수장의 목숨이 위험했다. 당연히 강도 높은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
그럼에도 이현성은 어떤 처벌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저들이 처벌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상식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으니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암월 호법.”
“예, 주군.”
“건원장주께 충분히 보상할 수 있게, 돈을 넉넉히 찾아오게.”
“…존명!”
이현성은 자신의 신패를 암월에게 건넸다.
아직 호북성에는 이가장의 중앙상단의 지부가 없었다.
그렇다고 돈을 융통 못 할 것도 없었다.
이제 중앙상단은 하남만 아니라 타성에서도 인정하는 거대상단으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검신의 신패는 모든 전장에서도 융통이 가능했다.
게다가 이가장의 재정을 보관하는 석가장의 중원전장은 어디든 있었기에 자금을 융통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허허… 과연 검신이십니다.”
“경하드립니다. 진인. 그리고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현성은 적도진인이 화경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초절정지경과 화경은 그 기운부터 다르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빈도는 이미 검신께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당연한 일로 감사의 인사를 받으니 민망할 뿐입니다. 무량수불…….”
그는 이현성의 무학을 본 덕분에 화경에 오를 수 있었다. 작게는 적도진인 개인의 영광이오, 크게는 무당의 축복이었다.
그렇기에 이현성의 목숨을 구했다고 해서 마냥 감사의 인사를 받을 수가 없었다. 허나 목숨을 건진 이현성의 입장에서는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아닙니다. 진인 덕분에… 음?”
“그, 급보입니다!”
잔류하고 있던 제갈세가의 비선인 무영대원이 크게 당황하며 나타났다.
제갈윤호는 태상가주로서 미간을 찌푸렸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