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하지만 그조차 혈마신에겐 통하지 않았다.
“큭! 사형께서만 계셨어도!”
매화검절만 아니라 화산파 고수들은 자하검제의 빈자리를 더욱 크게 느꼈다.
하물며 여식인 화옥령은 얼마나 상심이 크겠는가.
크아아앙!!
화산과 종남파 고수들의 공격이 아예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화가 난 혈마신은 포효하며 분노를 터트렸다.
순간 검붉은 기운이 혈마신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성수의가를 몰살시켰던 바로 그 기운이었다.
그 기세만으로도 화산과 종남파 고수들은 피부가 따끔거렸다. 동시에 그들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허나 혈마신은 그들이 대처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퍽! 퍼퍽! 퍽! 퍽!
“커억!”
“으아악!!”
“괴…물…….”
한 명 한 명이 정예고수인 매화검수와 천하삼십육검이건만 마구 휘두르는 혈마신의 주먹에 무너지고 말았다.
검이든 두개골이든 가리지 않고 그의 주먹이 닿은 것은 뭐든지 파괴했다.
게다가 그 움직임은 맹수보다 더 기묘해서 도망조차 칠 수 없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맹수의 먹잇감에 불과한 신세가 된 셈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렇게 패색이 짙어진 가운데 유일하게 포기하지 않은 자가 있었다.
“한월…단천(寒月斷天)!”
극한으로 끌어올린 냉천한월공으로 펼친 한월검강이 길게 뻗어갔다. 한천마녀라고 불린 화옥령의 모든 한(恨)을 담은 일격이었다.
서걱!
무언가 베이는 소리가 들렸다.
허나 베인 것은 혈마신이 아니었다.
그녀의 한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혈마신이 너무 강해서인지 한월단천이 벤 것은 검붉은 기운뿐이었다.
“쿨럭… 우웩!”
“오, 옥령 사질!”
무리하게 내공을 끌어올린 탓인지 내상을 입은 화옥령의 입에서 피가 분출했다.
설상가상으로 혈마신이 그녀를 향해 무지막지한 주먹을 휘둘렀다. 원극진인의 외침에 화옥령은 자신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혈마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혈마신의 권격을 피할 힘이 없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원수도 갚지 못하고, 이 부족한 여식… 아버지를 따를 것 같아요.’
화옥령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원통하지만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커억!”
혈마신의 권격에 머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를 보며 매화검수들은 절규했다.
“워, 원극 사숙조님!”
혈마신의 권격에 절명한 자는 화옥령이 아니었다.
그녀를 대신해서 매화검절 원극진인이 혈마신의 권격을 대신 감당했다.
말이 감당한 것이지, 혈마신의 일권에 절명하고 말았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화옥령의 위험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향해 혈마신이 다른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신권(神拳)!”
“크아악!”
어디선가 날아온 권강에 화옥령을 위협하던 혈마신이 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고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승을 향해 종남의 무극검군이 외쳤다.
“…공심대사님!”
“와! 반야신승(般若神僧)께서 오셨다!!”
고승의 정체는 바로 반야신승 공심대사였다.
소림삼신승의 수좌이자 전대 소림 장문인.
그리고 팔왕에 속하는 화경고수이기도 했다.
그의 등장에 절망에 빠졌던 화산과 종남 고수들은 환호하며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허나 정작 공심대사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아미타불…….”
“크아앙!!”
나가 떨어졌던 혈마신은 너무도 멀쩡한 모습으로 일어나 공심대사를 향해서 으르렁거렸다.
허나 쉽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혈마신도 본능적으로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공심대사가 익힌 소림무학은 불심을 바탕으로 하기에 항마(降魔)의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반인반시(半人半屍)의 상태인 혈마신에게는 천적과 같았다. 그럼에도 도망치지 않고 싸우려 한다는 것은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본능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를 공심대사 역시 느꼈는지 불호를 읊으며 반야신공을 끌어올렸다.
반야신공은 소림의 수많은 무학 중에서도 항마력으로 세손가락에 꼽히는 신공이었다.
그런 반야신공에 대적하듯 혈마신의 전신에서 검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허나 지금까지와는 달리 지독한 혈향이 풍겨왔다.
혈마신 역시 혈마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탓이었다.
“살계를 열어서 만인을 구한다면 어찌 주저하리오! 반야금강장(般若金剛掌)!”
크아앙!!
반야신공으로 펼치는 반야금강장은 위력도 위력이지만, 마공과 사술에 천적이었다.
허나 혈마신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주먹에 검붉은 고리가 형성되었다. 혈마기로 발현한 권환이었다. 지금까지 본능적인 전투를 펼친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콰쾅!!
화경고수인 반야신승 공심대사와 화경급 마물인 혈마신의 격돌은 지금까지와는 격이 달랐다. 특히 강환을 기반으로 둔 격돌인 만큼 여파가 무시무시했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정신을 차렸을 땐 혈마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가사(袈裟)가 갈기갈기 찢긴 공심대사만 서 있을 뿐이었다.
“오! 공심대… 이런!”
“아미…타불……! 쿨럭!”
불호를 읊던 공심대사가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이를 본 무극검군이 급히 다가왔다.
“괘, 괜찮으십니까, 공심대사님.”
“아미타불…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를 어찌해야 할지…….”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괴물이 살아 있단 말씀이십니까!”
무극검군의 물음에 공심대사는 대답할 힘도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본 무극검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거대한 폭발에도 살아남았다니 도대체 얼마나 괴물이란 말인가.
게다가 무려 반야신승 공심대사를 상대로 도망칠 정도라면 애초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단 뜻이다.
공심대사는 혈마신을 추살해야 하나 내상이 깊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아미타불… 공심 사백님. 괜찮습니까.”
“…사대금강은 개방분타로 가서 백의무제께 연락하거라. 마물이 호북으로 향하고 있다고…….”
공심대사의 곁에 오남일녀가 다가왔다.
그들 중 넷은 중년의 승려로 소림의 사대금강이었다.
그리고 일남일녀는 불문에 적을 둔 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자하검제의 등선 사실을 알게 된 공심대사는 오랜만에 산문을 나섰다. 성승이 태극검선과 고우였다면 공심대사는 자하검제와 고우였다.
그런 그를 호위하기 위해서 현 장문인 범천대사는 사대금강을 동행시켰다.
공심대사와 사대금강이 삼문협을 지나고 있을 때, 일남일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여산혈겁의 생존자임을 밝혔다.
그리고 마물에 대해서 알렸다.
사대금강은 그들을 의심했으나 공심대사는 달랐다.
그들의 말을 믿고 서둘러 움직였다.
만약 그들 일남일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서두르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혈마신을 제압하기 위해서 움직였던 화산과 종남고수들은 아마도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소승이 다녀올 테니, 사형들께서 사백님을 보좌해주십시오.”
“부탁하네. 사제.”
사대금강의 일인이 공심대사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서 떠났다.
안타깝게도 마물은 공심대사를 피해서 남하하고 말았다. 호북성을 향해서.
“아미타불…! 부디 제때 백의무제께 연락이 닿아야 할 텐데…….”
검신 부활
“이런!”
형주 건원장에 한 마리의 매(鷹)가 날아들었다.
평범한 매가 아니었다. 훈련을 받은 전서응(傳書鷹)이었다.
전서응의 다리에는 작은 통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통 안에는 짧지만 많은 것이 담긴 글이 적혀 있었다.
[마물 출현, 호북행]
쪽지는 신산(神算)에게 전해졌고, 다시 백의무제(白衣武帝)에게 전해졌다.
무당이나 제갈세가가 아닌 이곳 건원장에 보낸 거라면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마물이란 뜻이며, 백의무제에게 전하는 쪽지란 뜻이었다.
“이게 사실이란 말인가!”
“전서응은 분명 개방에서 보내온 겁니다. 무제 님.”
정확히는 공심대사의 지시로 개방에서 보내온 쪽지였다.
허나 쪽지에 적을 수 있는 내용이 한정적이었기에 그러한 부분까지 적을 수는 없었다.
제갈윤호의 말에 백의무제 백무강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검신이 깨어날 때까지 곁을 지킬 생각이었으나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에게 지급으로 연락할 정도라면 결코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닐 테니까.
“내 다녀올 테니, 신산 그대가 검신의 곁에 있어주게.”
“걱정 마십시오.”
결국 백의무제는 건원장을 떠났다.
그런 그의 곁을 무당의 적성진인과 무림맹의 멸사대가 따랐다.
대신 건원장의 경비는 제갈세가 그리고 백호당이 맡았다.
“제때 도착하셔야 할 텐데…….”
안타깝게도 그들이 출발한 곳은 호북의 남부인 형주였다.
그에 반해 혈마신은 호북의 북부에 도착해서 멈추었던 혈겁을 다시 일으키고 있었다.
단순히 주입된 주인의 마지막 명령을 수행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반야신승에게 입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함이었다.
혈마신에게 인간의 피는 치료제이자 보약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혈겁을 수행했다.
그 시각 개방의 연락을 받은 무당파와 제갈세가의 고수들이 혈마신의 혈겁을 막기 위해서 움직였다.
* * *
“마물과 직접적인 충돌은 불허한다! 백성들의 피난을 우선으로 하라!”
“제자들이 장문인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무당파 장문인인 태극혜검 현원진인은 물론 원로인 무당삼검성 등 무당파 고수들 대부분이 천웅방을 막기 위해서 남하했다.
천웅방을 막지 못한다면 본산 역시 무사하지 못하기에 전력을 남겨둘 상황이 아니었다.
다행히 검신의 활약으로 큰 피해 없이 천웅방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천웅방주를 막는 과정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쓰러진 상황이었다.
무당파 고수들은 그대로 잔류해서 검신을 호위했다.
그러던 중 백의무제와 무림맹 고수들이 도착했다.
이에 현원진인은 검신의 호위를 무림맹 고수들에게 맡기고 무당파로 복귀했다.
전시에는 어쩔 수 없었으나 천웅방이 물러난 이상 본산을 너무 오래 비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당삼검성이 잔류한 상황이었기에 장로 몇몇과 무당파 일대제자 일부 역시 잔류시켰다.
정확히는 폐관수련 중인 적도진인의 호법을 서기 위함이었다.
그 외의 무당파 본산제자들은 장문인인 현원진인과 함께 본산으로 복귀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그렇기에 이렇게 마물로 인한 혈겁을 미리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저희가 돕겠습니다. 장문인.”
“아… 오셨습니까. 가주님.”
개방으로부터 마물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무당파만이 아니었다.
호북무림을 대표하는 무림세가인 제갈세가 역시 연락을 받았다.
제갈세가는 무당파와 달리 많은 고수를 형주 건원장에 잔류시킨 상황이었다.
태상가주인 신산 제갈윤호와 사위인 검신을 호위하기 위해서 제갈세가 제일의 무력대인 금검대는 물론 천지신검 제갈인겸을 위시한 장로들을 그대로 잔류시켰다.
그 외의 고수들은 본가로 복귀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제갈세가 본가에서 동원할 수 있는 고수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허나 고수가 적은 것이지, 무사의 수는 적지 않았다.
게다가 제갈세가의 진정한 힘은 무력이 아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