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게다가 귀식대법으로 호흡까지 멈추었으니 화경고수의 기감에도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허나 자하검제의 기감만 속인다고 그를 암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경고수의 호신강기는 초절정고수의 호신강기와는 격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령왕은 자하검제의 심장을 취할 수 있었다.
그건 그의 손, 정확히는 그의 손에 껴진 장갑의 역할이 컸다.
유령수(幽靈手).
유령곡을 대표하는 무공의 명칭이면서, 동시에 마지막 유령삼보인 장갑의 이름이었다.
호신강기조차 파해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기물이었다.
덕분에 자하검제가 본능적으로 펼친 호신강기조차 파쇄할 수 있었다.
“그렇군. 부천주의 명령이었군.”
“맞습니…컥!”
혈천십삼세의 하나로 호법의 직위를 가진 유령왕은 혈뢰검마의 아래가 아니었다.
허나 그가 화경고수란 사실이 밝혀진 후 유령왕은 혈뢰검마에게 존대했다.
고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그의 처세술이었다.
그런 그답지 않게 너무도 큰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아무리 부천주의 명령이었다고 하지만 혈뢰검마의 계획을 틀어버렸다.
그의 검이 유령왕의 심장을 관통했다.
아무리 심기가 불편해도 설마 그가 자신을 해할 줄은 상상도 못한 유령왕은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미…친…새…….”
“내 장인을 해하다니… 감히!”
서걱! 서걱!
유령왕의 심장을 관통했던 혈뢰검마의 검이 번쩍이더니 그를 조각조각 내버렸다.
아무리 세력이 위축되었다고 하지만 삼대살종의 하나인 유령곡이었다.
허나 그런 유령곡도 오늘 사라지게 되었다.
유령왕이 사라진 이상 유령곡은 더 이상 삼대살종이 아니었다.
그렇게 암천 사대호법의 후예인 살백에 이어서 유령의 맥까지 끊기게 되었다.
혈뢰검마는 죽어가는 자하검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비록 상부의 명령이었으나… 이런 결과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그의 고해에 자하검제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결국 검을 거두었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의 시신 앞에 혈뢰검마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 역시 인간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의 부친을 죽일 수는 없기에 잔혹하지만, 그녀를 인질로 삼아 자하검제의 팔을 요구했다.
이십여 년 전 역시 화옥령을 베었으나, 그것은 오히려 그녀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자신이 그녀를 베지 않았다면 싹을 남기지 않기 위해 혈천에서 화옥령을 제거하려고 했을 테니까.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더라도 살리고 싶었다.
허나 그게 발목을 잡혀서 이런 사달을 낼 줄은 그 역시 몰랐다.
“미안하오… 이 심장을 언젠가… 그대에게 내놓으리다. 날… 원망하시오. 비겁한 나를…….”
혈뢰검마는 화옥령에게 가한 점혈법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부친의 죽음을 목도한 순간 너무 충격이 커서 의식을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부천주 아니, 사망도제… 네놈은 내 손에 죽는다. 그분의 뜻에 반하더라도!”
* * *
화산에서 비극이 일어난 시각, 화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여산에서도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흐흐흐… 잘도 흡수하는구나. 빨리 다 흡수하고 깨어나거라!”
백인혜가 보은단의 정예만 이끌고 여산을 떠난지 며칠이 지났다.
백우종은 환자들의 진료를 다른 의원들에게 떠넘기고 자신의 거처에 틀어박혔다.
평생 환자들의 진료만 해왔으니 드디어 그가 탈이 났다고 생각했는지, 성수의가의 의원들은 물론 환자들 역시 그를 걱정했다.
그런 그들의 걱정과 달리 백우종은 무척이나 건강했다.
그가 자신의 거처에 틀어박힌 것은 건강문제가 아니라 혈마신의 제련 때문이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혈마신이 완성되는 날이었다.
혈마신을 담아두었던 관에는 항상 피가 가득했다.
피는 혈마신의 전신 모공을 통해서 흡수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현재 관의 담긴 피만 모두 흡수하면 제련은 끝이 난다.
“오! 드, 드디어!”
가득했던 관의 피가 드디어 바닥이 났다.
그 순간 혈마신의 눈이 떠졌다.
이때가 가장 중요했다.
제련된 혈마신에게 주인의 존재를 각인시켜야 하는 순간이었다.
주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첫 번째였다.
번쩍.
혈마신의 눈에서 혈광이 번쩍였다.
첫 번째 각인이 성공했다는 증거였다.
“내가 바로 너의 주인이다! 부복하라! 나의 종이여!”
목소리를 각인시키는 것이 두 번째였다.
관 속에 누워 있던 혈마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백우종의 앞에 부복했다.
이로써 두 번째 각인까지 성공했다.
이를 보며 기분이 좋아진 백우종이 파안대소했다.
“하하하!! 성공이다!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혈마신을 완성했다!!”
이제 마지막 각인을 끝내면 혈마신은 백우종만의 비밀병기가 된다.
헛된 꿈을 꾸고 있던 천요후 백인혜가 아닌 백우종의 명령만 받게 된다는 뜻이었다.
마지막 각인은 바로.
푸욱!
“컥! 누, 누구…….”
“그분의 명이다. 네가 딴 짓을 하면 목숨을 취하라는…….”
“개…같은… 죽여… 모든 것을…….”
백우종은 몰랐다.
백인혜가 떠나기 전에 자신에게 감시를 붙여두었단 사실을.
사실 백우종도 나름 심후한 내공을 가지고 있었다.
전문적으로 수련을 하지 않았기에 무공고수로서는 반쪽뿐이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당할 자가 아니었다.
허나 백우종은 너무도 쉽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를 감시하고 있던 자가 바로 맹검 위지천이었다.
초절정고수인 그의 암습을 백우종이 막아낸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의술이 신의 경지에 오른 성수라지만, 죽어가는 제 목숨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성수 백우종은 너무도 허무하게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때였다.
위지천의 검을 타고 흘러내린 백우종의 피가 혈마신의 피부에 닿았다.
“크아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복하고 있던 혈마신이 포효를 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각인은 바로 주인의 피를 흡수하는 것이다.
이로써 혈마신은 백우종의 종이 되었다.
문제는 이제 막 완성된 혈마신의 주인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혈마신을 안정시켜야 할 주인이 사라지면서 혈마신은 혼란을 겪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주인의 처음이자 마지막 명령은 모든 것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최악의 마물에게 최악의 명령이 주입된 순간이었다.
결국 혈마신은 폭주하고 말았다.
쾅!
“컥!”
폭주한 혈마신이 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위지천이 나가 떨어졌다.
맹검 위지천은 강했다. 하지만 혈마신은 화경고수에 비견되는 최악의 마물이었다.
게다가 도검불침을 넘어서 금강불괴지체였기에 혈마신은 육신 그 자체가 무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마신의 일격에 쓰러질 위지천이 아니었다.
그 역시 폭주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천요후는 위지천에게 심은 천요기의 씨앗을 강화했다.
허나 그런 그녀의 수고가 허무하게 위지천은 다시 폭주하고 말았다.
퍽! 퍼퍽! 퍽! 퍽!
“크르응~”
위지천은 초절정고수다운 무위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혈마신에게 치명상은커녕 피해를 주기도 어렵다. 오히려 혈마신의 신경을 긁을 뿐이었다.
실제로 위지천의 검격에 혈마신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지금까지는 몸 풀기에 불과했다는 듯 혈마신에게서 강렬하고 섬뜩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폭주한 위지천이 움찔할 정도로 가공했다.
허나 위지천은 오히려 검강을 발현해서 혈마신에게 달려들었다.
혈마신도 본능적으로 검강이 위험하다고 느꼈는지 검붉은 기운을 뿜어냈다.
콰쾅!!
혈마신이 발현한 검붉은 기운은 강했다.
위지천의 검강을 가볍게 파쇄하고 그를 날려버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가 날아간 방향이 지상으로 향하는 통로였다.
그 시각, 지상에서는 갑작스러운 지진과 너무도 섬뜩한 살기에 소란이 일어났다.
“성수 님! 괜찮으십니까!”
“실례하겠습니다!”
혈마신이 제련되고 있는 장소는 백우종의 거처와 연결된 지하공동이었다.
그렇기에 평소에도 사람들의 시선 걱정 없이 오갈 수 있었다.
혈마신의 가공한 살기가 백우종의 거처를 통해서 외부까지 전해졌다. 그만큼 인외(人外)급의 살기였다.
보은단 고수들은 살기의 진원지를 추격하다가 백우종의 거처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들이 찾는 백우종은 이미 고혼이 되었으니 돌아오는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백우종의 거처에 들이닥친 보은단의 고수들은 비밀통로를 발견하고 말았다.
“이곳에 왜 이런 통로가… 헉!”
“무슨 이런 일이!!”
비밀통로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놀랍게도 사람이었다. 그는 보은단 역시 아는 자였다.
보은단 소속은 아니지만 백인혜를 따르는 인물이었기에 모를 수 없었다.
“위지 대협 무슨… 헉!”
“뭐, 뭐야!”
의식을 잃고 쓰러진 위지천을 깨우려던 보은단 고수들은 기겁하고 말았다.
비밀통로에서 섬뜩한 살기와 함께 가공할 기운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쾅!!
“으아악!!”
크아아앙!!
통로 쪽에 있던 보은단 고수들은 무지막지한 충격에 비명과 함께 튕겨나갔다. 얼마나 강력한 충격이었는지 그들은 벽까지 뚫고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다른 보은단 고수들은 각자 무기를 뽑아서 정체불명의 괴한을 향해 겨누었다.
허나 괴한의 포효에 보은단 고수들은 비틀거렸다.
흡사 사자후에 당한 듯한 충격이었다.
일시적으로 무력해진 보은단은 괴한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컥!”
“미…친!”
“으아악!”
정체불명의 괴한, 혈마신에게 유일하게 주입된 명령은 바로 ‘모든 것을 죽여라’였다.
그러니 눈앞의 보은단 고수들을 살려둘 리가 없었다. 십여 명의 보은단 고수들을 죽인 혈마신은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수십여 명의 보은단 고수들이 그를 포위했다.
“뭐하는 놈인지 모르겠지만,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이런 무도한 짓을 벌이더냐!!
크르릉!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혈마신의 살기에 전신의 털이 뻣뻣하게 서는 느낌을 받았다.
그로 인해 보은단 고수들은 더욱 긴장했다.
“저, 저자는 도대체 누구야!”
“젠장, 하필이면 왜 단장님께서 안 계실 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백인혜는 호북성으로 향하면서 보은단 고수 일부를 데려갔다.
보은단 내에서도 정예들로, 그들의 대표가 절검지였다.
보은단 고수 다수를 이끌고 가는 것은 비효율적이었기에 절검지를 포함한 정예고수만 선별했다. 덕분에 현재 성수의가에는 초절정고수가 맹검 위지천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단원들과 보은충렬진(報恩忠烈陣)을 펼칠 테니, 자네가 놈을 견제해주게.”
“알겠네.”
절검지의 부재로 현재 보은단은 나머지 사천왕이 이끌고 있었다.
천라창영은 보은단 최고의 진법인 보은충렬진을 펼쳐서 정체불명의 고수를 제압할 생각이었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고 판단했는지 또 다른 사천왕인 추혼엽사에게 견제를 부탁했다.
“보은단은 보은충렬진을 펼쳐라!”
“명!”
사천왕인 천라창영의 명령에 수십의 보은단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진법을 펼쳤다. 그들이 평소 얼마나 열심히 수련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