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그것을 검신의 검을 보고서야 깨닫다니… 부끄럽구나.”
적도진인은 검신의 검무를 보며 미처 그가 깨닫지 못했던 양의의 실마리를 잡았다.
허나 그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천웅창제의 등장으로 시간은 물론 깨달음 역시 부족했다.
실망스러웠으나 마냥 실망만 할 순 없었다.
하늘이 아직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러나 하늘이 허락한 때는 그리 멀지 않았다.
천웅창제와 생사결을 하는 검신의 무학을 통해서 부족했던 실마리를 다시 찾았고, 결국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검신의 검은 분명 태극이되, 태극이 아니었다.
그런 그의 마지막 검을 보는 순간 막혔던 것이 뻥 뚫리고 말았다.
암천살무의 파천황(破天荒).
천황(天荒)의 또 다른 형태가 바로 무극(無極)이었다.
그런 천황을 깨뜨려서 새로운 세상을 여는 파천황은 다른 의미로 만물의 근원인 태극이었다.
물론 파천황과 태극은 다르다.
물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되는 것처럼.
허나 파천황에 혼원과 합일된 태극이 반응하면서 적도진인에게는 다른 것을 보여주었다.
그건 그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양의의 본질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무량수불… 무량수불…….”
도호를 읊는 그를 중심으로 거대한 태극문양이 생성되었다.
태극검선의 태극문양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의 수양을 알려주듯 그 크기가 결코 작지 않았다.
합장했던 양손이 떨어지자 태극문양 역시 둘로 분열되었다.
적도진인의 오른손에는 하늘이자 양의 기운이, 왼손에는 땅이자 음의 기운이 어렸다.
태극이 양의를 낳는 순간이었다.
적도진인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떼어졌던 양손이 다시 맞닿는 순간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느리면서 빠른 그리고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기운이 적도진인을 감쌌다.
“…무량수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도호뿐이었지만, 그만큼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정에 빠져 있었다.
당연했다.
새로운 하늘을 보게 된다면 적도진인이 아닌 그 누구도 그와 같을 테니까.
그렇게 무당파는 태극검선을 잃고, 새로운 수호신을 얻게 되었다.
양의검성(兩儀劍聖)이라는 화경고수를.
* * *
“이럴 줄 알았으면 백호당이 아닌 현무당을 보낼 걸 그랬어.”
“설마 천웅방주가 이렇게 허무하게 물러날 줄 누가 알았습니까.”
무림맹의 새로운 권력구도를 차지한 오대가문의 신창과 언중경은 너무도 아쉬워했다.
백의무제와 함께 백호당과 멸사대를 보낸 것은 천웅방과의 일전에서 그들이 아무리 공을 세운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을 거란 계산에서였다.
그렇게 되면 결국 오대가문의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러한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변수 때문이다.
바로 검신(劍神)이었다.
천웅방주는 검신과 격돌한 후 바로 물러났다.
그리고 호북성으로 진군하던 천웅방의 본대 역시 물러났다.
백호당과 멸사대는 피해를 입지도 않은 채 공을 세우게 된 셈이었다.
비록 실제로 전투를 치른 것이 아님에도 참전했다는 이유만으로.
“맹주께서도 무척이나 아쉬워하더군.”
“그렇겠지요. 호북성을 빼앗겼다면 그것을 명분 삼아 진군할 생각이셨으니 말입니다.”
천웅창제와 백의무제가 충돌하면 이기든 지든 누구도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때를 노려서 신임 맹주인 십절무왕은 천웅방을 밀어낼 생각이었다.
그 과정에서 잡음이 생길 수 있었으나 결국 역사는 승자 위주로 기록될 뿐이었다.
십절무왕은 그런 인물이었다.
“그래도 그들이 없어서 수월하게 권력을 쥐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
백호당의 주축인 오대세가가 자릴 비운 기회를 놓칠 그들이 아니었다.
오대가문은 사신당의 하나인 현무당과 별동삼대의 제마대를 오대가문의 입김 아래 두었고, 그 외의 집단에도 그들의 인물을 심어두었다.
특히 오대가문에서도 신창양가와 진주언가의 인물로.
황보세가에 빚이 있는 산동악가나 아직 맹에서 입지가 약한 모용세가 그리고 오대가문의 말석인 백리세가는 주저하다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주작당이라면 맹주님도 불만스러워도 받아들일 겁니다.”
“하긴 주작당이라면 요인들의 감시도 할 수 있는 곳이니까.”
주작당은 사신당 중 유일하게 전투보다 호위임무를 맡은 곳이었다.
맹주전이나 군사부(신산각) 등 맹 주요건물의 경비 및 무림맹 요인들의 호위 역시 주작당의 임무였다.
다르게 말하면 맹의 요인들의 움직임을 손금 보듯 알 수 있는 집단이기도 했다.
뒤늦게 무림맹에 자리를 잡으려는 모용세가와 십절무왕에게는 무척이나 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런 주작당을 두 사람은 선심 쓰듯 십절무왕에게 넘겨주려고 한다.
그들의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신창양가와 진주언가의 영향이 막강해진 상황이었다.
“감찰단은 어쩔 생각인가?”
“악가는 좀 껄끄러울 테니, 백리세가에 넘겨주시죠. 그 정도 먹이를 먹여둬야 알아서 기지 않겠습니까?”
“그럼 악가는 적당한 자리를 넘겨주도록 하세.”
“그러시지요.”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라고 했던가.
백의무제가 맹주 자리에서 물러나기 무섭게 권력구도가 빠르게 바뀌어갔다.
허나 그들은 잊고 있었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은 오대세가만 아니라 오대가문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라는 진리를.
거만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신창을 보며 언중경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신창(神槍), 너무 좋아하지 마라. 결국 마지막에 웃는 자는 내가 될 테니까.’
* * *
“어째서입니까, 사부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회군 명령을 거둬주십시오!”
먼저 호북무림으로 향했던 천웅방주 담중이 천웅방 본대에 복귀했다.
그를 본 본대의 수뇌들은 기겁했다.
방주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동행했던 천웅팔패의 수좌라는 천패 구황이 폐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천웅방주는 잠시 대기 명령을 내린 후 운기행공을 했다.
이현성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역시 내상이 심각했다.
사자도패는 폐인이 된 천패를 다른 이들에게 넘기곤 주군인 천웅방주의 호법을 섰다.
며칠이 지난 후 운기행공을 마친 천웅방주가 돌아와서 천웅방으로의 회군을 명했다.
천웅방과 호남무림의 고수들로 구성된 본대는 당황했다.
당장이라도 호북무림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자신들의 발아래에 둘 생각이었으니 천웅방주의 갑작스러운 회군 명령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한들 감히 천웅방주의 명에 항명할 수는 없었다.
그는 천웅방주이자 호남무림의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런 천웅방주에게도 항의하는 자가 있었다.
“구악, 난 분명 명을 내렸다.”
“알고 있습니다. 사부님! 허나 이 제자, 이 좋은 기회를 포기하시는 이유를 알 수 없기에 여쭐 뿐입니다!”
“…너희도 같은 생각이더냐?”
천웅방주는 자신의 둘째 제자인 구악의 말에 다른 제자들과 남은 천웅팔패 그리고 호남무림의 명숙들을 바라봤다.
그나마 살아남은 천웅팔패는 큰 불만이 없어보였으나 그의 제자들과 명숙들은 천웅방주의 시선에 움찔했다.
그들 역시 구악과 같은 생각이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제, 제자는…….”
“…그건 아니지만… 궁금하긴 합니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 천웅방주는 피식 웃었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그들. 특히 제자들의 어리석음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안타까웠다.
‘이리도 안목이 없다니. 이러니 본좌의 후계자가 되지 못하는 거란다. 어리석은 것들아…….’
천웅방주는 굳이 이 말까지 하지는 않았다.
그리곤 나직하게 말했다.
“네 애비의 복수를 하고 싶은 게냐?”
“…아니라곤 할 수 없지만, 그보단 본방의 대업을 위해서…….”
천웅방주의 둘째 제자인 구악은 바로 천웅팔패의 수좌인 천패 구황의 아들이었다.
아들로서 아비의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감정이었다.
그러니 그를 무작정 질책할 순 없었다.
허나 그 의도가 순수하게 복수로 보이지는 않았다.
“검신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했다.”
“허나… 그는 사경을 헤매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부 역시 내상을 입었지.”
“……!!”
며칠 간 운기행공을 했으나 다 나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들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아무리 검신이라고 하지만 사부인 천웅창제에게 깊은 내상을 입혔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들에게 천웅창제는 사부이자 하늘이었다.
검신이 화경고수라지만 천웅창제의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들이 느낀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그렇긴 하지만… 본방은 강합니다. 검신이 없는 이상…….”
“대신 백의무제가 있지. 본좌가 내상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면 몰라도 지금 그를 상대하는 것은 어렵다. 설마 이 사부가 죽길 바라느냐?”
“아, 아닙니다! 제자가 어찌 그런 불충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구악은 부복하며 죄를 청했다.
그런 그를 보며 천웅방주는 피식거렸다.
제 아비인 구황보다 정치에 능한 그를 보며 웃음이 나왔다.
천웅방주는 웃음을 거두곤 나직하게 말했다.
“네 아비인 천패를 포함해 팔패의 넷을 해한 검신과 호북무림은 분명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었다. 허나! 그때는 지금이 아니다. …강해져라! 너희가 강해졌을 때가 바로 이 치욕을 갚는 날이 될 것이다. 알겠느냐.”
“예, 사부님! 제자, 그날까지 강해지겠습니다!”
“제자 오철극, 사부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강해지겠습니다.”
“제자…….”
부복한 둘째 제자 구악의 외침에 첫째 제자인 오철극과 나머지 제자들 역시 부복했다.
이에 나머지 팔패와 천웅방의 고수들 그리고 호남무림의 명숙들 역시 천웅방주를 향해 부복 혹은 포권을 취했다.
‘골칫덩이들을 대거 정리했으니 검신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 빚은 분명 갚아주마.’
딴마음을 먹고 있는 자는 천패만이 아니었다.
그의 의제인 한살검패 역시 분란분자였고, 용마창패와 탁탑월패 역시 천패와 친분이 두터워서 믿을 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물론 용마창패와 탁탑월패까지 당장 제거할 필요는 없었다.
조금 더 써먹을 수가 있었으니까.
허나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로서는 조금 아쉽지만 그들을 버렸다.
이로써 그는 더 이상 골칫거리를 남겨두지 않았다.
물론 천패 구황이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고, 그의 아들 구악이 있으나 골칫거리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팔뢰(八雷)까지는 손댈 생각이 없었는데, 어쩔 수 없지. 참고 정도는 해야겠어.’
사천당가의 당자성에 이어서 천웅창제 역시 넘어선 안 되는 선을 넘으려고 했다.
* * *
“젠장, 또 검신 그놈인가!”
“고, 고정하십시오. 부천주님.”
혈천의 부천주인 사망도제는 짜증이 났다.
천웅방의 호북정벌은 정사대전의 개전이 될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이를 시작으로 사해방은 감숙과 사천을 집어삼키고, 섬서까지 밀어붙일 계획이었다.
걸림돌이 될 화산의 자하검제를 혈궁주인 혈뢰검마가 얼마나 타격을 주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지만, 이미 많은 안배를 깔아둔 상황이었다.
물론 만전의 상태인 자하검제를 벨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