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천강무적과 파천황이라는 파천의 무학이 충돌했으니 여파가 가공한 것은 당연했다.
허나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이조차 전부가 아니었다.
‘젠장, 괴물새끼들…….’
호북무림인들처럼 삼십 장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물러나서 이를 지켜보던 천패는 짜증이 났다.
두 절대고수의 격돌을 볼수록 스스로가 작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화경고수를 제외하고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그러나 화경고수. 특히 천웅창제와 검신의 신위는 차원이 달랐다.
그들의 격돌 여파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더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에 천패는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다.
“음? 미, 미친!”
물러나려던 천패는 기겁하고 말았다. 얼핏얼핏 황금빛이 보이는 거대한 기운이 자신을 향했기 때문이다.
천웅창제와 검신의 충돌로 인한 여파로 보기에는 조금 이상했다.
허나 그러한 사실을 골똘히 고민할 여유 따윈 없었기에 천패는 뒤로 물러나면서 권강으로 권벽을 펼쳤다.
견고하기로 유명한 천패의 권벽이었다.
하지만 그를 노리고 있는 기운은 그 정도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크아아악!!”
천패는 완벽하게 펼친 권벽으로 자신을 노리는 황금빛 기운을 막았다.
순간 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타깝게도 천패의 비명으로만 끝나지는 않았다.
권벽을 펼친 그의 두 주먹이 사라졌다.
끔찍한 고통에 천패는 급히 몸을 피하려고 했으나, 그때는 이미 그의 오른팔까지 사라진 후였다.
다행히 오른팔을 희생해서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으나 기혈이 틀어지면서 내상이 심각해져 과연 살았다고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런 그와 상관없이 두 절대고수의 격돌의 여파는 일대를 모두 집어 삼켰다.
“커억~ 우웩!”
“으으…으…….”
주변 일대를 집어삼키고, 천패조차 재기불능으로 만든 격돌이었다. 그 중심에 있는 천중창제와 검신이라고 해서 무사할 리가 없었다.
천웅창제는 머리가 산발에 옷이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으며, 곳곳에 혈흔이 눈에 띄었다.
게다가 피까지 토할 정도라면 외상만 아니라 내상 역시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이현성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다.
피로 물들어서 혈인(血人)이 된 그에 비하면.
덕분에 누가 봐도 승패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뒤늦게 이를 알아본 호북무림인들은 낭패감이 들었다.
정식 생사결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무림의 암묵적인 묵계였다.
그게 아니라도 이미 사십 장 이상 물러난 상태였기에 이현성을 구하려 해도 제때 구할 수도 없었다.
그때 천웅창제의 입이 열렸다.
“헉… 헉… 후…! 검신과 생사결은…….”
제법 먼 거리에 있기에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허나 그런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졌다. 천웅창제가 음공(音功)의 수법으로 뜻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말에 호북무림인들은 절망했다.
“…무승부다. 약속대로… 본 방주는 물러나겠다. 이상.”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누가 봐도 천웅창제의 승리였다.
비록 그 역시 온전치 못했다고 해도 겉모습만 보면 그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그럼에도 무승부를 선언했다.
호북무림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말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하듯 천웅방주가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사자도패는 몸이 성치 않은 천패를 짊어지고 그의 뒤를 따랐다.
“이, 이게 무슨 일이람?”
“저, 정말 천웅방주가 물러난다!”
“와아!”
“검신 만세!!”
사라지는 천웅방주를 보며 호북무림인들은 언제 절망했냐는 듯 환호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정작 자신들을 구원해준 검신을 잊고 말았다.
그러나 뒤늦게 정신을 차린 몇몇이 검신에게 달려갔다.
그들의 환호를 멀리서 들은 천웅방주는 입맛을 다졌다.
‘역시… 죽였어야 했어.’
약속 때문에 이현성의 목숨을 끊지 않은 것이 후회되는 천웅방주였다.
비록 양심의 가책을 느끼겠지만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를 죽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록 후회할지라도 천웅방주는 이현성을 죽일 수가 없었다.
그 역시 거인. 마지막 자존심만은 꺾을 수 없었다.
‘아니… 놈이 더 강해진다면, 나 역시 더 강해지면 돼. 그래야만 해…….’
천웅창제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돌아갔다.
동상이몽
“검신은 좀 어떠신가?”
“다행히 고비는 넘기셨습니다.”
형주의 건원장(乾元莊)은 무당파 속가제자의 가문이었다.
건원장주가 현 무당파 장문인과 같은 항렬이기는 하지만 대단한 고수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저 무당파 속가제자 중에서 나쁘지 않은 수준일 뿐이었다.
건원장 역시 그리 큰 규모의 장원도 아니었다.
허나 현재 건원장은 용담호혈 그 자체였다.
건원장 안은 무당파 일대제자들과 제갈세가의 금검대가 지키고 있으며, 장원 밖은 무한, 의창 그리고 형주 대문파의 고수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천웅창제와의 생사결 이후 쓰러진 검신 이현성이 치료를 받는 곳이 바로 이곳 건원장이었다.
“사질이 수고가 많았네.”
“아닙니다. 적성 사숙님. 장문 사형께서 태청신단을 주셔서 가능했습니다. 다만 고비는 넘기셨으나 의식을 되찾으시려면 꾸준한 치료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무림의 시선에서 보면 흔한 장원인 건원장에 천하의 검신 이현성을 데려온 이유는 바로 건원장주 때문이다.
그는 무당파 속가제자였지만, 전대 의약전주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이기도 했다.
신의와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형주는 물론 호북성 중남부에서 그보다 뛰어난 의술을 가진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무당파의 영단인 태청신단의 효능을 잘 이용해서 이현성의 내상을 다스릴 수 있었다.
소림의 대환단, 성수의가의 회령환에는 한수 접어주지만, 무당파의 태청신단 역시 무림에서 흔치 않은 상급 영단이었다.
상급 영단쯤 된다면 단순히 복용하기만 해선 안 된다.
하물며 검신은 의식까지 잃은 상태였다.
즉, 태청신단의 약효를 제대로 흡수할 수 없단 뜻이었다.
그렇기에 건원장주의 의술이 필요했다.
“장문인이 큰 결단을 내렸군.”
“아닙니다. 사부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태청신단은 무당파의 무가지보(無價之寶)다.
아무리 장문인이라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큰 공을 세운 경우에도 장로회의를 거쳐서 가부가 결정된다.
다만 당대 장문인이라면 장로회의를 거치지 않고 독단으로 두 알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당대 장문인인 현원진인은 그 두 알 중 하나를 이현성의 치료에 사용한 것이다.
본인이나 직계제자도 아닌 외인을 위해서 내놓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으니, 그의 결정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검신께선 우리 무당만 아니라 호북무림의 은공일세. 그를 치료하는데 부족함이 있어선 아니 될 일일세.”
“물론입니다. 한 치의 실수 없이 검신 님을 치료하겠습니다. 적성 사숙님.”
검신의 치료를 맡게 된 건원장주의 얼굴에 대단한 결의가 엿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천하의 검신의 부상을 치료하게 되었으니, 그에게는 이런 영광도 없었다.
그때 장원을 지키던 무당파 일대제자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적성 사숙조님, 장문 사숙님. 적풍 사숙조께서 백의무제 님을 모시고 오셨습니다.”
“장문인은 나와 함께 가세. 인사드려야 하니.”
“예 사부님.”
적성진인은 어딘가를 슬쩍 바라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곳에는 누군가 은신하고 있었다.
바로 이가장의 암월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직 혼수상태인 검신을 노리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허나 검신의 호법인 암월이 암중호위를 서고 있다면 믿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적성진인은 제자인 현원진인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무당의 적성이 백의무제 백 대협을 뵙습니다!”
“무당의 현원이…….”
“만나서 반갑네.”
태청검성 적성진인과 무당 장문인 현원진인도 대단하지만, 전(前) 무림맹주이자 백의무제인 백무강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게다가 무위만 아니라 연배 역시 백의무제가 위였다.
그렇기에 무당 장문인 현원진인만 아니라 무당파 원로인 적성진인도 그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백의무제는 나직하게 말했다.
“오는 길에 이야기를 들었네. 검신은 어떤가?”
“아직 의식을 되찾지는 못하셨으나 다행히 고비는 넘기셨습니다. 치료만 잘 받으면 의식을 되찾으실 겁니다.”
“허허… 그렇군. 다행일세.”
천웅창제와 격돌했는데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르나 이현성은 천웅창제의 제안 때문에 격돌 당시 기운 일부를 돌려서 천패를 공격했다.
계획과 달리 천패를 죽이지는 못했으나 무림인으로서의 미래를 빼앗았으니 완전한 실패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천웅방주가 약속대로 물러난 것이다.
그 때문에 지옥대제 때와 달리 의식을 잃을 정도로 깊은 내상을 입게 되었다.
허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 늙은이가 아니었어도 잘 막아냈군. 허허… 이제 마음 편히 돌아갈 수 있겠어.”
“맹… 무제 님…….”
마지막 짐을 내려놓은 백의무제의 얼굴은 허탈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편안해 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신산 제갈윤호는 안타깝기만 했다.
그들의 곁에 있던 적풍진인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대사형께선 어디 계신가, 사제. 혹시 부상이라도…….”
“아닙니다. 대사형께선… 폐관수련 중이십니다.”
“폐관…수련? 그게 무슨 말인가?”
백의무제가 몸소 방문했음에도 적도진인이 보이지 않았기에 적풍진인은 혹시 그가 부상이라도 당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적성진인의 대답은 전혀 예상 못한 대답이었다.
덕분에 적풍진인은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당황했다.
비록 천웅방주가 물러났고 천웅방 역시 회군을 하는 듯싶었으나, 아직 방심해선 안 되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천웅방주를 막은 검신이 쓰러진 상황이었다.
이러한 위급한 시기에 대사형인 적도진인이 폐관수련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의 되물음에 적성진인은 자신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그러니까. 대사형께서…….”
* * *
“무량수불……! 어리석도다. 어찌 알고 있으면서도 이제껏 깨닫지 못했을꼬…….”
적도진인의 입에서는 한탄이 나왔으나 그의 얼굴은 너무도 평온했다.
그런 그의 전신에서 밝고 맑은 빛이 자연스럽게 흘렀다.
그 빛은 그의 춤에 따라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더 놀라운 점은 그의 오른손과 왼손이 서로 상이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전혀 억지스럽지 않았다.
“사숙께서 말씀하시려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적도진인이 익힌 것은 양의(兩儀)였지만, 그 뿌리는 태극(太極)이었다.
그렇기에 알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양의신공 8성의 벽에 갇혀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런 그가 지금 8성의 벽을 깨고 9성에 도달했다.
허나 그것으로 멈출 생각은 없었다.
양의신공을 창안한 조사를 제외하곤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10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