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꺾어진 꿈
“허허. 와주어서 고맙네.”
“아닙니다. 장인어른.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천웅방의 선발대 소식을 듣고 떠났던 제갈세가의 고수들이 호북 남부에 도착했다.
그들만이 아니라 무당파 및 호북무림 각지에서 움직인 고수들 역시 모이기 시작했다.
이미 그 수가 수천이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들까지 합류한다면 최소 이만 이상은 모일 거라 생각했다.
특히 검신이 호북무림을 위해서 천웅방과 대적하고 있단 소문이 퍼지면서 더 많은 이들이 움직이게 되었다.
호북 남부에 도착한 호북무림인, 특히 명숙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검신에게 얼굴도장을 찍고 싶어서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런 그들을 보며 제갈인섭과 제갈세가의 고수들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당연한 일이 가장 어려운 일 아니겠소이까.”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인.”
무당파의 제일 어른인 무당삼검성의 첫째인 양의검성 적도진인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제갈세가의 사위이고, 호북성에 지나고 있었다지만, 남의 일에 나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림에서는 작은 행동조차 은원으로 이어지는 법이었다.
하물며 상대는 사파사세인 천웅방이었다.
그러므로 쉽게 나서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호북무림의 명숙들은 하나 같이 경외 어린 시선으로 이현성을 바라봤다.
그런 그들의 시선에 이현성은 그저 민망할 따름이었다.
허나 무당삼검성의 막내인 태극검성 적성진인만은 침묵하고 있었다.
사부인 태극검선의 일로 그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화경에 올라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 찼을 뿐이다.
그렇지만 무당파 그리고 적성진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이현성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꼭 자신 때문에 태극검선이 등선했다 말할 순 없지만, 분명 계기를 제공한 것은 자신이기 때문이다.
무당파에 방문하지 않았다면 태극검선이 자신에게 태극의 정수를 전하고 등선하려고 하지 않았을 테니까.
“…진인,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빈도를 말이오?”
갑작스러운 이현성의 물음에 무학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던 적성진인은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런 그를 보며 이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진인. 장문인과 적도진인께서도 함께 시간을 내줄 수 있으십니까?”
“무량수불…!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그들을 대표해서 적도진인이 수락했다.
이현성이 자신들을 청한 이유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천하의 검신이 청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었다.
“장인어른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흠흠… 알겠네. 조심히 다녀오게나.”
이현성은 제갈인섭에게 인사를 한 후 무당파 고수들과 그곳을 벗어났다.
어느 정도 이동한 후에야 멈추었다.
외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판단이 들었다.
“제가 세 분을 청한 것은 검선 어른께 받은 것을 무당에 다시 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그의 말에 세 사람은 ‘역시’라고 생각했다.
천웅방과 일전에 앞둔 이 중요한 시기에 자신들만 청할 이유가 그것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을 보며 이현성의 입에서는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오히려 세 분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라면 영영 돌려드릴 기회가 없을지 모르기에 최선이 아님에도 이렇게 세분을 청했습니다.”
“…무량수불…….”
천웅방 그리고 천웅창제는 강했다.
그들을 상대로 검신 역시 장담할 수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걸 알기에 그들 역시 마음이 무거웠다.
물론 이들이라고 천웅방을 상대로 나중을 기약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이들만 부른 것은 그들 외에는 자격이 없어서였다.
초절정고수조차 태극의 정수를 담기에는 부족했다.
그렇기에 태극검선은 그들이 아닌 이현성을 택했다.
하물며 절정고수들에겐 기연이 아닌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었기에 무당의 후학에게 전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담을 수 없는 너무도 거대한 깨달음은 오히려 퇴보시킬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죄송하지만 검선 어르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제 깨달음과 섞여서 온전히 돌려드리긴 어렵습니다.”
“무량수불…! 그게 하늘의 뜻이라면 따라야 하지 않겠소이까.”
태극의 정수와 혼원신공이 섞이면서 또 다른 형태로 진화하고 말았다.
게다가 암천살무를 만나면서 사실상 태극의 정수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다.
허나 그렇다고 한들 분명 태극의 정수가 섞였기에 그들이라면 분명 얻는 것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원래라면 검을 맞대며 전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검무(劍舞)를 통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태극의 정수는 차원이 다른 깨달음이었다.
구결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검무를 통해 깨달음을 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태극검선도 실전을 방불케 하는 비무를 통해서 이현성에게 태극의 정수를 전했다.
허나 언제 천웅방과 호남무림의 본대가 도착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검을 맞대는 과정에서 세 사람이 부상이라도 입으면 곤란했다.
부상을 입고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천웅방은 무른 상대가 아니다. 그것을 알기에 그들도 아쉽지만, 검무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무려 검신의 검무였다.
결코 놓칠 수 없는 기연이었다.
이현성은 암천검을 쥐었다.
검을 쥔 것만으로도 그의 기세가 바뀌었다.
빠르면서 느리고, 강하면서 부드러우며 현란하면서 단순한 검무였다.
“아…….”
무당파의 장문인인 현원진인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럼에도 스스로 소리를 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이현성의 검무에 빠져들었다.
세 사람은 무당 삼대신공 중 태극신공과 양의신공을 익혔다. 태극(太極)과 양의(兩儀)는 분명 다르나 음양에서 시작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음양이 분화되기 이전의 상태가 태극이라면 음양이 나누어진 상태가 양의였다. 그렇기에 태극신공을 익힌 적성진인과 현원진인만 아니라 양의신공을 익힌 적도진인까지 이현성의 검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현성은 억지로 태극을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의 것을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우나 태극만 골라서 보이는 것은 억지스러운 행위였다.
억지스러움이 담기면 오히려 그들에게 해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 스스로가 깨우치길 바랐다.
이현성은 검무를 멈추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그들이 얻는 것이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것이 검신의 무학이란 말인가… 사부님의 무학을 얻어야 해.’
현원진인과 적도진인은 검신의 검무에 점점 빠져들었으나 정작 적성진인은 그들만큼 검무에 빠져들지 못했다.
벽을 넘어서 사부인 태극검선의 명성을 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검신의 검무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흥에 겨운 적도진인이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단순한 춤이 아니었다. 음(陰)과 양(陽). 하늘(天)과 땅(地)을 담은 양의의 춤이었다.
적도진인은 검이 아닌 순수한 자신의 육신으로 양의를 표현했다.
자신도 모르게 깨달음 속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검신의 검무를 통해서 무언가를 얻은 것은 오직 적도진인뿐이었다.
초절정지경에 올랐으나 아직 이현성이 전하는 깨달음을 엿보기에는 그릇이 작은 현원진인과 검무에 온전히 빠져들지 못한 적성진인은 안타깝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물론 적도진인이 검신의 검무를 통해서 얻은 것은 태극의 정수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양의의 일부를 엿봤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춤은 물론 이현성의 검무 역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세 사람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현성이 사라졌다.
허나 그런 그를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현성이 왜 저렇게 다급하게 사라진지 알았다.
“우리도 빨리 가세나!”
“예, 대사형!”
“예, 사백…….”
세 사람은 아쉬웠다.
특히 양의의 일부를 엿보며 깨달음에 젖어들던 적도진인은 더욱 아쉬웠다. 하지만 하늘이 아직은 때가 아니라 한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전력을 다해서 움직였다.
* * *
쾅!
“컥!”
“으아악!!”
갑작스러운 기습에 호북무림인들은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뒤늦게 호북무림의 명숙들이 나섰으나 그들 역시 별수 없었다.
그것도 단 두 사람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무당삼검성은 어디에 있더냐!”
“검신 놈은 도망친 건가?”
그들의 조롱에 호북무림인들은 얼굴이 시뻘게졌다.
무시도 이런 무시가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한 사내가 나섰다.
“이놈들! 나 천지신검은 보이지 않더냐!”
“천지신검? 아… 고만고만한 제갈 놈들 중에 조금 검을 쓸 줄 안다는 그놈이구나.”
천하의 천지신검 제갈인겸이 무시를 당했다. 호북무림에서 손꼽히는 고수이자 초절정고수인 그를 상대로.
허나 저들은 그를 조롱할 자격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천웅팔패 중 수위를 차지하는 천패와 사자도패였다.
“이놈들 오냐! 본가의 검이 어떤지 보여주마!”
“너희 셋만으로 무너질 우리 호북무림이 아니다!”
제갈인겸을 필두로 호북무림의 명숙들이 반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한 사람에 의해서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꼴값 떨지 말고, 검신 그 애송이를 불러라. 아니면… 너희는 이 자리에서 모두 죽는다.”
“으윽!”
“커억!”
좌중은 한 사내의 나직한 한마디에 숨도 쉬지 못했다.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미증유의 거력이 좌중을 압도했다.
호북무림의 명숙들은 그제야 지금까지 침묵하던 사내의 정체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처, 천웅창제!’
사파사세인 천웅방주이자 오제인 천웅창제.
화경고수인 그는 존재만으로도 모두를 압도했다.
수천이 모였음에도 오히려 그 한 사람의 눈치만 봐야 할 정도였다.
“셋을 세지. 그때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하나…….”
고작 하나를 세었을 뿐인데 모두가 느끼는 압박감이 어마어마했다.
단순히 느낌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뿜어내는 무형지기가 한층 강해졌다. 덕분에 천웅창제의 입에서 둘이 나왔을 때, 기절하는 자들까지 나왔다.
“두울~! 정말 모두 죽여야 나오겠단 말인지?”
‘검신께서는 어디에 가셨단 말인가!’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호북무림의 명숙들은 이현성이 무당파 고수들과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외 대부분의 호북무림인들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기에 답답하기만 했다.
결국 천웅창제의 입에서 사망선고를 알리는 숫자가 나오게 되었다.
“세~엣! 오냐! 모두 죽여주마!”
천웅창제가 창을 들어 올리자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가 창을 쥘 만한 상대는 없으나 본보기로 일격에 수십을 넘어 일이백명쯤 지우려 하는 것이었다.
그는 창의 제왕. 따라서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