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한참 후배가 뒤를 바짝 따라왔으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었구려… 그런데 혈뢰 호법께서 진정 자하검제를 상대하실 수 있을 정도이십니까?”
“…무위만으로는 어렵겠지. 허나… 혈뢰 호법이라면 방법이 있지 않나? 안 그렇나?”
부천주의 압박에 혈뢰검마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천주까지 거론되었던 상황이었다.
자신이라는 대안이 통하지 않는다면 천주의 칩거를 방해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혈궁은 혈천주를 수호하는 집단이었다. 그러한 혈궁의 수장으로서 주인의 칩거를 방해하게 할 순 없었다.
“부천주께선 본인의 목을 원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나. 다만 그를 죽이지 못한다 해도 피해를 입힐 방법이 있음을 아네. 그리고 그건 혈뢰 호법만이 할 수 있다고 알고 있네. 본좌가 잘못 알고 있는 겐가?”
“…….”
확신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런 부천주를 보며 혈뢰검마는 입을 다물었다.
허나 침묵은 허용되지 않았다.
부천주의 압박에 결국 혈뢰검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천하의 자하검제인데 누가 자신할 수 있겠는가.”
“…부천주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하하하 결단을 내려줘서 고맙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만하게. 뭐든지 다 지원해주겠네.”
그렇게 혈뢰검마는 자하검제를 상대하기 위해서 화산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 결정에 나머지 혈천십삼세의 주인들은 궁금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방법이 있기에 자하검제를 상대할 수 있는지를.
‘하… 내 업보구나. …미안하오. 그대에게 또 상처를 입혀야 하는 날 원망하시오.’
* * *
“저 산이 바로 화산이에요!”
화음현에 한 무리가 도착했다.
화산의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화음현은 상당히 번화한 지역이었다. 오악의 하나인 서악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려한 명산이 바로 화산이었다.
그런 화산을 찾는 수많은 유람객들 덕분에 화음현은 자연스럽게 번화하게 되었다.
허나 화음현이 번화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화산에 구파일방인 화산파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미친놈이 화산파의 앞마당에서 소란을 피울 수 있겠는가.
화산파 도사들도 자주 오가는 화음현인 만큼 치안이 상당히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화산파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 이쯤에서 헤어져야겠군.”
“아니에요. 여산이라면 그리 멀지 않은데, 같이 가요.”
“괜찮겠어? 사부님을 만나고 싶잖아?”
“그렇다고 오라버니와 언니만 보낼 순 없잖아요.”
그들은 이가장을 떠난 이현영 등이었다.
원래 목적지는 여산 성수의가였지만, 이현영이 동행한 이유 중 하나는 사부를 보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이가장에서 함께 지내던 사형제들마저 사문으로 돌아간 후 그녀는 사부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다.
이제 이가장이 그녀의 새로운 집이었지만, 십수 년을 함께 지내온 사부의 빈자리만큼은 채울 수 없었다.
“우리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유 형님도 계시고…….”
“맞아. 현영 동생은 사부님을 뵙고 와.”
현재 그들은 이현영, 철우 그리고 적묘만이 아니었다.
그들을 안전하게 호위하기 위해서 신룡표국의 표사들과 함께 왔다. 표사들을 지휘하는 사람은 국주인 유백이었다. 이현성의 여동생인 이현영과 의제인 철우 등이 섬서로 향한다는 것을 알게 된 유백은 대표두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참여한 것이다.
신룡표국이 검신의 이가장에서 운영하는 표국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비록 벽을 넘지 못했으나 국주인 유백은 정주에서 손꼽히는 고수이며, 검왕의 손녀사위로 낙점 받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런 유백이 직접 호위하고 있는데, 누가 철우와 적묘를 노릴 수 있겠는가.
철우와 적묘의 말에 이현영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화음현에서 여산까지는 이틀거리에 있었다.
환자인 적묘의 상태를 생각해서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감안해 사흘 전에는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며칠을 못 참고 이곳에서 헤어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화산을 지척에 두고 그냥 지나가는 것 역시 마음에 걸렸다.
“그럼… 사부님만 잠깐 뵙고 바로 합류할 게요.”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오랜만에 사부님을 뵙는 거라면서?”
“아니에요. 사부님을 뵐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거든요.”
그녀의 사부인 화옥령은 현재 장문령에 의해서 강제 폐관수련 중이었다.
정확히는 전대 장문인인 자하검제의 장문령에 의해서 화산 밖은커녕 수련동도 벗어날 수 없는 신세였다.
그렇기에 아무리 제자라도 이현영은 그녀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문 사백이 선처를 해준다면 잠시 얼굴을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을 뿐이었다.
“어쨌든 잘 다녀와.”
“네, 사부님만 뵙고 바로 성수의가로 갈게요.”
그렇게 이현영은 일행과 잠시 헤어져서 사부가 있는 화산에 올라갔다.
“본파는 당분간 참배객을… 아…! 현영 사매였군.”
“현영이 사형들을 뵙습니다.”
화산파는 무림문파였지만 도가의 도관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많은 참배객이 방문한다.
물론 그들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화산의 산문에서 이현영을 처음 맞이한 이들은 화산파 일대제자들이었다. 수년 전 장문인이 바뀌면서 기존이 이대제자들이 일대제자가 되었다.
삼대제자에서 이대제자가 된 이들은 아직 어리기에 산문 수호와 같은 중임은 여전히 일대제자들이 맡고 있었다. 그들은 이현영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녀가 화산파에 기거할 때만 해도 이렇지 못했으나 이가장에서 돌아온 이현영의 사형제들 덕분에 이러한 변화가 생겼다.
“흠흠…! 검신께서는 잘 계시는가? 사매.”
“아, 오라버니께서 출타하셨는데 그전까지는 잘 계셨습니다. 사형.”
이가장에서 돌아온 화산파의 제자들이 무학의 성장을 보여주었다. 그 내막에 이가장 고수들의 가르침이 있었음이 은연중에 알려지게 되었다.
화산파의 제자들은 도사인 동시에 무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검신의 이가장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는 것은 당연했다.
“흠흠…! 혹시 우리도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없을까 사매?”
“사제, 현영 사매가 난감해하지 않는가?”
사제에게 면박을 주긴 했으나 그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걸 알기에 이현영은 부정적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께서 나중에 장문 사백을 뵈러 오신다고 하셨으니… 아마 기회가 있으실 거예요.”
“그, 그게 정말인가!”
그들은 무척 기뻐했다. 그녀의 오라버니가 누군가. 화경고수인 검신이었다. 그런 그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천재일우의 기연이나 마찬가지였다.
화산파 일대제자라고 하지만 아직은 이, 삼십대였다.
그러다 보니 일대제자들 대부분이 일류지경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들의 나이에 절정지경에 오른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뛰어난 재능과 훌륭한 사부의 가르침 그리고 대단한 절학.
이 삼박자가 갖춰져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아직 벽을 넘지 못했으나 화산의 본산제자였다.
아직 꽃을 피우지 못했을 뿐 십 년, 이십 년 후에는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대단한 고수가 되어 있을 것이다.
화산이 괜히 명문 중에 명문이 아니었다.
“저… 사형, 장문 사백님께 인사드리러 가도 될까요?”
“어? 물론이지. 장문 사백님께서도 반가워하실 거야. 얼른 들어가 봐.”
이현영은 사형들께 인사를 한 후 산문 안으로 들어갔다. 몇 번의 계절이 바뀌었음에도 화산은 변한 것이 없었다. 그녀 역시 화산파의 제자임을 증명하듯 곳곳에 피어 있는 매화나무를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장문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여러 사형제들과 이대제자들을 만났다. 그들의 변한 태도에 이현영은 얼떨떨하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현영 사질.”
“아니에요. 장문 사백께서 얼마나 바쁘신 분인 줄 잘 아는 걸요.”
대 화산파의 장문인은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대파의 장문인이 해야 할 업무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사질인 이현영을 위해서 시간을 내어주었다.
검신의 여동생이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누이의 하나밖에 없는 제자였기 때문이다.
“그래, 검신께서는 잘 계시는가?”
“출타를 하셔서 최근 근황은 모르나 잘 계시는 줄 압니다.”
“그렇군.”
천하에 미치는 검신의 비중이 워낙 대단하였기에 화산장문인 화천기도 이현성의 안부부터 물었다. 이현영 역시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런데 완전히 돌아온 게냐?”
“그게… 여산에 볼일이 좀 있어서 가는 길인데… 사부님을 잠시라도 뵐 수 있을까 싶어서…….”
“음? 여산이라면 성수의가를 말하는 것이더냐? 어디 아프기라도 하는가, 현영 사질.”
“제가 아니고, 다른 분이 몸이 편치 않으셔서요.”
진심으로 걱정하는 화천기의 모습에 이현영은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자신이 화산파에 기거했던 시간이 길지 않았음에도 흡사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군. 성수의가라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바쁜 시간을 쪼개 그녀를 만나준 만큼 화천기도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어려웠다.
“…내가 비록 장문인이라지만, 영이의 두문령(杜門令)은 전대 장문인이신 아버님께서 내리신 거라서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알고 있습니다. 장문 사백님.”
그냥 두문령이 아니라 속죄하라는 의미로 외부와 차단한 폐관수련이었다. 현 장문인으로서 철회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섣부른 판단을 할 수도 없었다.
전대 장문인은 자신의 부친이지만 동시에 화산의 전설 자하검제였다.
존경하는 부친의 뜻을 아는 화천기로서는 이현영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청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의 입장을 알기에 이현영은 안타깝지만 더 이상 청할 수는 없었다.
“허나 자하원에 출입은 허가해줄 테니, 아버님께 직접 청해 보거라.”
“감사합니다. 장문 사백.”
화산파의 원로원인 자하원은 아무나 출입할 수 없었다.
허나 장문인의 허락이 있다면 상황이 다르다.
그의 입장상 직접 부친을 설득하는 것은 어려우나 이현영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가능했다.
물론 자하검제를 설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회라도 생긴 것이 어딘가.
자하원의 출입을 허락받은 이현영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바로 자하원으로 향했다.
* * *
“신산 자네까지 함께 나올 필요는 없거늘…….”
“아닙니다. 맹주… 무제께서만 책임을 지시게 할 순 없습니다.”
백무강과 제갈윤호가 무림맹주직과 총군사직을 내려놓은 지 보름이 지났다.
비록 사임했다고 하지만 무림맹에서 가장 중요한 직위를 가진 그들이었다. 새 주인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선 해결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신산 제갈윤호이니 보름 만에 끝낼 수 있었지, 다른 인물이었다면 달포가 되었다고 한들 어려웠을 것이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