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허나 그건 맹주님의…….”
“되었네. 총군사. 그래서 부맹주로 추천하고 싶은 분이 있소? 신창.”
맹주의 말에 신창은 흐름이 넘어왔다고 판단했는지 내심 득의했다. 허나 이제부터가 가장 중요했다. 실수를 해서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기에 신중하게 설득해야 한다.
명숙들 역시 도대체 신창이 누굴 부맹주로 추천하려는지 궁금해 했다.
“…십절무왕님 을 본맹의 부맹주님으로 초빙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십절무왕? …처음 들어온 별호인데, 나만 그렇소?”
십절무왕(十絶武王).
무척이나 광오한 별호였다.
십이란 완전한 수를 의미한다. 즉, 모든 것에 능한 무의 왕이란 뜻이었다. 허나 십절무왕이란 별호를 가진 무림인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무림맹주가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다만 십절무왕이란 별호는 몰라도 비슷한 별호를 가진 자는 알고 있었다.
“신창 혹시, 모용세가의 십절무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역시 총군사입니다.”
총군사의 물음에 신창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좌중은 깜짝 놀랐다. 다루지 못하는 무기가 없고, 용병술이나 전술 등 문무겸전의 천재가 바로 십절무군이었다.
게다가 중원의 변방이자 선비족의 후예였기에 오대세가에 속하지 못할 뿐 남궁세가에 뒤지지 않는 모용세가의 태상가주이기도 했다.
모든 면에서 부맹주로서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분께서 화경에 오르신 겁니까?”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라면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총군사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정말 그렇다면야…….”
제갈윤호는 이 순간만큼은 반박거리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큼 신창이 상황을 잘 만들어 놨다.
당황하는 제갈윤호를 보며 신창은 기분이 좋아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제갈윤호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인 셈이다. 그때 맹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를 부맹주로 세울 필요는 없소.”
“예? 매, 맹주님…! 이제 와서 권력이 나눠지는 것이 두려우신 겁니까!”
당황해서 자신도 모르게 속내를 입 밖으로 꺼낸 신창은 순간 아차 했다.
그 순간 맹주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아무리 신창이 강하다고 해도 감히 무림맹주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다된 밥에 코를 빠트렸으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우려와 달리 맹주는 신창을 압박하지 않았다.
허나 불쾌감을 숨기지도 않았다.
“지금 내게 권력이라고 했소? 본인은 애초 무림맹주의 자리 따윈 원치 않았소. 그대들이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본인을 설득했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이거늘…! 허…….”
“제, 제가 시, 실언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맹주님!”
천하를 오시할 힘을 가졌음에도 속세와 먼 생활을 하던 백의무제였다. 그런 그를 설득해서 은거를 깨게 만든 사람이 바로 제갈윤호를 위시한 무림맹 수뇌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대우를 받으니 백의무제는 다시 한번 무림에 실망하게 되었다.
백의무제는 신창과 좌중을 훑어봤다.
그의 싸늘한 시선에 명숙들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맹주의 입이 다시 열렸다.
“내 조금 전 십절무군, 아니 십절무왕을 부맹주로 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은! 내 권력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차라리 그를 맹주로 세우란 뜻이외다! 이제 이해가 되셨소! 신. 창.”
“…그게 무슨…….”
“본인은 이 순간 맹주직을 내려놓는 것은 물론 동시에 맹에서도 탈퇴하겠소!”
“매, 맹주님!”
백의무제의 폭탄선언에 지금까지 그를 견제하던 신창과 언중경 등 반맹주 성향의 명숙들까지 기겁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이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들이 내세운 십절무왕이 부맹주가 아닌 맹주가 되는 것이 더 이득이 될 수도 있었다.
허나 화경고수, 그것도 오제인 그가 떠난다는 것은 무림맹 차원에서 엄청난 손실이었다.
무엇보다 맹주가 십절무왕을 견제해줘야 맹 내에 기반이 없는 그가 자신들을 더 필요로 할 텐데, 정작 맹주가 떠난다면 그러한 계획이 어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매, 맹주님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마, 맞습니다. 부맹주님을 선출하자는 것 때문에 불쾌하셨다면…….”
“아니, 그것 때문이 아니오. 애초 협정서를 전달할 때부터 결심했던 것이오. 그러한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을 때 이런 반발이 있을 것을 예상했으니… 다만 예상 이상이었지만…….”
무림맹은 정파무림의 연합체였다.
따라서 맹주 한 사람에 의해서 결정되는 집단이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무림맹의 최대 장점이자 최대 단점이었다. 그런 무림맹의 맹주로서 아무리 천하를 위한 결정이었더라도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을 때, 이미 각오를 한 바였다.
즉, 백의무제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이유로 맹주직을 내려놓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을 몰랐던 제갈윤호가 느낀 충격은 상당했다. 그걸 아는지 백의무제는 그에게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하오, 총군사. 그대에게는 먼저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그대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소.”
“맹주님…….”
맹주직을 내려놓기로 선언한 지금 백의무제는 무거웠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는지 홀가분해졌다.
허나 언제나 자신을 보좌해주었던 제갈윤호에게 만큼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제갈윤호의 입에서도 폭탄선언이 나왔다.
“본인 역시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느끼며, 총군사 자리를 내려놓겠습니다.”
“총군사! 그대까지 그럴 필요는 없소!”
“아닙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입니다. 맹주님 아니, 무제 님을 보좌했던 제가 그대로 총군사로 있다면 분명 신임 맹주님과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직접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으나 오대세가와 모용세가는 불편한 사이였다. 같은 명문정파였지만 오랜 시간 쌓은 오해의 골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 법이었다.
하물며 오대세가 중 가장 무력이 떨어지는 제갈세가의 자리를 노리는 무림세가는 많았다.
신창양가, 진주언가 그리고 모용세가가 대표적이었다.
그런 모용세가의 태상가주가 신임 무림맹주가 된다면 어찌 그가 계속 총군사 자리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박수 칠 때 떠나는 것이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었다. 갑작스럽게 무림맹주와 총군사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무림맹은 다시 한번 소란스러워지게 되었다.
* * *
“허… 이게 한 방 먹었군. 설마 독왕을 지옥성에서 떼어놓을 줄이야.”
사천무림을 다시 한번 뒤집어버린 것으로, 정사대전의 불씨를 던졌다.
이제 그 불씨가 번질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때 혈천으로서는 안타까운 비보를 듣게 되었다.
지옥성의 부성주인 독왕이 지옥성을 이탈해서 남만으로 돌아갔다는 소문이었다. 지옥성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화경고수가 둘이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인 독왕이 휘하 묘족들을 이끌고 남만으로 돌아가면서 지옥성은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지옥성은 강했다. 사파사세의 이름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었다.
허나 그 영향력이 상당히 위축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것으로 백의무제와 신산이 실각되었으니 손해만은 아닙니다. 부천주님.”
“무림맹이 자중지란을 한다면 분명 손해는 아니지… 허나 지옥성이 몸을 사린다면 정사대전은 물 건너가는 것 아니겠나?”
사파사세는 하나하나가 막강한 힘을 가진 거대세력이었다. 그렇다고 한들 홀로 무림 전체를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리 자중지란에 빠졌다고 해도 정파무림이었다.
사파사세의 하나라도 빠진 상태로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즉, 아무리 사천무림과 사해련이 본격적으로 싸운다고 한들 지옥성이 주저한다면 천웅방과 천사교 역시 방관할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무림맹이 대대적인 공세를 보인다면 상황이 다를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용묵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서 분명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하긴 한(恨)이 많은 놈이니까.”
모용세가는 가진 것에 비해 과소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이 모용세가의 한이었다.
태상가주인 십절무왕 모용묵은 그러한 성향이 매우 큰 인물이었다. 정사대전을 승리로 이끈 무림맹주라는 명예를 놓칠 모용묵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정사대전의 불씨만 키운다면 그는 덥석 물것이 분명했다.
“다만 분위기를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최대한 권한을 줄 테니, 대군사가 잘 만들어 보게나.”
“알겠습니다. 부천주님.”
혈천은 큰 것을 노리기 위해서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허나 그렇다고 숨죽여 있을 수는 없었다.
부천주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 아무래도 자하검제가 걸리겠지?”
“부천주님께서 움직이신다면 그가 나설 수밖에 없을 테니 당연합니다.”
혈천의 부천주인 동시에 사해련주인 사망도제가 직접 움직인다면 사천무림과 감숙무림은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아는 화산의 자하검제가 움직이는 것은 당연했다.
반대로 말하면 자하검제만 사라지면 사해련은 쉽게 중원 서부를 병탄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자하검제가 제(帝)의 명호가 붙은 만큼 강하다는 점이었다. 혈천조차 화경고수가 흔치 않았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자하검제를 감당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결국 오랜 칩거 중인 혈천주를 제외하면 부천주인 사망도제가 나서야 한다는 뜻이었다.
허나 숨고르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가 움직이는 것은 너무도 섣부른 행동이었다.
그걸 모를 사망도제가 아니었다.
“꼭 본좌가 나서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허나… 마땅한 분이 없지 않습니까.”
대장로와 대호법은 불편한 기색이었으나 나서지는 않았다. 괜히 발끈했다가 자하검제를 맡게 되면 그들로서도 곤란했다.
팔왕이라면 몰라도 오제는 그들도 자신할 수 없었다.
그것을 그들도 알고, 대군사와 부천주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말을 꺼낸 것은 분명 대안이 있기 때문이다.
“설마… 천주님께 청하실 생각이십니까!”
“허허 내 어찌 그런 불충을 생각할 수 있겠소?”
“그러시다면…….”
“…혈뢰 호법, 그대라면 방법이 있지 않소?”
부천주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혈궁주인 혈뢰검마에게 향했다. 다들 믿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혈뢰검마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혈뢰 호법께서 화경에 오르셨단… 말씀이십니까?”
“…….”
부정하지 않는 그를 보며 좌중은 소름이 돋았다.
혈천십삼세의 주인들 중 가장 어린 혈뢰검마였다.
그렇기에 은연중에 아래로 봤는데 알고 보니 상황이 전혀 달랐다. 덕분에 그들은 경각심이 생겨났다.
사실 팔왕의 한 명이자 베일에 싸인 검마(劍魔)가 바로 혈궁주였다. 정확히는 전대 혈궁주였다.
검마가 오랫동안 무림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사후 후계자인 혈뢰검마가 이대 혈궁주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대에 이어서 이대 혈궁주인 그 역시 화경에 올랐다는 것은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던 대장로와 대호법 역시 불편한 기색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