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 * *
“…….”
독왕은 늦은 시간이지만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침소에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했다. 중요한 선약이 있어서였다. 그런 그의 눈이 스르륵 떠졌다.
“…과연…….”
“…약조는 지켰습니다. 노선배님.”
독왕의 눈앞에는 한 청년이 서 있었다.
독왕전은 대제전 못지않게 경계가 철저한 중지였다.
독왕전 밖에는 묘족 출신 고수들이 지키고 있고, 안에는 만독궁의 정예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옥성 전체가 요새 중의 요새였다.
지옥성 내에 수천의 고수가 기거하고 있으며 지옥성 인근에는 수만의 무인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럼에도 청년의 침입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독왕만이 지척까지 접근한 후에 알게 될 정도였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 독왕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란희보다 어린 듯싶은데… 과연… 검신이라…….’
가부좌를 푼 독왕은 이현성에게 자리를 권했다.
호굴 안임에도 이현성은 잠시의 멈칫거림도 없이 독왕의 제안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런 그의 배짱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자신이 누군가. 독의 제왕이었다.
어떤 수작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의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배짱이라니,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라도 권하고 싶으나 의심 살 행동을 하고 싶지 않으니 양해해주게나.”
“물론입니다. 선배님.”
이 늦은 시간에 차를 준비한다면 누구라도 의심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 지옥대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무엇보다 적지에서 적이 주는 차를 마실 자도 없었다.
“그래… 내게 독대를 청한 이유가 뭔가? 이곳까지 찾아올 정도라면 그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네.”
“물론입니다.”
독왕은 기대가 되었다. 얼마나 대단한 일이기에 눈앞의 청년이 이런 무모한 짓을 하는 것일까.
이현성은 품에 손을 넣었다.
독왕은 흠칫했다. 그 직후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리 상대가 검신이라지만 까마득한 후배를 상대로 긴장한 모습을 보여줬으니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현성은 그의 마음을 알기에 모른 척했다. 그리고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무림맹주께서 이 후배에게 맡기신 겁니다. 독왕 선배께 전해달라고 말입니다.”
“…백 맹주께서 말인가.”
검신만 아니라 무림맹주까지 관여된 일이라는 말에 독왕은 더욱 긴장했다. 어쩌면 자신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부르르.
서신을 읽은 독왕은 몸이 떨려왔다. 천하의 독왕이 놀랄 정도로 엄청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게 사실인가.”
“제가 직접 소림과 무당 그리고 점창에 방문해서 받은 겁니다.”
“허…….”
남만의 자치권 인정과 불가침 조약.
독왕이 가장 원하는 일이었다.
척박한 남만보다 풍족한 중원에 꿈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위해서 묘족의 미래를 걸 생각은 없었다.
지옥대제에게 협력하는 것도 묘족의 안전 때문이지, 독왕 개인의 야망 때문이 아니었다.
“부족하십니까?”
“화경고수 두 분이 이름을 걸었고… 구파일방의 세 문파와 오대세가의 세 가문이 이름을 걸었거늘 어찌 부족하겠는가.”
“그럼…….”
오대세가의 수좌인 남궁세가나 구파일방의 화산과 개방이 적히지 않은 것이 아쉽지만, 무려 소림과 무당의 이름이 적혔다. 그러니 더 이상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하지만 세상 어떤 일이든 쉬운 것은 없었다.
“…자네의 수고는 고마우나 거절하겠네.”
“어째서입니까. 독왕 선배께서 원하시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현성의 물음에 독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이 협정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이.
“자네 말이 맞네. 나 역시 원하네.”
“그럼… 왜…….”
“소림과 무당 그리고 무림맹은 멀고, 지옥대제는 눈앞에 있네.”
“…….”
지옥대제가 독왕과 묘족의 이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말이었다. 지옥대제라도 소림과 무당 그리고 무림맹을 무시할 순 없었다. 허나 지옥성이 쪼개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독왕과 묘족을 굴복시킬 것이다.
쉽게 당할 독왕은 아니었지만 결국 지옥대제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왕(王)과 제(帝)의 차이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묘족의 힘은 남만에 흩어져 있고, 지옥성의 힘은 집약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대비한 지옥대제의 계책이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사파사세의 회담이 있었네. 게다가 사해련 때문에 무림이 소란스러운 상황이지. 이 협정서는 그냥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네.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상황이란 뜻일세. 허나 자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다시 생각해볼 의향도 있네.”
“…말씀하시지요.”
무림맹주의 이름에 소림과 무당의 이름까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독왕은 자신에게 무슨 제안을 하려는 것일지 모르기에 이현성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를 보며 독왕이 입을 열었다.
“이 협정서에 자네의 이름을 적는 것이 첫 번째 제안일세.”
“제… 이름입니까?”
“내가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으나 우리들은 늙었네. 비록 문파의 이름을 걸긴 했으나 세대가 바뀌면 얼마나 지켜질지 모른다네. 허나 자네는 다르지. 일 갑자 후에도 백 년 후에도 이 협정서의 증인이 되어줄 수 있을 테니까.”
“선배께서 절 너무 과하게 평가하신 것 같습니다.”
이현성은 천하제일고수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일 갑자가 아니라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었다. 허나 자신들의 시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시기만 그가 버틴다면 검신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렇기에 무림맹주의 이름보다, 소림과 무당의 이름보다 그의 이름이 필요했다.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러나 나 아닌 다른 이들도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걸게.”
“…….”
“두 번째 제안은 우리 묘족이 지옥성을 벗어나 남만에 도착할 때까지 자네가 운남에 남아 있는 것일세.”
“예?”
첫 번째 제안보다 두 번째 제안은 더욱 놀라웠다.
허나 무슨 의도인지 알 수는 있었다.
“안타깝지만 난 성주를 감당할 수 없네. 허나 자네와 함께라면 말이 다르지. 성주라도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할 테니까. 어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저는…….”
독왕은 검신 이현성이 홀로 지옥대제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허나 자신과 함께라면 견제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지옥성에 파견된 묘족들이 남만에 돌아간다면 지옥대제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이현성이 그때까지 돌아가지 않길 바랐다.
“…선배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고맙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현성도 고민이 되었다.
허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중원무림의 정기를 최대한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 혈천의 독주를 막는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대신 저도 청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혈천이라고 아십니까?”
“…혹 ‘그들’을 말하는 겐가?”
지옥성의 부성주이자 화경고수답게 짚이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위치쯤 된다면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많다. 덕분에 베일에 싸인 혈천에 대해서 어렴풋이 느낀 듯싶었다.
“그들이 전면에 나오면 선배님과 묘족이 도와주십시오.”
“으음… 거절한다면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그건 아닙니다. 허나 선배님께서 약조해주셨으면 합니다.”
이현성의 말에 독왕은 피식 거렸다. 생각 이상으로 재미있는 녀석이라 느꼈다.
“좋네.”
“정말이십니까?”
“자네가 무조건이라고 했다면 나 역시 재고했을 걸세.”
“감사합니다!”
계약이란 조건과 조건이 대립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허나 결국 인간이 하는 것이다.
차가운 이성만 내세운다면 믿음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이현성은 믿음이 가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독왕은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럼… 자네 이름을 여기에 적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으세.”
“예, 선배님.”
협정서에 검신 이현성의 이름이 적히는 것으로 협정이 체결되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맹주께 전하는 서신을 적어…….”
“……!!”
갑자기 독왕의 말이 멈추었다. 동시에 이현성의 눈이 커졌다. 두 사람 모두 느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이 그들에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그 기운이 누구의 것인지 바로 눈치챘다.
애초 이곳 지옥성에서 이런 기운을 가진 자가 또 있을 리가 없다. 독왕전의 고수들이 불청객에게 저항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저항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감히 막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설사 막으려 한다고 해도 막을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성주, 무슨 일이기에 이 시간에 방문하셨소?”
“…쥐새끼가 본성에 침입했다는 보고를 받았소. 혹 보셨소이까?”
“어느 간 큰 놈이 감히 본성에 침입한단 말이오?”
지옥성 부성주인 독왕의 거처를 허락도 없이 들이닥친 겁 없는 자는 바로 지옥대제였다. 지옥성의 주인인 그였기에 독왕전 고수들도 감히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애초 독왕은 사전에 독왕전 고수들에게 교육을 시켰다. 지옥대제에게 저항해서 개죽음을 당하지 말라고.
자존심이 상하는 지시였으나 쓸데없는 희생을 내는 것보다는 나았다.
“지옥안주(地獄眼主)가 정신을 못 차린 것 같구려. 내 대신 사과하리다.”
“아니외다. 그럴 수도 있지 않소.”
독왕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뻔뻔하게 대처했다.
지옥대제는 찜찜했지만 증거가 없었기에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전에 연락도 없이 간밤에 무작정 독왕의 침소까지 들이닥친 것은 명백한 무례이기 때문이다.
그가 돌아간 후 독왕은 한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지옥대제는 독왕의 침소에서 그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지옥대제의 기운을 느낀 이현성은 그가 들이닥치기 직전에 독왕전을 빠져나갔다.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만약 이현성이 그 자리에서 발각되었다면 아무런 대비도 못한 채 큰 싸움으로 발전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걸 알기에 독왕은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잘한 선택인지 모르겠구나…….”
* * *
빠드득…!
“한 놈도… 한 놈도 살려두지 않겠어!”
한 차례 사해련에 의해서 많은 제자를 잃은 청성의 대라신군이었다. 그럼에도 이성적인 판단을 하며 사천당가와 아미파가 폭주하지 않게 중재하던 그였다. 허나 더 이상 대라신군도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감숙성으로 향했던 삼천의 사천무림인 중 일천을 이끌고 사천성으로 돌아온 그였다.
사천성에 입성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알게 되었다.
청성의 원로이자 자신의 사제인 건곤신군이 동귀어진을 한 음풍귀조에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