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정체불명의 무리에 사천당가 본가가 반파된 후 사라졌던 당령이 의문의 사내에게 잡혀 있었다.
사내의 정체는 바로 천운성이었다.
사천당가의 본가를 반파한 후 천씨세가와 칠웅방은 광란의 시간과 전리품을 챙겼다. 금은보화와 같은 현물은 물론 독과 암기도 상당히 수거했다.
그 외에도 당가의 절색들 역시 끌고 왔다. 대표적인 인물이 당령이었다.
그녀는 천운성의 인질이자 성노리개가 되었다.
천운성은 이미 한번 성혼을 한 몸이었다.
허나 대업의 실패 후 그는 본처를 버렸다.
도찰원 우도어사와 황족의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본처는 천운성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다.
허나 그만큼 오만한 여인이기도 했다.
덕분에 그들 부부 사이는 원만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대업이 실패하면서 그녀는 더 이상 든든한 배경이 아닌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었다.
이에 천운성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본처를 버렸다.
긴 밤을 외롭게 지낸 천운성에게 미색이 뛰어난 당령은 모른 척하고 넘길 수 없는 보물이었다.
쫘악!
“일부러 그러는 거지? 사랑해 달라고?”
“이, 이 짐승 같은… 흐윽…….”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당령은 무척이나 초췌해져 있었다. 게다가 흐느끼는 모습이 천운성의 음심을 자극했다. 결국 그는 당령의 옷을 찢어버렸다.
그녀는 당황해서 몸을 가렸으나 오히려 천운성을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결국 당령은 한마리의 짐승이 된 천운성을 거부하면서도 받아들여만 했다.
그렇게 한참 열락 속에 허우적거리던 천운성은 욕구를 해결했는지 하의를 챙겨 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경고야. 한 번만 더 이런 헛짓거리를 하면 굶주린 놈들한테 던져버릴 거야. 더 이상 비참해지고 싶지 않으면 잘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천운성은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제 상의를 당령에게 던져주고 떠났다. 홀로 남은 그녀는 이 상황이 너무도 비참한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흑…흑… 아버지… 구해주세요. 이 지옥에서…….”
그녀는 모든 것이 두려웠다.
천운성에게 잡혀서 유린당하는 것이 두려웠고, 혈천이라는 알 수 없는 세력의 존재가 두려웠다.
무엇보다 혈천이 무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서 부친이라도 자신을 구해주지 못할 것 같아서 너무도 두려웠다.
그녀는 몰랐다.
부친인 당자성이 살부지수의 원한을 갚겠다고 눈이 뒤집어져 불나방처럼 불 속에 뛰어든 사실을.
반복된 실수
“보고 드립니다! 적이 반나절 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암군 당자성을 필두로 사천무림의 고수들은 감숙성으로 넘어왔다. 감숙성을 통해서 호남성으로 향하려는 사해련의 고수들을 징치하기 위함이었다. 빠듯한 시간이었으나 다행히 늦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시일을 맞추기 위해서 당자성은 사천무림의 일류급 이상의 고수들 삼천만 이끌고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동파는?”
“…그게 아직…….”
수하의 보고에 당자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했는데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 보고였다.
덕분에 당자성은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그런 놈들이 어찌 구파일방이라고! 사파놈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부족해서 이제 무섭다고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흠흠…….”
당자성의 감정이 너무 격해진 상태라서 그는 자신이 있는 자리를 그만 잊고 말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불편함을 느낀 자들도 있었다. 그제야 그것을 인지한 당자성은 머쓱해하며 사과를 했다.
“아…! 제가 너무 흥분했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신니, 진인.”
“아니오, 가주. 우리도 설마 공동파가 이런 선택을 할 줄은 몰랐소. 같은 구파일방으로서 부끄럽소.”
이 자리에는 사천무림의 명숙급이 모여 있었다.
그 중심에는 사천의 3대 기둥인 사천당가와 아미파 그리고 청성파의 수장들이 있었다. 죽은 독종 당철영에 이어 사천무림을 이끄는 자리는 그의 아들인 암군 당자성이 맡고 있었다. 허나 금정신니와 대라신군은 아미와 청성의 전대 장문인으로 당자성보다 배분은 물론 무위 역시 앞섰다. 그런 그들 앞에서 구파일방을 싸잡아 욕하는 꼴이 되었으니 자칫 분위기가 어색해질 뻔했다.
다행히 그들은 당자성의 발언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들 역시 공동파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무엇보다 하나가 되어도 부족할 판에 분란의 소지가 될 일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보다 곤란하게 되었구려. 공동파가 협조하지 않는다면 우리 쪽 초절정고수가 한 명 부족하니 말이오.”
청성의 또 다른 초절정고수인 건곤신군의 경우 지난 전투에서 입은 부상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이번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즉, 사천무림에서 참전한 초절정고수는 셋이란 뜻이었다.
그에 반해 사해련에서는 무려 넷이나 움직였다.
초절정고수 한 명이 전황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대했다.
강기는 오직 강기만이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초절정고수는 초절정고수만 막을 수 있다는 것이 무림의 정설이었다.
사천무림의 3대 고수가 발이 묶인 동안 몸이 자유로운 사해련의 초절정고수 단 한 명에 의해 사천무림인들이 유린당할 수 있으니 걱정되는 것은 당연했다.
한때는 초절정고수만 열이 넘었던 사천무림이었다.
일 갑자(60년) 전, 원(元)을 몰아내고 명(明)을 세우는 과정에서 중원무림은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사천무림 역시 당시 많은 피를 흘렸다.
그렇게 찾아온 평화는 일 갑자나 지속되었다.
일갑자는 무림인들의 독기를 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결과 사천무림은 전성기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상태가 된 것이다.
“미흡하지만 저희들이 버텨보겠습니다.”
“가능하겠소? 운가주.”
“저 혼자는 어렵지만, 연가주님과 금양문주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어찌 되지 않겠습니까?”
천북운가는 유백의 가문인 신룡유가와 함께 사천무림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세가였다.
대대로 초절정고수를 배출한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당대 가주는 아직 벽을 넘지 못했으나 곧 벽을 넘을 거라고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실제로 천북운가주는 사천삼세를 제외하고 사천무림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였다. 그리고 청천연가와 금양문 역시 천북운가와 비슷한 처지였다. 허나 그들 셋만으로 감당하기에 초절정고수는 너무도 강했다.
‘숙부님만 계셨어도…….’
사천당가는 독과 암기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독을 대표하는 인물이 죽은 독종 당철영이라면, 암기를 대표하는 인물이 암군 당자성이었다.
허나 과거에는 조금 달랐다.
탈명교수(奪命巧手) 당철기.
당철영의 이복동생으로, 당가제일의 장인이자 암기술의 대가였다. 소가주 자리는 물론 약혼녀까지 당철영에게 빼앗긴 후 당철기는 가문에서 사라졌다. 그런 그가 몇 년에 한 번씩 본가에 돌아와 당자성만 잠깐 만나고 사라졌다.
당자성이 독공 대신 암기술을 익힌 이유는 첫 번째가 선친의 벽 때문이라면, 두 번째 이유는 당철기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자성은 확신했다. 숙부인 당철기는 자신 이상의 고수라는 것을.
돌아가신 선친께는 죄송하지만, 당자성은 가주로서 숙부라도 가문에 돌아와 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깼다.
“미흡하지만, 저희가 거들겠습니다.”
“귀하들은…….”
임시 지휘소의 천막을 열고 웬 사내들이 들어왔다. 하나 같이 범상치 않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사천무림의 명숙들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감숙의 무부인 자광이 사천의 동도들께 인사드립니다.”
“섭중백이라고 합니다.”
“원후입니다.”
그들의 소개에 사천무림의 명숙들은 깜짝 놀랐다.
스스로 일개 무부라고 소개했으나 그들은 겨우 무부라고 칭할 자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의 방문은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매, 맹룡도객(猛龍刀客)!”
“가, 감숙칠숙이십니까?”
그들은 인정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감숙칠숙(甘肅七叔)은 공동파를 제외한 감숙성 최고의 고수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난주사가(蘭州四家)의 주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맹룡도객 자광은 감숙무림에도 몇 없는 초절정고수이기도 했다.
현재 사천무림이 가장 원하는 존재인 셈이었다.
다만 그들 셋은 정파출신이 아니었다. 물론 사파출신도 아니었다. 옥문관과 가욕관을 지키던 장수 출신으로, 퇴역 후 무림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엄밀히 말하면 정사지간으로 봐야 한다.
“미력하지만 한 손 거들기 위해서 왔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감숙칠숙께서 합류하실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글쎄요? 우리 감숙무림을 대표하는 자들이니 곧 오지 않겠습니까?”
대답하는 섭중백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감숙의 터줏대감인 난주사가와 어느 날 갑자기 이름을 떨치게 된 그들 삼인.
감숙칠숙이라고 묶여서 불리고 있지만,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난주사가가 몸을 사리자, 그들은 이를 기회로 여기고 나타난 것처럼. 그 속내에 어찌되었든 사천무림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잘된 일이었다.
그들의 합류로 질 수 없는 싸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해련 놈들에게 우리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줍시다!”
* * *
쾅!
“모른 척하라고 했거늘… 그자들이 정말!”
난주사가의 맏형격인 탕마장주(蕩魔莊主)는 공동파의 속가제일 고수답게 사문의 명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사문의 결정에 따라서 그는 사해련의 고수들이 감숙성을 지나가는 것을 모른 척하기로 했다.
나머지 난주사가 역시 공동파의 뜻을 거스를 수 없기에 따르기로 했다. 감숙성에서 공동파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 자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난주사가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자신들을 제외한 감숙칠숙의 나머지 셋이 문제를 일으켰다.
공동파의 뜻을 거스르고 사해련의 고수들과 싸우겠다고 사천무림인들의 진형에 제 발로 찾아간 것이다.
“장주님. 나머지 두 놈도 두 놈이지만, 맹룡도객은 정말 강합니다. 그들이 사천무림을 도와서 사해련을 막아내면 우리의 입장이 무척 우습게 됩니다.”
“맞습니다. 이대로 모른 척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난주사가의 주인들은 탕마장에 모였다.
맹룡도객을 위시한 삼인의 돌발행동 때문이다.
그들이 강하다고 하지만 감숙의 터줏대감은 바로 자신들이었다. 대대로 쌓은 명성과 민심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허나 예상치 못한 작은 금이 결국 둑을 무너트리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는 법이었다.
터줏대감인 난주사가가 모른 척하는데, 그들이 사해련을 막는데 일조한다면 명성과 민심이 그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탕마장주를 제외한 셋은 불안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막아낼지도 모른다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이미 그들이 생색이란 생색은 다 냈는데, 이제 와서 합류해봤자 무슨 빛을 보겠는가.”
“하지만 나중에 외면 받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자신들은 정파인들이었다. 외면당하는 순간 정파로서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게 된다. 대를 거쳐서 지금의 위치를 이룬 그들로서는 흠집이 생길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탕마장주의 생각은 달랐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