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그렇기에 그들은 지옥성의 영역이 아님에도 하룻밤을 묵고 있었다. 그런 곤명에서 자신의 신분을 알면서 접근했다는 것은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허나 란희는 차분하게 대처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본인은 이현성이라고하오. 란희 소저.”
란희는 순간적으로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분명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허나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이현성… 이현성…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인데…….’
처음에는 점창파의 젊은 고수들을 떠올렸다.
누가 뭐라 해도 운남무림 최고는 점창파니 당연한 생각이었다. 허나 알려진 점창의 젊은 고수들 중에 이현성이란 이름은 없었다.
그렇기에 운남무림의 후기지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연 그들 정도의 실력으로 기척 없이 다가오는 것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던 중 갑자기 떠올랐다. 자신이 왜 이현성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은지.
“검…신!”
“후후… 맞습니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지옥성의 란희 소성주님. 정주 이가장주인 이현성입니다.”
“……!!”
란희는 감정을 조절하는 것을 실패하고 기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검신은 무림 최고수 중 한 명으로, 그녀의 양부인 독왕보다 윗줄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살왕(殺王)을 죽인 검신을 칠왕(七王)의 위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검신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허나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분명 의도적인 접근이었다.
“그렇게 놀라실 필요는 없소, 란희 소저. 본인은 란희 소저를 해할 생각이 없소. 그저 청이 있어서 무례인줄 알면서 늦은 밤, 소저의 처소에 방문한 것이오.”
“…….”
란희는 말을 아꼈다.
그의 목적은 알 수 없으나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닐 것임은 예상되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이현성은 다시 입을 열었다.
“…독왕 노선배와 독대를 하고 싶소. 물론 독대 사실은 소저와 독왕 노선배 외에는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소.”
“…! 아, 아버님과 독대를……!!”
너무도 놀란 란희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순간 소리를 지른 것을 깨닫고 자신의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가 분명 독왕과 독대 사실을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그 직후 소리쳤으니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이현성은 피식 웃었다.
“이 방을 중심으로 3장 내에는 아무도 없소. 그리고 기막을 쳤으니 우리의 대화는 아무도 듣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걱정 마시오. 소저.”
“그렇…군요. 죄송해요. 검신 님.”
“아닙니다.”
란희는 다시 한번 눈앞의 사내가 검신이라는 것을 상기할 수 있었다. 단순히 기감으로 3장 내를 살피는 것은 절정고수인 자신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허나 기막을 펼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독왕 노선배와 독대를 주선해주실 수 있겠소?”
“…이유를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검신의 이름을 믿으나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아버님께 말씀드리긴 어려워요.”
“…자세한 것은 알려드릴 수 없소. 란희 소저를 못 믿는 것이 아니라 독왕 노선배님과 독대를 하려는 이유이기도 하오. 다만…….”
란희는 그의 말에 살짝 실망스러웠다.
허나 이현성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명분이 필요하다면 전해주시오. 독왕 노선배와 묘족의 미래를 위함이라고…….”
“……!”
그의 말에 란희는 눈이 살짝 커졌다.
이현성의 말에 걸리는 단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묘족의 미래라고? 지옥성의 미래가 아니라?’
해석하기에 따라서 다른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묘족은 지옥성의 4할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허나 분명한 것은 묘족과 지옥성은 하나이자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옥성의 4할이 묘족이라면 나머지 6할은 한족이었다.
지옥대제는 지옥성 아래 한족과 묘족은 하나라고 말하였지만, 그들의 이탈을 언제나 우려하고 있었다.
자신과 나백의 혼사도 이를 방지하기 위함이지 않던가.
“독왕 노선배께는 그 정도도 충분할 거라 생각하오만… 부족하오?”
“아버님께… 전해드리지요. 허나 장담을 할 수는 없어요. 결정은 제가 아닌 그분의 몫이니까요.”
“물론이오. 본인의 말이 독왕 노선배께 전해지는 것이 중요하니 말이오.”
이로써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가 나와 줄 지는 알 수 없으나 이현성은 독왕이 자신의 청을 외면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독왕은 지옥성의 부성주이기 이전에 묘족의 수장이었으니까.
“…그는 세 시진 후에 깨어날 것이오. 원한다면 지금 깨워줄 수도 있소.”
“검신께서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소저께 원하신다면 그리하리다.”
이현성은 들어올 때처럼 돌아갈 때 역시 아무런 기척도 없이 사라졌다.
그 엄청난 능력에 란희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이런 능력이라면 이곳이 아니라 지옥성 역시 드나들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다음에는 지옥성의 침소에서 만나게 될 것 같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란희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내일 무슨 변명을 할지 기대가 되네요. 나백 소.성.주.님.”
* * *
“으~으~아~!”
잠자리가 무척 마음에 드는지 나백은 기분 좋게 잠에서 깼다. 그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침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곤 곧 얼굴이 굳어졌다.
지옥성 일행은 객잔을 통째로 빌리고,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는 별채 중 하나를 그의 침소로 삼았다.
객잔 내에는 별채가 몇 개 존재하는데, 별채들마다 구조가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헉! 서, 설마!”
나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지난밤 기억의 편린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러던 중 하필이면 누군가의 찢겨진 옷 조각이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
“젠장,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나백은 지옥성 대표로 사파사세의 회담을 갈 때, 란희가 동행한다는 것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공적인 임무였지만 함께 있을 시간이 많은 만큼 그녀의 마음을 열게 할 기회라 여겼다. 허나 자신의 노력에도 란희와 마음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거리를 두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자가 있었다. 천사교의 소교주라는 사마염이었다. 결국 사파사세의 회담은 사마염 때문에 중단되고 말았다.
자신 때문은 아니었지만, 소성주로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것 같아서 오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이런 복합적인 문제로 점점 마음이 답답해졌고, 결국 지난밤 폭발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서 시작한 술이, 한잔 두잔 늘어나면서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응어리를 자극하고 말았다.
결국 나백은 그녀와 몸의 거리라도 줄이겠다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술을 마셨다. 그게 화근이었다.
“그보다 어떻게 된 거야? 하긴… 한 거야?”
지난밤 거사(?)를 치렀다면 자신이 벌거벗고 있어야 정상인데, 모든 옷을 입고 있었다. 과음 때문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로인해 마음 한구석에 찜찜함이 남았다.
“그보다 그녀는 어디에 있는 거야?”
“기침하셨습니까, 소성주님.”
“흠흠… 란희 소성주는… 어디에 계신가?”
침소에서 나오자 지옥성 고수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나백은 멋쩍음을 감출 수 없었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그들이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죽실에 계십니다.”
“아, 그렇군. 알겠네.”
그들이 묵고 있는 객잔의 별채는 매난국죽의 네 개로 구성되었다. 매실은 나백이, 난실은 원래 란희가 묵었으나 지난밤 그가 차지하고 말았다.
그리고 국실은 독군이 차지했다.
그렇기에 죽실은 현재 비어 있어야 하는데, 거처를 빼앗긴 란희가 묵은 듯싶었다.
“소성주님 식사를 준비할까요?”
“흠흠… 란… 아니, 다른 분들은 식사하셨는가?”
“이미 식사를 마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음… 나는 됐네.”
이 기분으로 식사를 했다가는 얹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식사를 거르고 죽실로 향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를 알아야 답답한 마음이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성주께 내가 왔다고 일러라.”
“…예, 소성주님.”
나백의 말에 묘족 출신 전사가 방 안으로 그의 방문을 알렸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허락의 뜻이었다. 쉽게 문이 열린 것을 봐선 그녀가 화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그만의 착각이었다.
“흠흠… 잘 주무셨소?”
“지난밤에는 허락도 없이 들어오시더니, 오늘은 물으시는군요. 소성주님.”
“…….”
란희의 돌아오는 말에 나백은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냉랭했다.
“어, 어제는… 어… 그러니까… 으음…….”
나백은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는지 횡설수설했다.
그럴수록 그녀의 마음은 더욱 굳건히 닫혀버렸다.
그는 몰랐다. 독왕의 은혜를 갚기 위해 그녀가 나백과의 혼사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런데 지난밤의 일로 그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평생 그를 따르며 순종적으로 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걱정 마세요. 소성주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었으니까요.”
“그, 그렇군. 하, 하하…….”
란희의 말에 나백은 어색한 웃음소리만 냈다.
차라리 거사를 성공했다면 무슨 진전이라도 있었을 텐데, 어설프게 파투나면서 거리만 더 멀어지게 되었다.
몸의 거리는 물론 마음의 거리까지도.
“수하들은 입단속을 시켰으니 성주님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볼일 다 보셨으면 그만 나가주시겠어요. 돌아갈 채비를 해야 해서…….”
“아, 알겠소. 그만 나가보리다.”
란희의 어투에서는 냉랭함을 넘어 고저조차 사라졌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순간적으로 울컥했으나 지은 죄가 있으니 그냥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백이 나가자 란희는 확고하게 마음이 정해졌다.
“돌아가면 아버님께 말씀드려야겠어. 그분의 청을…….”
* * *
‘아버님께… 아버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해!’
여인은 불안한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도망쳤다.
허나 그녀의 도주는 쉽지 않았다. 그녀를 쫓는 추격자가 있기 때문이다.
“순순히 나와라. 네년이 도망친다고 해서 내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
여인은 사내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사내였다.
그리고 절대 들켜선 안 되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흐흐흐… 여기 있었군.”
“제, 제발 저를 놔주세… 캭!”
“내게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죽어서일 뿐이다.”
“차…라리… 죽여라! 날 죽이라고! 흑…흑…흑…….”
서럽게 우는 여인을 보며 사내는 측은하게 여기긴커녕 비웃을 뿐이었다.
“무림인 놈들은 알려나? 독하기로 유명한 독화(毒花)가 이런 계집이라는 것을 말이다.”
놀랍게도 여인의 정체는 독화 당령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