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독왕의 수양딸
“읍… 하… 하…….”
노인은 독특한 호흡을 하고 있었다.
허나 독특한 것은 호흡만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노인은 나체 상태였다.
“흡! 하…….”
눈을 감고 있던 노인이 갑자기 눈을 뜨자 순간 눈부신 안광이 번쩍였다. 잠시 후 안광이 사라진 노인의 눈은 무척이나 맑고 깊었다.
결코 노망난 노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 노인의 귓가에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형, 경하 드립니다!”
“…사제. 그런데 경하라니 무슨 말인가?”
“아…! 아직 깨닫지 못하셨군요. 사형께서 드디어 벽을 넘으셨습니다.”
“벼, 벽을 넘어? 내, 내가 말인가! 사제!”
나체의 노인은 너무도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그를 보며 사제라는 노인이 무언가를 건넸다.
바로 점창파의 무복이었다.
“흠흠… 사형, 그 나이에 참 건강하십니다. 민망하니 어서 이 옷을 입으십시오.”
“그게 무슨… 헉!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노인은 기겁했다. 자신이 벌거벗은 상태였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거처였다고 해도 민망한데, 이곳은 점창산의 어느 분지였다.
말하자면 주변이 훤히 보이는 장소였다.
노망이 난 것도 아닌 바에 이럴 수는 없었다.
당황한 노인은 사제가 건넨 무복을 급히 입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사형께서 벽을 넘으셨다고… 환골탈태를 하시는 과정에서 입고 계셨던 옷이 녹아버렸습니다.”
“환골…탈태? 그럼 정말 내가… 화경에… 화경에 올랐단 말인가!”
놀랍게도 노인은 노망 난 것이 아니라 화경에 오른 것이다. 본인도 믿기지 않는지 몇 번이나 되물었다.
그런 노인을 보며 사제라는 노인은 귀찮은 기색도 없이 몇 번이고 대답해주었다.
“정말 경하 드립니다. 이로써 본 파는 물론이고 운남무림에도 화경고수가 생긴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아! 그러고 보니 난 검신과 비무를 했지? 검신께선 어디 계시는가?”
노인의 정체는 바로 점창 제일 고수인 관일창군(貫日槍君)이었다.
신창합일의 상태였을 때까지는 기억이 있으나 선을 넘는 순간부터는 기억이 없었다. 스스로를 잃고 창에 홀렸으니 그 이후로 기억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가 보군요. 그럼 검신께 살기(殺氣)를 뿜어내셨던 것도… 기억이 안 나십니까?”
“사, 살기라고? 그게 정말인가!”
“설마 했는데… 정말이군요. 사형께선 정말 위험하셨습니다. 그분이 아니셨다면 화경은커녕 평생의 공부를 모두 잃으실 뻔했습니다.”
두 사람의 비무를 모두 지켜본 사일신군이었다.
처음에는 당황했기에 관일창군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그가 쓰러진 후에야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명색이 점창파의 장문인직을 수행했던 사일신군이었다. 그러니 무(武)에 홀린 것이 뭔지 모를 리가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전해들은 관일창군은 기겁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정말 아찔한 상황 속에 있었던 것이다.
“어디 계신가? 당장 은공께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네.”
“검신께선 며칠 전에 떠나셨습니다. 천웅방에 갔던 지옥성의 소성주들이 돌아오고 있다고 하시면서…….”
“그런…….”
길고 긴 장로회의 결과 점창파는 협정서의 내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문과 운남무림을 위해서 그게 최선임을 그들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현성이 베푼 은혜를 알게 된 장문인은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관일창군이 화경에 오른 사실이 많은 변수가 될 수 있기에 아직은 사일신군과 장문인만 알고 있었다. 장로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입이 많아지면 비밀이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독왕과 협정만 마무리되면 다시 뵐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렇지. 그때 인사를 드릴 수 있겠군.”
독왕이 협정을 거부한다면 지옥대제를 막기 위해서 이현성이 점창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협정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다시 방문할 테니 감사의 인사를 할 기회는 아직 남아 있었다.
관일창군은 지척에 떨어져 있던 자신의 창을 쥐었다.
“그럼 그때까지 수련을 해야겠네. 다시 만났을 때 부끄러운 모습을 은공께 보이지 않으려면…….”
* * *
“아버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짐을 덜어들어야 함이 옳지만…….”
늦은 밤이건만 란희는 쉬이 잠에 들지 못했다.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지옥대제는 오래전부터 나백과 란희의 혼사를 원했다.
소성주인 나백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고, 묘족과의 강력한 유대를 맺기 위함이었다. 그녀의 양부인 독왕은 오래전부터 지옥대제로부터 무언의 압박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비록 수양딸이지만, 그에게는 란희가 친딸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원치 않는 혼약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허나 말하지 않는다고 그녀가 모를 수는 없었다.
“그를 지아비로 모시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그녀도 나백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좋다는데 싫을 여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백은 분명 괜찮은 사내였다.
지옥대제의 후계자이자 초절정고수이며 외모 역시 준수했다. 허나 그에게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그의 숨겨진 본성(本性)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는 그러지 않았으나 나백은 오만하고 권위적인 인물이었다.
천웅방에서 본 천사교 소교주인 사마염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나백 역시 그릇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평생을 맡기고 순종하려 하니, 양부의 은혜를 알면서도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돌아가면… 확실하게 마음을 정리해야… 음? 뭐지?”
늦은 밤이건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웠다.
“소, 소성주님. 이러시면 아, 안 됩니다.”
“비켜! 내가 누구인지 몰라!”
지옥성의 무사들은 무척이나 난감했다.
지옥성 제일 소성주인 나백이 흠뻑 취해선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의 문 뒤에는 놓인 것은 제 2 소성주이자 자신들이 모시는 란희의 침소였다.
묘족 출신 지옥성 무사인 그들로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러시면, 컥!”
“으아악!”
란희의 호위를 위해서 차출된 묘족 출신 전사들은 충분히 고수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초절정고수인 나백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사 막을 힘이 있다고 한들 소성주인 나백의 몸에 손을 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들은 나백의 주먹에 의해 나가떨어졌다.
“모두 물러나 있어. 방해하는 새끼는 모조리 죽여 버리겠어.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그렇게 나백은 막무가내로 란희의 침소로 들어갔다.
그의 경고 아닌 경고로 인해 호위들은 발을 동동 구른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소성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잠을 깨워서 미안한데!”
란희의 한결 같은 차가운 반응에 나백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생각인지 언성을 높였다.
그럼에도 란희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어디가 어떻게 마음에 들지 않느냔 말이다!”
란희는 나백의 말에 처음으로 움찔했다. 허나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소와 같은 태도로 일관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나백은 서운하고 더욱 화가 났다.
“…저는 소성주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 그럼 내게 마음이 있는 게요?”
“…….”
예상치 못한 란희의 대답에 나백의 얼굴이 활짝 폈다.
허나 그의 되물음에 란희는 말을 아꼈다.
그녀의 그런 반응은 나백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그로 인해 나백은 평소와 달리 상당히 흥분했다.
“네년이 그렇게 잘났어? 대 지옥성의 소성주이자 지옥대제 님의 유일한 적자인 나 나백을 무시할 정도로!”
“…저는 소성주님을 무시한 적이… 흐윽!”
이미 감정조절을 할 수 없었던 나백은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란희는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벽으로 몰렸다.
그녀는 나백의 두 손이 강하게 움켜쥐고 있는 어깨의 통증보다 그가 오늘은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에 더욱 떨렸다.
실제로 나백은 그럴 요량으로 술을 마구 마셨다.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끝을 내기 위해서였다.
“내일… 술이 깨시면 그때 다시 말씀… 흐윽!”
“아니, 더 이상은 안 돼. 지금 내 여자로 만들고 말겠어!”
제법 취했음에도 나백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그녀를 점혈했다. 설마 나백이 이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란희는 무방비 상태에서 점혈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제발 이러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몸이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그럼…….”
쫘악!
우악스러운 나백의 손이 그녀의 상의를 찢어버렸다.
마음이 급한 그는 평소보다 더 거칠었다.
순간 란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허나 흥분한 나백은 그녀의 눈물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의 손이 하의로 향할 때였다.
“어…어…….”
“…….”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잔뜩 흥분해 있던 나백이 갑자기 잠이 든 것이었다.
란희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으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치욕을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일단은 안도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스스로 해혈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나백은 너무도 완벽하게 점혈을 했다.
‘어떡하지… 누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하지만 이 모습을 남에게 보일 수는 없는데…….’
그녀는 여전히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난감했다.
그가 깨기 전에 점혈로 막힌 혈도가 풀기길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어? 어?”
“이제 괜찮소. 소저.”
란희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움직이기는커녕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하지만 더 놀란 점은 자신과 나백 외에 또 다른 사람, 그것도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점혈을 당해서 기운을 쓸 수 없었다고 하지만 누군가가 지척에 올 때까지 몰랐다는 것은 놀랄 일이었다. 그것도 창과 문이 모두 닫힌 자신의 침소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란희는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냈다.
“란희 소저. 그대의 침소에 허락 없이 방문한 것은 본인의 잘못이지만, 위기에서 구해줬거늘. 고맙다는 말도 없이 너무 경계만 하는 것 아니오?”
“……!!”
생각보다 젊은 사내의 모습에 란희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어진 사내의 말이었다.
‘날… 알아? 도대체… 누구이기에…….’
사내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의미다.
결국 우연이 아닌 의도적으로 방문했다는 뜻이었다.
그녀. 정확히는 천웅방에서 돌아온 지옥성의 대표들이 머무르고 있는 이곳은 운남성의 성도인 곤명의 어느 객잔이었다. 곤명은 운남무림의 영역이지만, 지옥성의 물자 역시 유통 받는 만큼 암묵적인 중립지대이기도 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