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사일신군의 호통에 장로들은 창피한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금은 물러났지만 장문인 자리를 맡았던 사일신군이었다.
무려 검신이 무의미한 방문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런 행동은 점창파의 체면만 깎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웬만해서는 나서지 않으려던 사일신군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자칫 소란스러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정리해준 사일신군에게 이현성은 눈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맹주님께서 제게 부탁하신 일을 완수한다면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일이 틀어진다면 제가 남아서 한손 거들겠습니다.”
“…주님께서 부탁하신 일이 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두 분이 계시지만, 장문인께서 계신 자리이니 장문인께 드리겠습니다.”
관일창군과 사일신군의 배분이 높다고 하지만 점창파의 수장은 장문인이었다.
그렇기에 이현성은 무림맹주가 준 협정서를 장문인에게 전달했다.
장문인은 이현성이 건넨 협정서를 조심스럽게 읽었다.
“……!!”
“무슨 일인가. 장문인.”
“…다른 분들께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리고 점창파에서 거절하신다면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장문인은 협정서를 관일창군과 사일신군에게 먼저 건넸다. 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자신조차 당황스러운데, 자존심 강한 두 분이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흥분해서 검신에게 달려들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의외로 두 사람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일신군은 협정서를 장로들에게 건네며 이현성에게 물었다.
“맹주령에 의한 강권입니까?”
“그럴 리가요. 다만 독왕과 묘족은 중원인이 아닙니다. 그들만 물러난다면 운남무림에게 그만큼 부담이 덜어질 수 있기에 드리는 제안입니다. 그렇기에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귀파에서 원치 않으신다면 협정서는 파기하셔도 됩…….”
이현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로들이 버럭 화를 냈다.
“아니, 어찌 이런 일을 검신께서 마음대로 결정하신단 말입니까!”
“…본파를 어떻게 보고!”
“죽으면 죽었지, 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뒤늦게 협정서를 읽은 장로들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자존심이 강한 점창파의 장로들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자존심 하면 구파일방 제일이라는 점창다웠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자존심만 내세울 때가 아님을 알기에 이현성은 안타까웠다.
“갈! 네놈들은 우리가 늙었다고 보이지도 않더냐! 어디서 감히 언성을 높이느냐!”
“사형, 진정하십시오. 사질들도 본파를 사랑하는 마음에 한 실수입니다. 그리고 너희들…….”
“예? 예…….”
제일 먼저 흥분해서 협정서를 갈기갈기 찢을 줄 알았던 관일창군과 사일신군이 오히려 평정심을 유지하자 장로들은 그게 더 당황스러웠다.
그런 그들을 보며 사일신군이 말을 이었다.
“방금 검신께서 맹주님과 총군사의 제안이란 말을 못 들었느냐!”
“하, 하지만…….”
“사제들… 지금 사부님 말씀에 말대꾸를 하는 겐가! 죄송합니다. 사부님…….”
“아닐세. 장문인.”
관일창군 때문에 많이 가려졌으나 사일신군 역시 한 성질 하던 인물이었다.
그런 사부가 오랜만에 몽둥이를 들 것 같다는 생각에 장문인이 먼저 나선 것이다.
과연 아무나 장문인을 맡는 것은 아닌 듯싶었다.
사일신군의 써늘한 시선에 장로들은 움찔했다.
동시에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검신께서 돌아가면 교육을 다시 시키겠다는 것을.
관일창군과 사일신군이 입을 다물자 장문인이 점창을 대표로 이현성에게 의견을 물었다.
“검신께서 보시기에 독왕이 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장문 사…….”
장문인의 말에 장로들은 당황해서 그를 불렀으나 관일창군과 사일신군의 시퍼런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이현성도 입을 열었다.
“만독궁주였던 독왕께서 지옥성의 부성주가 된 것은 묘족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임은 모두 아실 겁니다. 협정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협정은 무림맹주이신 백의무제님을 필두로 소림과 무당 그리고 오대세가의 세 가문이 이름을 걸고 보장했습니다. 개방의 이름도 추가하지 못했으나 장왕께서도 개인적으로 동참하셨지요. 이제 점창의 이름만 들어간다면 독왕께서도 최소한 고민을 하실 겁니다.”
화경고수 두 명과 태산북두라는 소림과 무당이 구파일방을 대표했으며, 오대세가의 세 가문이 동참했다.
이 협정서에 점창파까지 이름을 올린다면 매우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묘족의 미래를 생각하는 독왕이라면 충분히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말하니 장문인은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겠지요. 저희끼리 상의를 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건 제안에 불과합니다. 결정은 귀파의 몫입니다.”
“…….”
이현성과 암월은 관일창군, 사일신군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로 인해 장문인실에는 방 주인인 장문인과 장로들만 남게 되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결국 장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제들의 생각은 어떤가?”
“…이게 생각할 일입니까?”
“맞습니다. 아무리 자신들의 일이 아니라지만 본파를 뭐로 보고!”
“말이 좋아서 협정이지, 그들이 두려워서 피하는 것밖에 더 되겠습니까?”
장로들은 하나 같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렇기에 장문인은 더욱 답답했다.
그 역시 점창의 제자로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허나 자신은 장문인이었다.
때문에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판단을 해야 한다.
무엇이 사문과 천하에 도움이 되는지를 냉철히 판단해야 했다.
그때 마형준이 입을 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막내! 지금 뭐라고 했는가!”
“감히……!”
예상치 못한 마형준의 말에 그의 사형들인 장로들은 버럭 화를 냈다.
그게 점창파의 장로로서 할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사형들의 강경한 태도에도 이번만큼은 마형준도 목소리를 높였다.
“소제가 주제넘었다는 것은 압니다. 허나 지금의 평화가 본파에 의해서 유지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본파 아니, 운남무림의 힘으로 지옥성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정사대전이 발발한다면… 과연 우리가 막을 수 있을까요? 무림맹이 저희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겠습니까?”
“…….”
“…….”
평소 스스로의 의견을 내세우지 않았던 막내 사제 마형준이었다.
그런 그의 말에 흥분했으나 장로들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수긍할 수도 없었다.
“독왕이 묘족을 이끌고 물러난다면 설사 정사대전이 일어난다고 해도 지옥성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애초 본파와 운남무림을 위한 일입니다. 이 일로 검신께서 득을 보실 것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먼 길을 와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분을 비난하려고 하십니까?”
“…….”
“…….”
지옥성의 4할을 차지하는 독왕과 묘족이었다.
그들이 협정을 받아들이고 물러난다면 설사 지옥성이 움직인다고 해도 충분히 감당할 만하였다.
물론 지옥대제가 여전히 버겁지만, 그와 독왕을 동시에 감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때 장문인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자네들이 착각하는 게 있네.”
“…그게 뭔가요. 장문 사형.”
“마지막 결정은 우리가 아닌 독왕이 하는 것일세. 그가 거절한다면 애초 협정은 이루어지지도 않네.”
“……!!”
치욕스럽지만 맞는 말이었다.
자신들이 다 찬성해도 독왕이 거절하면 끝이었다.
자신들이 협정을 받아들인다고 독왕도 무조건 받아들인다는 보장은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현실을 망각하면 안 된다.
“…무조건 반대가 아니라 본파의 장로로서 차분하게 생각해서 의견을 말하게.”
장문인의 주도하에 장로회의가 진행되는 사이 점창산 어딘가에서는 관일창군과 이현성이 창검을 겨누고 있었다.
* * *
챙! 채챙!!
“과연… 대단하오, 검신.”
모든 결정을 장로회의에 맡긴 관일창군은 이현성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두 사람의 연배를 생각하면 이 광경은 무척이나 어색하였지만, 이현성이 검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인에게 배분도 중요하지만, 강자존의 법칙에 따라 강자는 존중받을 수밖에 없었다.
예로부터 점창은 삼가병법(三家兵法)으로 유명했다.
삼가병법은 도검과 창이라는 세 가지 무기를 다루는 법을 일컫는데, 도(刀)는 낙일도법과 검(劍)은 사일검법 그리고 창(槍)은 관일창법이 그 주인공이었다.
다만 검을 만병지왕이라고 부르는 중원무림의 풍토로 인해 점창파 역시 검을 택한 자들이 주류를 걷게 되었다.
그 결과 점창하면 사일검법과 분광검법을 떠올리게 되었다.
허나 관일창법은 점창의 자존심이었다.
그걸 알기에 이현성도 그의 청을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창검을 겨누게 되었다.
관일창군은 이현성의 검을 받아내며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본파의 창도 그에 못지않음을 알려주겠소!”
“기대가 됩니다. 노선배님.”
사람들은 사일검법의 빠름 때문에 본질을 잊고 있었다.
사일검법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해를 떨어트릴 정도로 강력하고 중후한 검법이었다.
다만 눈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기에 극쾌를 추구한다고 오해할 뿐이었다.
관일창법도 사일검법과 다르지 않다.
창검의 차이를 생각하면 오히려 관일창법의 위력이 사일검법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관일창군은 그런 관일창법의 대가였다.
전력을 다하려는지 관일창군의 기세가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강렬했다면 이제는 상당히 묵직해졌다.
덕분에 이현성은 더욱 기대가 되었다.
콰쾅!
과연 명성대로였다.
쾌속함도 쾌속함이었지만, 그 위력은 정말 대단했다.
허나 이현성이 감당치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관일창군 역시 느끼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소.”
관일창군은 그저 오기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진정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창격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관일창군은 지치긴커녕 오히려 속도와 위력이 점점 강력해졌다.
지금까지는 마음껏 창을 휘두를 상대가 없었다.
실수로 상처를 입힐 수도 있으니 사제 사일신군과 비무를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지옥성에 쳐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런 관일창군이었기에 모든 기량을 쏟아낼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모든 기량을 끌어올릴 시간이 필요했다.
그 결과 합을 나눌수록 관일창군의 창은 점점 강력해졌다.
흠칫!
이현성은 관일창군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신창…합일(身槍合一)…….”
전심전력을 다해서 창을 휘두르는 관일창군이 무의식적으로 신창합일을 이루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몸과 창이 하나가 되는 상태가 바로 신창합일이었다.
초절정고수라도 신창합일을 이루지 못할 수 있지만, 일류고수도 신창합일을 이룰 수 있었다.
신창합일의 상태는 무위가 아닌 얼마나 진심으로 창과 교감을 나누느냐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신창합일을 이룬다고 단숨에 위력이 급증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창과 하나가 된 만큼 억지스러움이 사라진다.
억지스러움이 존재하기에 빈틈이 생기는데, 신창합일의 상태에선 그 빈틈이 사라진다.
그만큼 상대하기가 어려워진다는 뜻이었다.
쾅! 콰쾅!
‘과연…….’
이현성은 관일창군의 창을 받아내는 것이 점점 버거워졌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