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그런 결정을 한 공동파를 비웃을 수는 없었다.
그만큼 사해련은 가볍게 볼 세력이 아니었다.
허나 공동파의 결정을 분개하는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 * *
쾅!
“겁쟁이 놈들! 어찌 명문정파란 자들이 목숨보다 소중한 명예를 버린단 말인가!”
사천당가의 신임 가주인 암군 당자성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사파사세의 회담이 중단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그는 분노를 넘어서 어이가 없었다.
조롱도 이런 조롱이 없기 때문이다.
당자성은 사해련의 대표이자 사망도제의 손자인 적천우를 죽여서 자신의 분노를 만천하에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또 다른 소문을 듣게 되었다.
적천우를 호위하기 위해서 사해련의 대군이 움직였다는 소문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막아야 할 공동파가 그들의 행보를 묵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시 한번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부친을 잃고 여식은 사라졌으며 본가가 반파되는 치욕을 맛본 그로서는 저만 살겠다고 몸 사리는 공동파의 행태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사천 전역에 알려라! 지난 치욕을 갚기 위해서 동참하라고!”
“존명!”
수개월 전의 일로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사천당가였다.
당자성만 아니라 사천당가인 전원이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당자성의 선언이 아니라고 해도 사천무림인들은 이미 출정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모 형제 그리고 전우를 잃은 것은 사천당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몰랐다. 이 모든 것이 사망도제의 큰 그림이라는 것을.
아니, 설사 알았다고 해도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복수에 눈이 먼 그들이니까.
“이놈들… 본가가 흘린 피를 열배 아니, 백배로 갚아주고야 말겠다!”
사해련의 대군 파견과 사천무림의 출정 소식은 천하를 다시 한번 두렵게 만들었다.
협정서
“당 노사의 비보를 들었을 때, 이런 일을 예견하긴 했으나…….”
“그러게 말일세.”
두 노인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점창파의 전대 장문인인 사일신군(射日神君)과 그의 사형이자 점창제일 고수인 관일창군(貫日槍君)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난 두 사람이지만, 결코 모든 짐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사파사세인 지옥성이 운남성 남부를 지배하고 있어서였다.
운남무림이 손을 잡고 지옥성을 견제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이 평화는 지옥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이 욕심을 내는 순간 운남무림과 점창파의 미래는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일선에서 물러났음에도 여전히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그런 그들이건만, 최근은 더욱 답답해졌다.
사해련의 행보와 사천무림의 출정 때문이다.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다. 그들의 충돌이 정사대전의 시발점이 될 거란 사실을.
“장문인이 연신 운남무림의 명숙들을 모아서 대책회의를 하고 있다지만…….”
“그게 어디 쉽겠는가.”
지옥성이라는 공공의 적 덕분에 운남무림은 점창파를 중심으로 똘똘 뭉칠 수 있었다.
허나 이렇다 할 대책을 마련할 수 없었다.
그만큼 지옥성은 강했고, 운남무림의 힘은 미약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무림맹에서도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형.”
“허허 무림맹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맹주께서 사람을 보내실 정도라면 분명 뭔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구파일방이자 정파무림의 일원으로서 무림맹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전적으로 의지할 수도 없었다.
무림맹과 운남성까지의 거리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일이 터진 후 움직인다면 늦는다.
무림맹의 지원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운남무림이 지옥성에 의해 완전히 짓밟힌 후일 테니까.
그래도 명색이 무림맹주가 사람을 보냈다고 하니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었다.
다만 운남무림이 필요한 것은 한 명의 절대고수이지, 다수의 무인이 아니었다.
허나 절대고수는 쉽게 움직일 수 없는 법이다.
그들의 무게를 생각하면 쉽게 청하기도 어렵고, 그들의 움직임이 자칫 사파사세를 자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음? 형준이 아니더냐.”
“제자 마형준, 사부님과 사숙님을 뵙습니다.”
40대의 중년 사내가 두 사람을 찾아왔다.
그는 관일창군의 제자이자 점창파의 장로인 마형준이었다.
50대인 다른 장로들에 비하면 가장 어린 편이었다.
그런 그가 점창제일 고수인 관일창군의 제자가 된 것은 그만큼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형준은 점창파의 숨겨진 패이기도 했다.
“그래 무슨 일이더냐?”
“무림맹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해서 장문 사형께서 사부님과 사숙님을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이미 맹주로부터 사람을 보낸다는 연락을 받았기에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들을 부른다는 것에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비록 초절정지경에 오르지 못했지만 현 장문인과 장로들은 강하였다.
특히 장문인의 경우는 곧 초절정지경에 오를 거라 기대할 정도였다.
무림맹의 손님 때문에 자신들을 부른다는 것은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고수가 방문했다는 뜻이었다.
아니라면 일선에서 물러난 자신들을 청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마형준이 살짝 흥분한 듯 보였다.
“도대체 누가 왔기에 장문인이 우릴 청하는 것이더냐?”
“그게…….”
대답하는 마형준의 표정에서 경외감이 살짝 엿보였다. 덕분에 두 사람은 더욱 의아했다.
마형준은 자신들을 제외하고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허나 이어진 마형준의 말에 그들의 눈이 커졌다.
“…검신께서 방문하셨습니다!”
“……!!”
“…! 검신이라면…….”
“예. 살막의 살왕과 역적 천진룡을 벤 검신 이현성 대협께서 본파에 방문하셨습니다!”
재차 대답한 마형준의 대답에 그들은 경악했다.
설마 무림맹주가 보낸다는 사람이 오제와 비견된다는 검신일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해도 그들은 무림인이었다.
화경고수인 이현성의 방문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먼저 갈 테니, 따라오거라!”
“헉! 사형! 형준 사질, 우리도 가세나.”
“예. 사숙님.”
점창파 장문인실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저 차를 마시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이 침묵은 무림맹에서 온 손님들 때문이다.
사문에 대한 자부심은 물론 자존심 하나는 구파일방 제일이라는 점창파였다.
그런 점창의 장문인과 장로들이 안절부절못했다.
그만큼 무림맹에서 온 손님은 대단한 존재였다.
그러던 그들의 안색이 갑자기 밝아졌다. 누군가의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노인이 장문인실 안으로 급하게 들어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장문인과 장로들이 역정을 냈겠지만, 그는 예외였다.
무림맹의 이름을 빌려서 방문한 이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학 이현성이 관일창군 노선배님을 뵙습니다.”
“빈도를 알아보셨소?”
점창파는 공동파 다음으로 실전적이고 세속화되었으나 근본은 도문이었다.
물론 도사의 신분을 유지하지 않는 제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도적에 도명을 적은 인물도 많았다.
그 대표격이 관일창군이었다.
“대 점창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그런 점창에서도 제일의 기도를 가지신 노선배님을 못 알아 볼 리가 없지요.”
“허허허… 빈도를 높게 평가해주니, 고맙소.”
이현성이 먼저 후배로서 선배인 관일창군을 인정해주자 그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했다.
이로서 점창의 자존심을 지킨 셈이었다.
평정심을 되찾은 관일창군이 두손을 들었다.
“검신을 뵈어 영광이오!”
“헉!”
포권을 취해서 예를 갖추는 관일창군을 보며 그의 사질들인 장문인과 장로들은 기겁했다.
관일창군은 점창파의 자존심이라고 불린다.
그의 무위가 점창 제일이기도 하지만 젊은 시절 자존심 하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었다.
나이를 먹고 많이 유해졌으나 손자뻘인 이현성에게 이렇게 격식을 갖출 줄은 몰랐다.
그런 사질들의 시선에도 관일창군은 신경 쓰지 않았다.
허나 그와 달리 이현성은 신경이 쓰였다.
“노선배님. 이 후배, 감히 감당키 어렵습니다.”
“아니오. 나이를 떠나서 한 사람의 무림인으로서 화경에 오른 검신께 예를 갖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외다.”
그의 진심을 읽은 이현성은 오히려 그의 순수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또 다른 기척이 느껴졌다.
조금 전에 자리를 비웠던 마형준과 또 다른 노인이었다.
“사일신군 노선배님시군요.”
“맞소. 사제… 검신이시네.”
“검신을 뵈어서 영광입니다.”
사일신군은 살짝 눈이 커졌다. 사형이 이렇게까지 정중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관일창군과 달리 장문인직을 수행하면서 조금은 정치적 성향을 가지게 된 그였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사일신군이 계산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게 간략한 인사를 마치자 장로들은 뒤로 물러나 관일창군과 사일신군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자 이현성은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이미 아시겠지만, 중원무림의 정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를 걱정하신 맹주님과 총군사께서 제게 한가지 청을 하셨습니다.”
“…….”
이현성의 말에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 역시 예상하고 있던 바였고, 이현성의 말을 끊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런 그들의 배려에 이현성은 주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대 점창파와 운남무림의 저력을 믿고 있으나 지옥대제와 독왕이 우려된다고 하셨습니다.”
“…….”
이어진 이현성의 말에 그들은 입을 뗄 수 없었다.
조금 전과 달리 침울해졌기 때문이다.
점창파를 필두로 운남무림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허나 지옥성은 그 이상으로 강하였다.
물론 지옥성이 움직인다고 해도 충분히 발을 묶을 수는 있었다.
화경고수인 지옥대제와 독왕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가능했다.
지금까지는 그들이 나서는 일이 없었기에 다행이었지만, 정사대전이 발발한다면 그때도 침묵할 거란 보장이 없었다.
아니, 당연히 움직일 것이다.
점창파를 대표하는 관일창군과 사일신군이라도 지옥대제와 독왕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게 감숙무림과 마찬가지로 운남무림의 최대 문제였다.
그때 막내 장로인 마형준이 입을 열었다.
“검신께서 그들을 막아주실 수 있으십니까?”
“사제!”
“아… 죄, 죄송합니다.”
이 자리에서 이현성을 제외하고 가장 어리다고 해도 마형준은 마흔이 넘었다.
게다가 대 점창파의 장로였다. 때문에 경거망동해선 안 된다.
허나 내심 이현성이 수락해주길 바랬다.
그런 그들의 기대와 달리 이현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죄송할 게 무엇이 있겠습니다. 다만 장로님의 말씀에 대답한다면… 어렵습니다.”
“역시… 그렇겠지요.”
어렵다는 이현성의 대답에 장로들은 살짝 실망했으나 절망하진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지옥대제와 독왕을 동시에 감당하는 것은 태극검선도 장담할 수 없을 텐데, 아직 어린 그에게 그것까지 기대하는 것은 애초 무리였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감당해준다면 운남무림의 부담감이 그만큼 줄어든다.
그런 그들의 기대가 와락 무너지고 말았다.
“저는 운남에 그리 오래 있지는 못합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냥 떠나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만! 검신께서 아직 말씀도 끝나지 않았거늘…! 그리고 본파의 장로란 녀석들이 어찌 이리 쉽게 흥분을 하더냐!”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