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꼬리가 길면 언젠가 밟히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하는 결론을 유도하기 위해서 그들 간의 사전협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을 말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어느 누구도 사파사세의 회담이 이렇게 길어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기껏해야 서너 날. 길어봤자 열흘은 안 넘길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같은 사파사세라고 하지만 천웅방에 오래 있어봤자 서로에게 좋을 게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예상과 달리 벌써 보름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그것은 한 세력. 정확히는 한 사람 때문이다.
“환희요후, 소루주의 능력으로 어찌 안 됩니까?”
“그 아이도 소교주를 최대한 설득하고 있으나 요지부동이에요.”
천사교 소교주인 사마염은 사파사세의 동맹이 아닌 사파연맹을 주창하고 있었다.
게다가 맹주 자리를 자신의 조부인 천사존이 맡는 것이 아니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당연히 나머지 삼세의 대표들은 사마염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환요의 육탄공세에 언제나 마음이 녹아내리던 사마염도 이번만큼은 요지부동이었다.
덕분에 환요는 무척이나 난감했다.
“허… 그렇다고 그놈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도 없고…….”
“그러게 말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천사존을 맹주로 옹립해서라도 사파연맹을 탄생시키고 싶었다.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천사존이라면 사파연맹의 힘을 쓰고 싶어서 안달할 테니, 혈천이 원하는 대로 정사대전을 일으킬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허나 자존심하면 나머지 삼세의 주인들 역시 빠지지 않는다.
자신들의 위에 누군가를 둘 바에는 차라리 사파연맹을 안 만드는 쪽을 택할 자들이었다.
그러니 상황만 복잡해지고 있었다.
“차라리 삼세만 먼저 동맹을 맺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런 안 됩니다. 성승이 움직일 때를 생각하면 사존이 필요합니다.”
천사교가 사파사세 중 규모가 가장 작음에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것은 사파제일이라는 천사존이 있기 때문이다.
지옥성의 두 화경고수인 지옥대제와 독왕이 힘을 합쳐도 천사존을 압도하지 못한다.
잘해야 동수. 최악에는 천사존의 손에 두 사람 모두 죽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만큼 천사존은 강하였다.
그렇기에 유일하게 성승와 비교되는 것이다.
물론 성승의 진정한 경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성승과 천사존을 동등한 수준으로 봐도 되는지는 지금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들 성승의 유일한 대적자로 지목되는 자는 천사존뿐이었다.
물론 무림만 아니라 황실까지 그 범위를 넓힌다면 태태감도 있으나, 그는 수개월 전에 제거되었기에 이제 천사존이 진짜 유일하다.
“그 어린놈의 새끼를 죽일 수도 없고…….”
“…음? 그놈을 죽인다라…….”
“노, 농담입니다.”
독군이 홧김에 한 말을 천패가 의외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덕분에 이를 말한 독군은 당황스러웠다. 허나 천패는 농담이 아니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 같소.”
“진담…이십니까, 천패. 자칫 흔적이라도 남으면 정사대전은커녕 우리끼리 공멸할 수도 있습니다.”
편법을 사용했다고 해도 명색이 초절정지경에 오른 사마염이었다.
이들 중 사마염보다 못한 자는 없으나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제거하는 것은 어렵다.
무엇보다 이곳은 천웅방 내부였다.
만에 하나 흔적이라도 남는다면 천사존이 이를 묵과할 리 없었다.
오히려 이를 명분삼아서 움직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정작 무림맹의 힘을 깎아내지 못한 채 사파무림만 몰락할 수 있었다.
혈천의 입장에선 결코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 되지 않겠소?”
“설마 흔적을 조작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눈이 커진 독군의 물음에 천패는 씨익 웃었다.
그의 말처럼 흔적을 위장할 생각이었다.
“본방을 탈퇴한 암월영패의 소행으로 만드는 것이 어떻소?”
“암월영패라면… 검신의…….”
천패의 말에 독군은 물론 음풍귀조와 환희루주 역시 눈이 커졌다.
전혀 생각지 못한 방도였다. 그러나 나쁜 계획은 아니었다.
특히 환희루주는 무척이나 반겼다.
이가장. 특히 암월에게 빚이 있기 때문이다.
“검신이 신산의 손녀사위이니, 사존의 눈을 정파로 돌릴 수 있겠네요. 본녀는 찬성이에요.”
“허나… 천웅방주의 눈을 피해서 흔적을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때 음풍귀조가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다른 곳도 아닌 천웅방 내에서 천웅방주의 눈을 속이는 것은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천웅방 팔패인 천패가 그러한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미 방안을 생각해두었다.
“우리가 직접 움직일 필요가 있겠소? 이럴 때를 대비해서 준비한 것들이 있지 않소?”
“…!! …혈살객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때마침 혈살객의 한 무리가 호남성이 있었다.
천웅방 내에서 누군가를 암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무려 천사교의 소교주라면 더더욱 불가능하였다.
허나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만 힘을 쓴다면 작은 틈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물론 사마염을 암살할 기회를 만드는 것과 달리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까지는 책임질 수 없었다.
아깝기는 하지만 혈룡대와 달리 혈살객은 언제든 폐기할 생각으로 양성한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혈살대(隊)가 아닌 혈살객(客)인 것이다.
게다가 이곳 호남에 있는 혈살객들은 혈천의 중추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자들이었다.
버림 패로 사용한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중요한 일에 써먹는 것이 현명하였다.
“모두 동의한다면… 본천에 연락해두겠소.”
“본녀는 동의하지요.”
천패에 이어서 환희요후까지 찬성하니 독군과 음풍귀조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허나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흐음… 과연 천웅방주와 천사교주가 속아 넘어갈까?’
* * *
“미친! 천웅방 내에 있는 천사교의 소교주를 암살하는 것도 미친 짓인데, 미친개가 안 잡히게 만들라니!”
천패 등 혈천 호법들이 요청한 사안은 빠르게 승인되었다.
상부에서도 그들의 계획을 나쁘지 않게 평가한 덕분이었다.
결정이 난 즉시 호남성 비밀안가로 명령이 하달되었다.
호남성 비밀안가에서 대기 중인 혈살객들은 반골들답게 상부의 명령에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 중에서도 특별히 더 짜증을 내는 자가 있었다.
“대장로 개자식! 그게 쉬운 줄 아나!”
호남성 비밀안가에서 대기 중인 혈살객들의 대장은 미친개라고 불리는 혈견살객(血犬殺客) 초운비였다.
그는 철우와 달리 휘하 혈살객들을 장악하지 못했다.
물론 그 역시 초절정고수답게 힘으로는 수하들을 굴복시켰다.
허나 마음까지는 얻지 못했다.
이미 그들에게 입김이 닿는 자들이 따로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해약만 아니었어도… 젠장!”
반골답게 충성에 의해 누군가의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었다.
금제에 대한 해약을 대가로 충성을 요구받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구냐!!”
“킥킥 천하의 당랑(螳螂)이 내 기척도 못 느낄 정도로 고민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흑주(黑蛛), 네놈이 여긴 웬일이야!”
사마귀(당랑)와 검은 거미(흑주). 결코 평범한 이름들이 아니었다.
허나 그들에게는 무척 어울리는 이름들이었다.
두 자루의 낫(鎌)으로 적의 목을 베는 모습이 흡사 사마귀 같아서 당랑이라고 불린 자와 강철조차 끊는 강사(剛絲)로 적을 토막 내서 죽이는 흑주.
초운비 휘하만 아니라 혈살객 전부를 통틀어서 손가락에 꼽히는 미친놈들이었다.
평소 친하지도 않는 흑주가 찾아왔으니 당랑이 경계하는 것도 당연하였다.
게다가 조금 전의 중얼거림을 들었다면 그것 역시 곤란했다.
“대장로 새끼도 뭔가 지시를 내렸나 보네?”
“‘도’? 그럼 설마…….”
“맞아. 대군사 늙은이도 내게 지시를 내렸어.”
“너도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 것 같더니, 그게 대군사 그 늙은이였어?”
당랑 역시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흑주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대놓은 묻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젠장, 너도 같은 지시가 내려왔을 것 같으니 묻겠는데. 어쩔 거야? 이게 말이 되는 명령이야?”
“물론 노망도 이런 노망이 다 있나 싶다. 하지만 대장 새끼를 살리기 위해서는 아닐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대장 새끼가 누구야? 미친개잖아. 대장로나 대군사가 언제 물지 모르는 미친개를 살리려고 할까? 분명 미친개를 이용한 또 다른 수작을 부리려는 게 틀림없어. 수작 부리는 게 그 늙은이의 특기 아니냐?”
흑주의 말에 당랑은 반박하지 못했다.
흑주의 추론은 일견 그럴듯했다.
문제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한들, 천웅방에 있는 천사교의 소교주를 암살하는 것은 물론 혈견살객을 잡히지 않고 도주하게 만드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항명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목숨 줄을 쥐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몰랐다.
‘역시 개수작이었군. …좋아, 나 역시 이용해주마.’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자는 놀랍게도 초운비였다.
이번 지시는 석연치 않았다.
물론 이런 말도 안 되는 지시를 언젠가는 받을 줄 알았다.
얼마 전 친형제와 마찬가지인 철우에게 무림맹 총군사의 암살령이 떨어졌다.
그 내막이 뇌옥에 갇힌 혼세교 우사와 혁련세가주의 입을 막기 위해서 시선을 돌리려는 수작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천사교 소교주를 암살하는 것 역시 그와 비슷한 맥락이란 것을 눈치채고 있던 차에 그의 기감에 무언가가 잡혔다.
자신의 수하 중에서도 가장 신경 쓰이던 흑주였다.
느낌이 좋지 않던 초운비는 흑주의 뒤를 밟아서 당랑의 거처까지 따라오게 되었다.
덕분에 석연치 않았던 부분을 해결하게 되었다.
‘어차피 네놈들 역시 제거할 생각이었는데, 이참에 모조리 죽여주마.’
초운비는 철우와 둘만이 아는 비문을 통해서 그의 생존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십여 년 전에 죽은 줄 알았던 의형 이현성이 사실 살아 있다는 것 역시 알게 되었다.
당장이라도 그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수하인 동시에 감시자인 저들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그들을 모두를 죽이고 떠나고 싶었다.
어차피 자신은 세뇌나 금제로부터 자유로우니 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그렇게 된다면 혈천의 추적을 받게 된다.
혈천의 거대한 힘을 아는 만큼 섣부른 움직임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고대하던 기회가 왔다.
‘나 역시 목숨을 걸어야 하겠지만…….’
사파사세인 천웅방에 있는 천사교 소교주의 암살이었다.
희생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를 잘 이용하면 남의 칼로 그들을 죽이는 것은 물론 자신의 존재를 죽음으로 위장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지금 상황에서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혈천 상부에서는 자신의 도주를 이용해서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듯하였다.
그렇기에 역으로 도주가 아닌 죽음으로 위장할 생각이었다.
물론 여차하면 위장이 아니라 자신이 진짜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내가 왜 미친개인지 이 기회에 확실히 알려주마…….’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