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현원진인은 태극검선의 직계사손으로서 무당 삼대신공인 태극신공을 익혔기 때문인지 기운이 무척이나 현묘했다.
게다가 무당 장문인답게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속은 무척 강인해 보였다.
“맹주님의 서신은 받았습니다.”
“예,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현성은 협정서를 건넨 후 간략한 설명을 했다.
그것만으로도 현원진인은 협정서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고민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본파 역시 동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문인의 결단 덕분에 앞으로 흘릴 피를 많이 줄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림맹주의 청과 소림 장문인의 동참. 이제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협정서에는 소림과 무당이라는 이름이 적히게 되었다.
이로써 협정서는 무척이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내심 개방처럼 거절당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던 이현성은 안도할 수 있었다.
이제 점창파의 동의만 받는다면 독왕과 협상을 할 수 있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점창파가 자존심을 부리며 동의를 거부한다면 독왕과의 협상은 시작도 할 수 없었다.
운남무림은 점창파의 영역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허나 점창파 역시 지금 자존심을 부릴 때가 아님을 알기에 그럴 가능성은 낮다.
“아닙니다. 본파가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도와야지요.”
과연 무당다웠다.
“제갈가주님, 바쁘시지 않으시다면 저와 차나 한 잔하시지요.”
“장문인께서 주신다면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검신께선 괜찮으시다면 어느 분을 만나 뵈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이현성은 굳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자신을 부르는 듯한 누군가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기운을 가진 자는 무당파에 단 한 명뿐이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장인어른, 장문인…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 그렇게 하게.”
“다음에 또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검신.”
눈치 빠른 제갈인섭은 누가 이현성과 만나자고 하는지 깨닫고는 당황스러워했다.
그런 그를 뒤로 한 채 이현성은 자소궁을 나갔다.
그는 안내인도 없이 어딘가로 향했다.
상당히 넓은 무당파였기에 초행이라면 길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현성은 그럴 염려가 없었다.
자신을 부르는 기운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당산 끝자락의 어느 봉우리에 도착하자 한 노진인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무림말학, 이현성이 태극검선을 뵙습니다.”
“만나서 반갑네. 무릇 소문이란 과장되기 마련이거늘… 자넨 소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과하지 않군.”
“과찬이십니다.”
노진인의 정체는 바로 무당의 전설 태극검선이었다.
황실의 수호신이었던 신비무선이 태태감과 함께 등선하면서 유일한 일선(一仙)이 된 그였다.
그의 기운은 조금 전 만났던 현원진인과 비슷했지만, 그 격이 달랐다.
현원진인이 태극을 품기 위해서 수양 중이라면 태극검선은 이미 그 자체가 태극이란 느낌을 주었다.
아무리 무림에서 검신이라고 불린다지만 이현성은 스스로 고개가 숙여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태극검선은 위대한 무인이었다.
“수년 전에 성승을 마지막으로 뵈었네. 그때 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었지. 그때만 해도 대단한 동량이 나왔다고만 생각했는데… 허허 과연 성승의 눈은 빈도보다 뛰어난 듯하군.”
이현성은 태극검선이 언급한 청년이 누구인지 알아차렸기에 부끄럽기만 했다.
자신이 아무리 뛰어나도 두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님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인자한 미소를 짓던 태극검선의 분위기가 진중하게 변했다.
“성승만 못 하지만 빈도 역시 천기(天氣)를 헤아릴 줄 아네. 그분의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네. 그런데 빈도 역시 더 이상 속세의 연을 맺지 않으려고 하네.”
“……!!”
선인이란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로, 정과 연에 얽매여선 안 된다.
그렇기에 우화등선을 꿈꾸는 태극검선은 이미 오래전부터 속세의 연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만 수년 전 예상치 못한 성승과의 만남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말았다.
태극검선은 고민에 빠졌다.
등선을 위해서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연을 끊어야 할지, 아니면 천하를 위해서 포기할지를.
그 고민은 지금까지 이어졌다. 허나 결국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 결정이 이현성을 이곳에 부르게 되었다.
“오늘 빈도는 속세와의 연을 끊을 걸세. …하늘이 빈도에게 원하는 마지막 소명을 완수하고 말일세. …검을 쥐게, 검신이여.”
“…….”
이현성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검을 쥐었다.
태극검선의 말에는 항거할 수 없는 미증유의 힘이 느껴졌기에 자신도 모르게 반응한 것이다.
그런 그를 보며 태극검선은 인자함 대신 진중한 기세를 보여주었다.
이는 결코 장난이 아님을 알려주는 듯싶었다.
“하늘이시여…! 제게 주신 마지막 소명을 다하겠나이다.”
쾅!
주르륵.
“큭!”
“이제 시작이거늘… 벌써 지쳤는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직접 검을 부딪치자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태극검선의 검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무림에선 이선(二仙)과 오제(五帝)를 같은 선상에 두었으나 분명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이선과 오제를 따로 분리한 것이다.
실제로 신비무선이 일성일존 외에는 적수가 없다는 태태감을 상대로 잠시마나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이선이 오제보다 강하였다는 증거였다.
물론 오제 역시 강하다.
오제급으로 분류한 역적 천진룡만 해도 그가 내상을 입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이현성이 아무리 편법을 사용했다고 한들 치명상을 입히기 어려웠을 터였다.
하물며 우화등선을 목전에 둔 태극검선이었다.
그런 그를 이현성이 감당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현성의 눈빛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훗훗… 그것으로는 많이 부족하네.”
이를 악문 이현성은 검강을 발현해서 태극검선을 공격했다.
태극검선은 검을 가볍게 휘두르는 것만으로 이현성의 검강을 상쇄시켰다.
허나 이현성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순간 수없이 많은 꽃잎이 태극검선에게 휘몰아쳤다.
첫 번째 검강은 그의 시선을 잡아두기 위함이었고, 천중비화를 응용한 일천의 검강이야말로 이현성의 진정한 공격이었다.
일검에 응집한 검강만은 못하지만 천중비화의 꽃잎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태극검선의 눈이 커졌다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과연… 허나…….”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태극검선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거대한 태극문양이 나타났다.
천중비화의 일천 검강은 태극검선이 펼친 태극문양과 충돌했다.
“헉!”
이현성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태극문양과 충돌한 천중비화의 일천 검강이 상쇄될 줄 알았는데, 아무런 폭발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태극문양의 흐름에 따라가서 일천 검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태극문양에 따라서 움직이던 천중비화의 일천 검강이 이현성에게 되돌아왔다.
이현성은 그제야 태극문양에 담긴 무리를 엿볼 수 있었다.
“이화접목(移花接木)!”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서 공격하는 무리(武理)로, 무당을 상징하는 태극이야말로 이화접목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현성 역시 자주 사용하는 무리였지만, 태극검선의 이화접목은 격이 달랐다.
천중비화의 일천 검강이 더욱 강력하게 되돌아왔다.
그러니 그가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것은 이해가 되었다.
강을 강으로 상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방법이었다.
쾅! 콰쾅! 쾅! 쾅! 쾅!
검강으로 인해 연이은 폭발에 시야가 가려졌음에도 태극검선은 피식거렸다.
“젊다고 해서 패기만 믿고 설치지는 않는군.”
태극검선의 말을 증명하듯 의외로 그 폭발 속에서 이현성은 큰 피해 없어 보였다.
되돌아온 천중비화의 꽃잎들을 주변으로 흘려버렸기 때문이다. 또다시 천중비화를 펼쳐서 상쇄시키거나 혼원주천을 펼쳐서 되돌리는 방법도 있었다.
허나 태극검선을 상대로 이화접목을 펼치는 것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렇기에 이현성은 대처 방법을 바꾼 것이다.
그런 그를 보며 태극검선이 나직하게 말했다.
“과연… 하늘이 내게 마지막 소명을 내리실 만하구나. 허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네.”
* * *
“음!”
암월과 귀림의 호위들은 무당파에서 내어준 도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물론 말이 휴식이지,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기감을 넓혀둔 상태였다.
그러던 중 암월이 벌떡 일어났다. 귀로는 들리지 않으나 미세한 기파가 그의 기감에 느껴졌기 때문이다.
호위책임자이자 이가장 호법인 암월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귀림의 호위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도관 밖으로 나오자 족히 종심(從心 : 70세)쯤 되어 보이는 노진인들이 다가왔다. 그들에게서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으나 암월은 경계심이 거두지 않았다.
“…막을 것이오? 진인.”
“무량수불…! 결코 이 대협께 해가 되는 일은 아니니, 기다려주십시오. 도우.”
“…….”
암월은 노진인들의 정체를 알아차렸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은 무당파 전대 장문인과 장로들인 적자 배분의 원로들이었다.
소림삼신승에 비견되는 무당삼검성은 암월도 승패를 자신할 수 없는 고수들이었다.
그 외 원로들 역시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은거한 무당 원로들이 직접 나와서 암월을 만류한다는 것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다 보니 암월로서는 쉽사리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사숙의 마지막 길이외다. 도우. 부디 기다려주십시오.”
“…무당(武當), 그 숭고한 이름을 믿겠습니다.”
그들의 말에 암월은 눈이 커졌다. 무당 원로들이 사숙이라고 칭한 존재하는 단 한 명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암월은 무당의 이름을 거론했다.
그들의 말이 거짓이라면 사생결단을 하겠다고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무당 원로 중에는 뼈가 있는 암월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는 자들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수양이 깊은 진인들인 만큼 도호를 읊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때 사달이 나고 말았다.
콰콰쾅!!
무당파가 자리 잡은 자소봉까지 들릴 정도로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주군!”
“도, 도우! 이런!”
암월은 본능적으로 폭음의 진원지를 향해 달려갔다.
그의 돌발행동에 무당 원로들은 당황했다. 동시에 그들 역시 폭음에 신경이 쓰였다.
태극검선과 관련된 일이니 당연하였다.
“먼저 갈 테니, 저들과 본파 제자들을 안심시켜주게나.”
“사, 사형!”
무당파 전대 장문인을 포함한 무당삼검성은 폭음의 진원지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귀림의 호위들은 암월의 뒤를 따르려고 했으나 무당 원로들이 지풍을 날려서 제압을 했기에 움직일 수 없었다.
태극검선과 이현성의 일을 방해하는 것은 암월 한 명으로 족했다.
‘무량수불…! 사숙… 부디 뜻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 * *
“쿨럭… 쿨럭…….”
누군가 연거푸 기침을 했다.
단순한 기침이 아닌지 쿨럭 거릴 때마다 피가 섞여 나왔다.
피가 섞인 기침을 하고 있는 자는 이현성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노쇠한 촌부 한 명이 기침을 하고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태극검선이었다.
그토록 심후했던 기운을 다 잃고 세상 풍파를 한 몸에 다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