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정주를 떠난 줄 알았던 의제 철우가 버젓이 장원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현성은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이야기는 대충 들었습니다. 성님께서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제가 아닙니다.”
“아…….”
그랬다. 의협대가 쫓던 살수는 철우가 아니었다.
하지만 단순한 오인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살수는 분명 혈살객이었으니까.
“그럼 네 동료란 말이더냐?”
“제 동료라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아닐 겁니다. 무림맹에 투입된 것은 저희만이 아니거든요.”
“자세히 말해 보거라.”
혈천의 정주 비밀안가에서 해후했을 때는 적묘의 부상이 워낙 심각해서 긴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무림맹의 일 역시 자세히 설명할 수 없었다.
철우의 이야기를 들은 이현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확실하더냐. ‘그놈’인 것이.”
“얼굴까지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교두님과 흑오 녀석이 해준 말이니 맞을 겁니다. 아, 흑오는 혈살동에서 사귄 녀석인데…….”
“……!!”
지금 나올거라 예상치 못한 이름에 이현성의 눈이 커졌다. 흑오. 회귀한 후 한번도 만나지 못한 또 다른 의제의 이름이었다.
인연은 너무도 오묘했다. 흑오와의 인연이 이렇게 다시 이어진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구나. 교두님이라니? 그리고 운비는 살아 있느냐?”
“검귀 교두님 기억하시죠? 성님이 돌아가신 아니, 그런 줄 알게 된 후에 교두님께서 저희를 많이 챙겨주셨습니다. 아니었다면 혁련후 그 개자식에게 진즉에 당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운비 녀석도 잘 있습니다. 성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면 무척 좋아할 겁니다.”
너무도 반가운 이름들에 이현성은 가슴이 설렜다.
그만큼 고맙고 미안한 이들이었다.
“그랬구나. 정말…다행이구나. 다행이야.”
그렇게 두 사람은 못 다한 회포를 풀었다.
그 시각, 누군가 정주를 벗어나 급하게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빌어먹을! 나 혁련후가 꼴이 우습게 되었구나!”
의협대의 추적을 받고 있던 인물은 철우가 아니라 바로 혁련후였다.
가뜩이나 부상으로 몸 상태가 안 좋은데 분혼술의 부작용까지 발생하면서 그의 몸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렇다고 한들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세가의 고수들이 의협대의 발을 묶고 있으나 얼마나 붙잡고 있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난… 이렇게 안 죽는다. 기필코… 기필코…! 복수해주마!”
한참을 달리던 혁련후의 눈에 나루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주 북문에서 불과 몇 시진 거리에 황하가 있었다.
그가 이곳으로 온 목적은 배를 타고 하남성을 떠나기 위함이었다.
서쪽에는 개방, 동쪽에는 소림. 그리고 남쪽에는 무림맹이 있는 이상 육로로 움직이는 것은 위험했다.
게다가 체력마저 바닥이었기에 배 말고는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복면을 벗고 상처를 안 보이게 가린 혁련후가 배에 탑승했다.
운 좋게도 바로 떠날 수 있는 배가 있었다.
“끄응…! 운기행공이라도 해야겠어.”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이 부서질 정도로 고통이 밀려왔다. 무방비하게 운기행공을 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다른 방도가 없었다.
허나 그조차 곧 방해받게 되었다. 막 배가 떠나려고 할 때, 한 무리가 오더니 운항을 지연시켰다.
“우린 무림맹 의협대요! 악독한 살수 놈이 도주했소! 이 배에 탑승했을 수 있으니 협조를 부탁하오!”
“하, 하지만…….”
“부탁드리겠소, 선주(船主).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운항이 지체되면 그 자체만으로 손해였기에 선주는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무림맹이 행사한데다 혹여 정말로 살수가 탔다면 나중에라도 곤란해질 수 있기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무림맹 고수들의 등장에 승객들은 당황했다.
“저희는 무림맹의 의협대입니다! 여러분들의 귀한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허나…….”
의협대주 조현이 승객들을 상대하고 있을 때, 대원들은 바로 배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수십 명을 태울 수 있는 제법 규모 있는 배였지만, 의협대원들이 움직이자 빠르게 수색할 수 있었다.
허나 살수는 생각보다 쉽게 발각되지 않았다.
“칫! 이 배가 아니란 말인가!”
“수색을 마무리하고 다른 배를… 음?”
의협대가 철저히 수색했음에도 살수가 발각되지 않았다.
이는 살수가 이 배에 탑승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허나 흔적은 분명 이 나루터로 향하고 있었다.
이 배가 아니라도 분명 다른 배에 숨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의협대가 막 철수하려고 할 때, 대원 중 한 명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건… 피!”
그가 발견한 것은 바로 혈흔이었다. 많지는 않았으나 분명 혈흔이었다.
이 혈흔이 살수의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누구라도 흘릴 수 있을 정도로 미량의 혈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곳에 살수가 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슨 일인가?”
“혈흔이 발견… 컥!”
“커억!”
“젠…장!”
선실을 수색하던 의협대원은 혈흔에 대해서 보고를 하려는 순간 절명했다.
그리고 같이 선실을 수색하던 의협대원들 역시 그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암습에 미처 대처하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허나 그로 인해 혁련후의 몸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놈이 여기 있다!”
“뭐라고!!”
누군가의 외침에 배 곳곳을 수색하던 의협대원들이 속속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가장 앞에는 의협대주 조현이 있었다.
수많은 전우를 잃은 그의 눈에는 복수의 불꽃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네놈…! 곱게 죽을 생각은 버려라!”
“네깟 것들이 날? 감히 주제도 모르고…….”
조현은 선량한 민초들이 휘말리지 않게 의협대원들로 하여금 보호하고 일부는 주변을 포위하게 했다.
그리곤 직접 혁련후에게 창을 겨누었다.
의협대주 조현. 그가 누군가. 무림맹 비무대회의 4강 진출자로, 상산 조가장의 후예였다.
기본에 충실한 조가장의 창은 신창양가, 산동악가와 견주어도 결코 손색이 없었다.
비록 그들과 달리 무림세가로 발전하지 못했기에 외부활동이 왕성하지 못할 뿐 절대 실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챙! 채챙!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은 너무도 간결한 창술이었지만, 분명히 그의 창은 강했다.
몸 상태가 최악인 혁련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함이었다.
쾅!
혁련후는 예상대로 조현의 창을 감당치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조금만 더 몰아세운다면 목을 베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크윽! 제~엔장!”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싶다. 허나! 난 무림맹 의협대주. 검을 놓고 투항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대주님!”
“절대 안 됩니다!”
조현은 마지막 권고를 하면서도 내심 거절하길 바랐다.
살수가 거절한다면 그를 벨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역시 동료들을 학살한 혁련후를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다.
다만 대의를 위해서 분노를 간신히 참고 있을 뿐이다.
“쿡쿡쿡… 미친… 쿨럭!”
기분 나쁘게 웃던 혁련후의 입에서 피가 섞인 기침이 나오더니 결국 피를 토하고 말았다.
누가 봐도 살 가망성이 없어보였다.
“네놈들…에게 죽을 바에는… 차라리 내 손에 죽겠다!”
“미친! 막아!!”
다 죽어가던 혁련후가 돌연히 달렸다. 그가 향한 곳은 바로 배의 끝머리. 즉, 물속에 빠지겠다는 뜻이다.
그건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아니었다.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태로 황하에 뛰어든다는 것은 익사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혁련후는 의협대에게 잡히기 전에 배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나 이를 그냥 두고 볼 조현이 아니었다.
그는 창을 있는 힘껏 던졌다.
푸욱!!
조현의 창은 황하를 뚫고 무언가를 찔렀다. 그 순간 황하가 붉게 물들었다. 허나 한참을 기다려도 혁련후의 시체도, 조현의 창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의협대는 망연자실하게 되었다.
그마나 대주인 조현이 가장 먼저 평정심을 회복했다.
“…의협…대는… 맹으로 복귀한다.”
임무를 완수하진 못했으나 살수의 죽음은 확실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이곳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의협대는 무림맹 총단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배에서 내렸다.
조현은 다시 한번 혁련후가 뛰어내린 황하를 바라봤다.
‘살아 있길 바란다. 다시 한번 네놈을…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사해련 대 사천무림
“으…으…으…….”
치료시기를 놓친 만큼 회복을 장담할 수 없었던 적묘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금 상황에선 무척이나 반가운 소리였다.
신음을 흘린다는 것 자체가 그녀의 의식이 점점 돌아오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실제로 아직은 호흡이 약하지만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여긴… 큭! 어디지…….”
의식이 돌아온 적묘는 낯선 천장에 몸을 급히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몸은 의지와 달리 일어나길 거부했다.
몸이 부서질 듯이 고통스러웠으나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지옥과 같은 시간을 버텨온 그녀였다. 고통은 무척이나 익숙했다.
게다가 비밀안가로 보이지 않으니 마음 편히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적묘는 경계 어린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누가… 치료한 거지… 대장…인가? 그보다 도대체 여긴…….”
누군가 자신을 치료한 것을 깨달았다.
문젠 누가 치료했냐는 것인데, 철우의 솜씨 같지는 않았다.
보다 전문적인 솜씨가 느껴졌다.
그때 문이 열렸다.
적묘는 다시 한번 경계심을 드러냈다.
“아…! 깨어나셨군요. 다행이네요. 아직 그렇게 일어나시면 안 돼요.”
“누구…….”
또래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적묘는 경계심을 거두진 않았으나 날을 세우진 않았다.
무림에서는 노인과 아이 그리고 여인조차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허나 자신과 너무 다른 여리여리한 여인의 모습에 적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방심하고 말았다.
그런 적묘에게 여인은 미소를 지어주며 곁으로 왔다. 그리곤 그녀를 뉘어주었다.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는 적묘로서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맥이 아직 약하긴 하지만 고비는 넘긴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철 공자님을 불러드릴 테니 쉬고 계세요.”
“철…공자님이라면…….”
“아가씨와 함께 온 철우 공자님 말이에요.”
“풋!”
적묘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철우와 공자라는 단어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여인, 한은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진 않고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적묘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대장이… 공자라… 풋!”
“뭐가 그렇게 웃기냐?”
한은설이 밖으로 나간 직후 철우가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이 같은 별채를 사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에요. 대장… 몸은 좀 어떠세요.”
“나보다 네가 더 걱정이지. …몸은 좀 어때?”
“…….”
적묘는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묻긴 했으나 철우 역시 그녀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많이 좋지 않다는 것을.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