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정주로 온 혈살객
“어, 어찌 되었…습니까!”
이현성이 한 사내를 데려왔다.
사내의 품에는 의식불명 상태의 여인이 있었다.
놀란 의독선생 종리우와 한은설은 여인을 인계받아서 바로 치료에 들어갔다.
신의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지만, 웬만한 명의들보다 더 뛰어난 의술을 익힌 자가 바로 종리우였다.
그런 그가 치료를 시작한지 한시진이나 지나 방에서 나왔다는 것은 여인의 병세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문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내를 보며 종리우가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장주께서 소저의 기혈을 바로 잡아주신 덕분에 급한 불은 끌 수 있었소.”
“아…! 고맙소. 아니,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제게 감사의 인사를 하기엔 아직 이르오. 안타깝지만 오늘이 고비외다.”
“……!!”
목숨을 단언하기에 그녀의 부상이 너무 심각했다.
아직까지 목숨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 그저 신기할 정도였다.
애초 그녀는 치료시기를 놓쳤다.
이현성이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기혈을 바로잡아서 악화를 막았고, 종리우의 뛰어난 의술 덕분에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던 것뿐이다.
“은설이가 밤새 곁을 지켜줄 테니, 희망은 버리지 마시오.”
“…고맙습니다.”
“장주의 부탁이었소. 그러니 나보단 그분께 감사하시오.”
“그야 성님께는 당연히 감사하지요.”
사내의 정체는 이현성의 의제인 철우였다.
종리우는 이현성에게 또 다른 동생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인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의 외모가 이현성과 닮은 구석이 없기에 곧 친아우가 아닌 의제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보다 그대의 상처도 봅시다.”
“전 괜찮습니다. 적묘만 신경 써주십시오.”
“그녀를 돌보려면 그대부터 회복해야 하지 않겠소?”
“…부탁드리겠습니다.”
적묘는 자신의 상처를 돌보지 않고 철우의 부상부터 치료하다가 의식을 잃었다.
그녀의 상태를 생각하면 철우의 부상을 완벽하게 치료했다고 보긴 힘들었다.
실제로 참고 있을 뿐 그의 몸 상태는 멀쩡하다고 할 수 없었다.
철우는 종리우의 말에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게 자신의 몸을 맡겼다.
종리우는 철우의 부상을 능숙하게 살피곤 다시 치료를 해주었다.
“장주님을 뵈러 갈 예정인데, 함께 가겠소?”
“…그러시지요. 저도 성님께 인사드려야 하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이현성의 집무실로 향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급한 불은 껐지만 오늘이 고비입니다.”
종리우의 말에 이현성은 안타까웠다.
철우가 이렇게 아끼는 동료라면 자신에게도 동료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철우에게 그녀를 구해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겨우 다시 만난 철우를 실망시키고 싶진 않았다.
“포기하지 마시고,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 다 구해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장주님. 저… 그리고…….”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고비를 넘기더라도 더 이상 무공을 익힐 수는 없을 겁니다.”
“……!!”
종리우의 말에 철우의 눈이 커졌다.
무인에게 무공은 목숨만큼 중요하다.
무공을 잃고 폐인이 되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무림인들이 수없이 많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독하게 몸부림치며 지금까지 온 적묘에겐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방법이 없습니까?”
“그녀의 단전에 정체는 알 수 없으나 금제가 되어 있습니다. 끝까지 치료하려면 금제를 풀어야 하는데… 단전이 온전한 상태로 금제를 푸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최소한 제 능력으론 그렇습니다. …3대 신의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그럼 성수의가에…….”
3대 신의는 황실의 태의(太醫), 지옥성의 독왕(毒王) 그리고 성수의가의 성수(聖手) 백우종이다.
왕작을 부여받은 이현성이라도 태의를 부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태의는 황실, 특히 황제의 건강을 책임지는 자였다.
따라서 그가 황궁 밖으로 나오는 것은 어렵다.
사파사세인 지옥성의 부성주인 독왕의 도움을 받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였다.
이현성이 정파인은 아니지만, 제갈세가주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성수의가의 성수 백우종밖에 없었다.
“지금 상태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녀의 체력을 최소한이라도 회복한 후에 움직이는 것이 안전합니다.”
“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장주님.”
아픈 환자를 먼 곳까지 데려가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그러니 가장 좋은 것은 백우종을 이곳에 모셔오는 것이다.
허나 백우종의 치료를 받고 싶다면 성수의가로 갈 수밖에 없다.
아무리 대단한 무림고수라도, 돈이 많은 거상이라도, 무소불위의 권력자라도 그를 강제할 수 없었다.
민심은 그에게 향해 있었다.
그의 치료를 받고 싶어 하는 자들은 수없이 많다.
그렇기에 그는 여산 성수의가를 벗어나지 못한다.
무력이나 금력 그리고 권력으로 그를 움직일 수 있었다면 성수의가는 애초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때 문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주님 무림맹 의협대주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무림…맹?”
무림맹이라는 말에 이현성은 본능적으로 철우를 바라봤다. 그리곤 전음으로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철우 너는 별채로 돌아가 있어라.
―죄송합니다. 형님.
―녀석, 우리 사이에 그게 무슨 소리더냐.
이현성은 종리우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예.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장주님.”
“…의협대주님은 객당에서 만나보지.”
“알겠습니다. 장주님.”
의협대주를 내원까지 들일 수는 없었다.
평소와 달리 지금은 찔리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현성은 외원의 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과분하게도 무림맹 의협대를 맡고 있는 조현이라고 합니다.”
객당의 문을 열자 의협대주인 조현과 몇몇 고수들이 이현성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런 그들의 눈에는 자신보다 절반의 나이도 되지 않은 이현성을 향한 경외감이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림맹의 별동삼대는 중소문파 혹은 일인전승 문파의 계승자 등 딱히 배경이라 할 것이 없는 자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의 선별 기준은 오직 실력뿐이었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대단한 배경도 없이 홀로 검신(劍神)이라 불리게 된 이현성에게 경외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였다.
“이가장주인 이현성이라고 합니다. 무림맹 협객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 저희야말로… 영광입니다! 대협!”
절대강자인 이현성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받자 그들은 감개무량한 얼굴이었다.
허나 그런 그들을 보는 이현성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들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예상되어서였다.
“그런데… 무림맹 협객들께선 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 겁니까?”
“아, 그게…….”
이현성의 물음에 그들은 난처한 듯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 이현성은 더욱 긴장했다.
결국 의협대주인 조현이 입을 열었다.
“…며칠 전, 살수들이 본 맹에 잠입한 일이 있었습니다.”
“…보고를 받긴 했습니다. 그럼 협객들께선… 살수를 쫒아 오신 겁니까?”
“아… 알고 계셨군요. 맞습니다. 저희 의협대가 살수의 뒤를 추적해서 이곳 정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쿵!
조현의 말에 이현성은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저들이 장원을 수색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거절하기 힘들었다.
물론 거절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의혹거리를 던져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허나 철우가 발각되면 안 되기에 수색을 허락하기도 힘들었다.
덕분에 이현성은 머리가 복잡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안색이 나빠 보입니다.”
“아, 아닙니다.”
“아… 예. 해서 본맹의 정주지부인 정주하가에 지원 요청을 했으나… 혹시 괜찮으시다면 장주님께서 도와주실 수 없습니까? 무, 물론 장주님께서 직접 움직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장원의 고수들만 지원해주신다면… 그러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조현의 입에서 나온 청은 이현성이 예상한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살짝 당황했다.
‘철우의 흔적을 완전히 찾은 것은 아니구나. 그럼 차라리 도우는 척하며 흔적을 위장하는 것이 낫겠어.’
저들에겐 미안하지만 철우를 내어줄 순 없었다. 철우가 저들에겐 적일지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소중한 의제였다.
“아닙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막상 거절을 당하니 의협대로서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허나 이어진 그의 대답은 전혀 달랐다.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제가 직접 도와드리겠습니다.”
“예? 저, 정말이십니까!”
“가, 감사합니다!!”
정주제일이라는 이가장 고수들만 지원해도 감지덕지인데, 무려 검신이 직접 도와준다고 하니 무척 감격스러웠다.
그때였다. 누군가 객당의 문을 거칠게 열었다.
“대주님! 살수를 발견했습니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오!”
철우를 발견했다는 의협대원의 말에 이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의협대원은 이현성의 강렬한 기세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저… 대협…….”
“아…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현재 살수는 도주 중으로, 저희 부대주님께서 대원들을 이끌고 추적 중이십니다. 수색을 위해서 흩어진 대원들도 신호를 보냈으니 곧 합류할 겁니다.”
별채에 숨어 있어야 할 철우가 도주 중이라고 하니 머리가 하얘졌다. 철우를 구하기 위해서 의협대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무림맹과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칫 혈천의 하수인으로 오인 받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철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의협대주 조현이 입을 열었다.
“대, 대협 저희는 먼저 움직이겠습니다.”
“아닙니다. 함께 갑시다.”
아직 아무런 결정은 내리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의협대만 보낼 수도 없었다.
몸도 성치 않은 철우가 의협대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별채에 가만히 있으라니까. 왜 그랬느냐, 철우야.’
* * *
‘젠장, 겨우 이딴 조무래기들 따위에게서 도망쳐야 하다니!’
의협대로부터 도주 중인 혈살객에 속한 살수는 치를 떨었다. 평소의 그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선 저들을 전부 베고 싶었다. 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평소 기량의 6할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분통이 터지지만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투항하라! 투항하면 목숨만은… 컥!”
“죽여도 좋다! 도망 못 치게 해!”
상부에서는 도주한 살수를 제압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다. 살수로부터 얻어야 할 정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수가 던진 비수에 투항을 권고하던 의협대원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결국 부대주의 눈이 뒤집어졌다.
부대주만이 아니었다. 동료의 죽음에 의협대원들 역시 살수에게 살심을 품기 시작했다.
“비룡검(飛龍劍)!”
부대주는 자신의 검을 있는 힘껏 던졌다.
화를 참지 못한 분풀이가 아닌지 그의 검은 살수의 등을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그 모습이 흡사 이기어검과 같았다. 허나 절정고수인 부대주가 이기어검을 펼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실 그의 비룡검은 비검술(飛劍術)의 일종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챙!
“윽!”
“지금이다!”
살수는 자신의 등을 노리는 의협대 부대주의 검을 막아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