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그가 이가장에 돌아온 후 홀로 그것을 살피고 왔었다.
예상대로 이십여 명이 지내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현성은 비밀안가를 파괴하려다가 혹시 몰라서 남겨두었다.
무림맹 총단이 위치한 허창에서 정주까지 거리는 넉넉잡고 5일 걸린다. 허나 그건 느긋하게 움직일 때이고, 무림인이 서두른다면 2―3일도 가능했다.
무림맹을 습격한 자들이 혈살객이 맞다면 하남성의 비밀안가에 숨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그곳이 정주 비밀안가란 보장은 없었다. 허나 아니란 확증도 없었다.
‘잘하면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 * *
“으…으… 윽!”
의식이 돌아왔는지 철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눈을 뜬 철우는 벌떡 일어나서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나 우려했던 뇌옥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평범한 민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이 어느 비밀안가의 비밀공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혈천의 비밀안가는 평범한 민가 혹은 상가로 위장했다.
그리고 그 안에 혈살객들이 지낼 그리 좁지 않은 비밀공간이 있었다. 그들이 지냈던 산서의 어느 비밀안가 역시 이곳과 비슷했기에 철우가 눈치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도대체… 이곳에는 어떻게… 음? 저, 적묘!! 으윽!”
철우는 벌떡 일어났다. 정확히는 일어나려는 순간 참을 수 없는 고통이 휘몰아쳤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지척에 적묘가 쓰러져 있기 때문이다.
“헉!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녀의 몸 상태는 무척이나 심각했다.
피도 제법 많이 흘린 것 같았고 기식이 무척이나 약해서 당장이라도 숨이 끊길 것 같았다.
순간 철우는 짜증이 났다.
“제 몸부터 돌볼 것이지! 왜 나부터!!”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은 그녀와 달리 철우는 어설프나마 치료의 흔적이 있었다.
무의식중에 스스로 한 것이 아닐 테니, 그녀가 본인의 상처를 돌보지 않고 자신부터 치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치료한 후 힘이 빠져서 결국 제 몸은 돌보지 못한 채 쓰러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약들을 주웠다.
자신을 치료할 때 사용한 약들임을 알 수 있었다.
철우는 적묘의 옷을 찢었다. 피에 찌들어서 풀어헤치는 것도 어려웠다.
그녀의 나신을 본 철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예상 이상으로 그녀의 상처는 심각했다.
“젠장! 금창약으로 치료할 수준이 아니잖아!”
베이고 찔리는 일이 많은 무림인에게 금창약은 필수품이었다. 혈천의 금창약은 제법 효과가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적묘의 상처는 그런 금창약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광룡마공은 내가요상(內家療傷)에 적합하지 않은데…….”
급한 대로 그녀의 기운을 돋워줄 생각이었다.
허나 광룡마공을 익힌 철우로서는 앞이 깜깜했다.
거칠고 광폭한 광룡마공은 누군가를 치료하는데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의 기운을 돋워주려다가 오히려 상하게 할 수도 있었다.
푹! 푸푹!
순간 철우는 몸이 굳어졌다. 누군가 그의 마혈을 짚은 것이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내가 원하는 것만 말해주면 죽이지는 않겠다.”
“협조할 테니! 적묘를… 적묘를 구해주시오!”
아무리 몸 상태가 최악이라도 초절정고수인 철우다.
그런 그가 인기척은 물론 자신이 제압된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다. 이는 상대가 자신을 한참 뛰어넘는 고수란 것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저항할 수조차 없었다. 그게 아니라도 적묘를 구하기 위해서 협조할 생각이었다.
“혈살객이 맞나?”
“맞소! 맞으니 빨리!”
“묻는 말부터 대답해라. 무림맹을 습격했나?”
“그렇…소.”
순간 철우의 눈이 깜깜해졌다.
자신을 제압한 자가 무림맹의 고수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의식을 잃은 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나 결코 무림맹에 반가운 일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물론 적묘 역시 위험해질 수밖에 없었다.
“날… 죽여도 좋소. 제발 적묘만은…….”
“재밌군. 혈살객의 입에서 제 목숨이 아닌 동료를 살려달라는 말이라니. 네 이름은 뭐지?”
“철…우라고 하오.”
“…!! 네…가 철…우라고!”
자신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혈천에서도 많지 않다.
광우(狂牛)라는 별명이 더 유명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무림에서 자신의 이름에 반응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순간 철우는 굳어졌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정말 네가 철우가 맞더냐!”
“누…구시기에 날…….”
“마, 맞구나! 철우 네가 맞구나!!”
철우의 복면을 벗겨 그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철우를 와락 안았다. 그로인해 철우는 움찔했으나 이상하게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고맙구나… 살아 있어 줘서… 정말 고맙구나.”
“도대체… 누구시기에 내게 이러는 게요?”
철우는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한편 마음 한구석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다만 그 정체는 알 수 없었다.
“…형이다! 네 형인 현성이 형이다!”
“미, 미친 새끼! 감히 성님의 이름…을……!!”
그렇다. 그를 보며 기뻐하는 자의 정체는 바로 이현성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혈천 정주 비밀안가를 찾아온 그였다. 일전에 방문했을 때는 없었던 누군가의 출입 흔적을 발견했다.
이현성은 두번 생각할 것 없이 혈살객을 제압했다.
그가 그렇게 찾았던 의제 철우라는 사실도 모른 채.
이현성이 죽었다고 알고 있던 철우는 그의 말에 버럭 화를 냈다. 제 검에 죽은 의형을 사칭했으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성인이 된 이현성의 얼굴에서 옛 얼굴을 엿볼 수 있었다.
“어…어떻게… 저, 정말… 성님이우? 저, 정말… 현성 성님이우!”
“그래 내가 네 형인 현성이가 맞다! 철우야!”
“하, 하지만 성님은 죽었잖소. 내…검에… 그런데 어떻게… 살아 있냔 말이오!”
철우의 외침에 이현성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당시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미안하구나. 너희도 구하고 싶었는데… 내가 부족했다. 정말 미안하구나.”
“…….”
당시의 일을 들은 철우는 말을 잃었다.
설마 당시 자신의 검에 찔린 것조차 죽음으로 위장하기 위한 계획이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이현성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런 그의 귓가에 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님 왜 고개를 숙이고 그러시오.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철우야… 미안하다.”
“제게 미안할 게 뭐가 있소. 성님이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하니. 나 역시 고맙수. 이렇게 살아 있어 줘서…….”
의외로 철우는 질책하지 않았다. 물론 그 역시 놀랐다.
허나 그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감사했다. 그렇기에 질책할 수 없었다.
“아! 성님! 적묘를 구해주십시오!”
“누구냐. 네 동료더냐?”
“날 따르는 녀석들 중 한 명인데… 날 구하려다가 다들…….”
“네 동료면 내 동료이기도 하지. 걱정 마라. 내가 기필코 구해줄 테니까.”
이현성은 적묘의 상처를 살폈다. 철우에겐 구해주겠다고 말했으나 호언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현성은 호흡을 가다듬은 후 검지와 중지에 기운을 집중시켰다. 바닥에 뉘어져 있던 적묘가 허공에 떠올랐다.
푹! 푸푹!!
그 순간 이현성의 검지와 중지가 전광석화처럼 움직여서 적묘의 전신 혈을 짚었다. 그 신기와 같은 솜씨를 곁에서 본 철우는 경악했다. 초절정고수가 된 자신조차 할 수 없는 신위였기 때문이다.
적묘의 전신에 따스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진화한 혼원신공은 안정성은 물론 요상능력 역시 뛰어났다.
이각이 흐른 후 허공에 떠올랐던 적묘가 천천히 바닥에 안착했다.
“후… 내공으로 치료할 수 있는데 까지는 했다. 이 뒤는 의원의 치료가 필요하다. 가자꾸나.”
“예? 어딜 말이오. 성님.”
“내 장원으로 가자.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고, 뛰어난 의원이 있으니 그녀를 치료해줄 수 있을 거다.”
“아, 알겠소. 성님.”
그는 아직 몰랐다. 죽은 줄 알았던 의형 이현성이 검신(劍神)이라 불린다는 사실을. 그들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피투성이가 된 사내가 이곳에 들이닥쳤다.
“쿨럭… 쿨럭… 우웩!”
피투성이가 된 사내는 외상만큼이나 내상 역시 심각한지 입에서 피를 토했다. 그럼에도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누운 채 와공(臥功)을 펼쳤다.
가부좌를 틀고 정공을 펼칠 여력조차 없었다.
만약 이 상태로 적이 나타난다면 죽은 목숨이었지만, 당장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운기행공은 멈출 생각이 없는지 무려 두 시진이나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야 그의 눈이 떠졌다.
“으… 젠장. 무림맹 놈들! 이 빚은 잊지 않겠다. 특히 벽력도군 네놈은! 기필코 찢어 죽여주마!”
그를 피투성이로 만든 사람들은 놀랍게도 무림맹 고수들이었다.
그의 정체는 바로 혁련후.
무림맹 뇌옥에 갇힌 우사와 혁련용후를 암살하고 도주할 수 있었다. 허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뇌옥에서 막 벗어나려는 순간 무언가 그의 등을 베었다. 백호당주이자 하북팽가주인 벽력도군 팽홍원의 도강이었다.
본능적으로 호신강기를 펼쳤기에 목숨만은 구할 수 있었다. 허나 그의 등에 거대한 도흔과 깊은 내상만은 면할 수 없었다. 그만큼 팽홍원의 도강은 강력했다.
그런 부상을 입고 무림맹을 벗어난 것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뒤를 쫓던 백호당의 추적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또 다른 추격자들이 따라붙었다. 별동삼대의 하나인 의협대(義俠隊)였다.
무위만 본다면 사신당에 못 미치지만, 추적능력은 오히려 별동삼대가 한수 위였다.
백호당이 추적을 실패하는 순간 의협대가 동원되었다.
큰 부상을 입고 있는 그에게 의협대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보다… 누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
조금 전까지는 부상으로 인해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운기행공을 통해서 이미 고비를 넘긴 그의 눈에 누군가의 흔적이 들어왔다.
혈천의 비밀안가인 만큼 혈살객의 흔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할 수는 없었다.
“끙… 잠잠해질 때까지 있으려고 했는데 느낌이 좋지 않아…….”
이미 이곳이 발각된 거라면 정말 위험했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느낌이 너무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혁련후는 아직 부상이 낫지 않았음에도 서둘러 떠날 생각이었다.
그는 몰랐다. 자신이 운이 좋았다는 것을.
만약 그가 조금만 더 이곳에 일찍 왔다면 지옥을 맛보았을 테니까. 그렇게 그는 정주 비밀안가를 떠났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