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살수-213화 (213/314)

213화.

“그만! 맹주님께서 계신 자립니다. 정숙해주십시오!”

“큼큼… 실례했습니다. 맹주님.”

“저희가 좀 흥분했군요.”

제갈윤호의 호통에 그제야 치열하게 언쟁을 하던 무림명숙들이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무림맹주는 결코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그가 누군가. 백의무제 백무강이었다.

거대한 세력을 일군 것은 아니었지만, 화경고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일인군단이며 좌중을 압도할 수 있는 초인이었다.

“모두의 뜻은 잘 알겠소. 어느 한 분 틀린 말씀을 한 게 아니라는 것 역시 잘 아오. 허나…….”

조금 전까지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던 백무강이 기세를 흘리자 좌중을 압도했다.

덕분에 명숙들은 다시 한번 그의 존재를 깨달았다. 화경고수가 어떤 존재인지를.

백무강은 무림맹주로서 단호하게 말했다.

“정사대전만은 막아야 하오. 그런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무림맹주의 직권으로 막겠소.”

“그렇긴 하지만… 저들이 회담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라고 정사대전이 일어나길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파사세가 회담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무림맹을 압박하겠단 의도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정사대전으로 번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걸 알기에 정파 명숙들이 이리 모여서 강도 높은 언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사대전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설사 일어난다면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함이었다.

서로 으르렁 거리더라도 공공의 적이 나타나나면 똘똘 뭉치는 결속력이야말로 정파무림의 최대 장점이었다.

허나 강력한 한 사람에 의한 군림이 아닌 여러 사람이 각자의 생각을 말하는 정파무림은 지휘가 힘들다는 단점이 존재했다.

무림맹주가 눈짓을 하자 제갈윤호가 나직하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총군사님.”

“사파사세의 회동과 같은 기밀이 너무도 쉽게 알려졌습니다.”

“그 말씀은 잘못된 정보라는 말씀이십니까?”

정파 명숙들이라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단순히 생각하며 넘기기에는 그 사안이 너무도 컸다. 실제로 제갈윤호 역시 거짓정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정보공작이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혁련세가와 혼세교의 수뇌급이 본맹에 압송된 지금, 사파사세가 회동을 가진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말입니다.”

“총군사님께선… 설마… 그들의 배후에 사파사세가 있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사천당가의 암군 당자성의 말에 좌중은 경악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정사대전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만약 추측대로라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사문의 방비부터 해야 했다. 방심하고 있을 때, 급습이라도 당하면 그대로 무너질 수 있었다.

좌중을 혼란스럽게 만든 당자성을 보며 제갈윤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애송이 놈이…! 후…….’

자존심만 강해서 쓸데없이 문제는 일으키는 사천당가를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는 제갈윤호였다.

그중에서도 당자성을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사천당가라는 배경과 암군이라는 영향력을 가진 자로서 진중하지 못하니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타박할 순 없었다.

사천당가는 오대세가의 하나인 만큼 강력한 힘을 가졌다. 당자성은 그런 사천당가의 작은 주인이었다.

“그런 말이 아니니, 모두 진정해주십시오!”

“빌어먹을 애송이놈!”

점잖은 제갈윤호답지 않게 그의 입에서 거친 말이 나왔다. 당자성의 쓸데없는 말로 인해 상황만 복잡하게 되었다. 총군사인 제갈윤호는 그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서 진땀을 빼야 했다.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간 자칫 전력 이탈로 번질 수 있는 사항이었다. 덕분에 회의는 이렇다고 할 결론을 맺지 못한 채 흐지부지하게 중단되었다. 그로 인해 신산각으로 돌아온 그로서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종, 그 늙은이는 도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급기야 제갈윤호의 입에서 독종 당철영까지 거론되었다. 젊은 시절 당철영 역시 그런 점 때문에 제갈윤호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런데 그 자식까지 이러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하… 그보다 이를 어찌 해야 하나…….”

지금 문제는 당자성이 아니었다.

정사대전의 시초가 될지 모를 사파사세의 회동이었다.

무림맹의 총군사로서 올바른 길을 제시해줘야 하는 그로서는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음? 이건 뭐……!!”

그의 집무실에는 수많은 문서가 쌓여 있었다.

그중 하나의 문서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갈윤호는 무의식적으로 그 문서를 읽었다. 그리곤 눈을 부릅떴다.

놀란 제갈윤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밖에 누구 없는가!”

“무슨 일이십니까! 총군사님!”

제갈윤호의 다급한 외침을 들은 주작당 고수들이 들어왔다. 그런 그들을 보며 제갈윤호는 다급하게 물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가 이곳에 들어왔는가! 그게 누군가!”

“예? 아무도… 아, 연 군사께서 잠시 방문하셨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연 군사가? 내 집무실 안까지 들어왔는가?”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평소와 너무도 다른 제갈윤호의 반응에 주작당 고수들은 당혹스러웠다.

제갈윤호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다가 입 안으로 삼켰다. 저들에게 말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닐세. 아니네. 내 착각을 했나보네. 그만 나가봐도 좋네.”

제갈윤호의 축객령에 주작당 고수들은 당황하며 자신들의 위치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제갈윤호는 손에 들린 문서를 바라봤다. 순간 제갈윤호의 눈빛이 번뜩였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문서 하나. 허나 그 속에는 그냥 넘길 수 없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도대체… 누가…? 허나 이게 사실이라면…….”

비정무림 (2)

“으…으… 정파… 개자식들!!”

혼세교의 이인자인 우사는 강도 높은 심문으로 인해 몸이 멀쩡한 곳이 없었다. 게다가 단전을 막아뒀기에 운기행공을 할 수도 없었다. 덕분에 탈출은커녕 부상을 회복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에 반해 혁련용후는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물었다.

“…….”

강도 높은 심문에도 입을 열지 않는 그를 보며 감찰단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그런 그가 우사는 못마땅했다. 그와 비교되어 왠지 자신이 못나 보이게 느껴졌다.

“끄응… 혁련 가주, 아직 살아 있소? 혹 상부에서 어떤 연락 받은 것 없소?”

“…….”

우사의 물음에도 그는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으니 우사는 더욱 짜증이 났다.

무시당하고 기분 좋은 사람은 없었다.

“젠장! 나완 말도 섞기 싫다는 거요!”

“…….”

혁련용후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입가에는 씁쓸함에 어려 있었다.

‘그댄 아직도 희망을 가지고 있소? 혼세신마는 몰라도 아버님은…….’

초절정고수는 결코 흔한 존재가 아니며 혼세교 이인자인 자신을 대체할 자는 없다고 생각하는 우사였다.

그렇기에 혼세교주는 물론 혈천 역시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와 달리 혁련용후는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 혁련중광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미세하지만 뇌옥 안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컥!”

“누, 누구… 으윽!”

단말마의 비명소리에도 혁련용후는 그 어떤 미동도 없었다. 반면 드디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상부에서 움직였다고 생각한 우사는 흥분 상태였다.

“여기다! 나 여기에 있으니 빨리 문을 열어라!”

서걱!

거대한 철문이 베이며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금옥(禁獄) 안으로 들어왔다.

무림맹의 뇌옥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졌는데, 일반적인 죄수를 수감시킨 뇌옥과 거물급을 가두는 금옥이었다.

뇌옥 속에 금옥이 존재했다.

거물급을 수감하는 금옥답게 이곳의 철문과 철창 전부 특수합금으로 제련되었다.

덕분에 강제로 파괴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옥의 철문이 열렸다.

아무리 뛰어난 특수합금이라도 강기만큼은 버틸 수 없었다.

저벅저벅.

괴한들은 주변을 경계했고, 오직 한 명만이 금옥의 안쪽까지 들어왔다.

“이봐! 문 열어! 빨리…….”

움찔!

우사는 이제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했다.

덕분에 뵈는 게 없었다. 그런 그도 뒷말을 하지 못한 채 움찔했다.

괴한의 눈빛을 봤기 때문이다.

그의 눈빛은 인간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허나 자신이 누군가. 혼세교의 이인자인 우사였다.

“나, 나는 혼세교의 우사다. 이 은혜는… 음? 컥!”

“…시끄럽군.”

우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철창 사이로 지나간 검이 그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너무도 놀라서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지 그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나, 나 호, 혼세교의…….”

“안다. 그러니 그만 입 다물고 죽어라.”

“개… 커억!”

구해줄 거라 생각했던 그들이 알고 보니 자신의 입을 막기 위한 사신임을 깨달은 우사는 분노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초절정고수가 아닌 단전이 막힌 일개 수인(囚人)일 뿐이었다.

게다가 이미 심장에 검이 박힌 상황이었다.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혼세교의 이인자 우사는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의 심장에 박았던 검을 뽑은 괴한은 다시 걸었다.

몇 걸음 더 걸은 후 멈추었다.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서걱!!

철창들이 베이면서 입구가 만들어졌다.

그제야 침묵하고 있던 혁련용후가 입을 열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괴한임에도 그는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설마했는데… 너였구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아버님.”

그렇다. 우사의 심장에 검을 찌른 자는 바로 혈검살객 혁련후였다. 그런 그를 보며 혁련용후는 너무도 허탈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그였으나 막상 이런 상황에 직면하니 부친의 지독함에 치가 떨려왔다.

“너무하시는군. 하필 네게 나의 목을 가져오라 하시다니…….”

“죄송합니다. 아버님의 목을 남에게 맡길 수는 없었습니다.”

“…….”

자신이 낳은 자식이건만, 냉정함은 젊은 시절 자신을 똑 닮은 아들을 보며 말을 잃었다.

어쩌면 자신보다 부친을 더 닮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체념한 혁련용후는 나직하게 말했다.

“가져가거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꼭 이루길 바란다.”

“…제가 천하를 쥐는 날, 아버님께 사죄드리겠습니다.”

“…….”

아들에게 자신의 목을 내줘야 하는 혁련용후.

아비의 목을 취해야 하는 혁련후.

아무리 무림이 비정하다고 한들, 이들보다 비정할 순 없었다. 그렇게 혁련후의 검이 움직였다.

퍼퍽!

“큭!”

“컥!”

“이놈들!! 이곳이 네놈들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곳인 줄 알았더냐!!”

특급살수인 혈살객들이 손도 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무림맹 고수들이 들이닥쳐 그들을 공격했다.

그중에는 감찰단주인 천왕신권(天王神拳) 황보관영과 백호당주인 벽력도군(霹靂刀君) 팽홍원도 있었다.

두 사람 외에도 하나 같이 쟁쟁한 고수들이 혹시 모를 도주를 막고 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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