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이곳에 계셨군요!”
“무슨 일인가?”
“빨리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딜 말인가? 맹주님께서 날 찾으시나? …한 호법, 미안하오. 술은 조금 있다가 합시다.”
제갈윤호는 한승을 보며 무척이나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먼저 술자리를 권했는데, 그 약조를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괜찮습니다. 맹주님께서 찾으신다고 하니, 빨리 가보시지요.”
“내 금방 다녀올 테니, 조금 있다가 마십시다.”
약조를 잠시 뒤로 미룬 제갈윤호는 맹주전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승은 나직하게 말했다.
“별일이 없으셔야 할 텐데…….”
* * *
“방주님, 정말 사해련주의 제안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나 역시 미심쩍지 않은 것은 아닐세. 허나 무림맹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도 사실 아닌가.”
“그야 그렇지만…….”
며칠 전, 천웅방에 사해련주의 밀사가 찾아왔다.
무림맹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사파의 힘을 모아서 대응하자는 제안이었다. 무림맹이 세워진 이후 정파의 움직임이 활발해진 것이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사파의 문파들이 위축된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감히 사파사세까지 영향을 주진 못했기에 천웅방은 물론 나머지 삼세 역시 이렇다 할 대응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파무림의 기세가 높아지고, 사파무림이 위축된다면 결국 사파사세 역시 간접적이나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침묵하던 사해련주가 먼저 움직였다.
“자네도 들어서 알겠지만, 살왕이 죽었다는군. 그것도 신검 아니… 이제 검신이라고 불린다지? 그에게 말일세. 중원에 변화가 생기고 있네. 여기서 주춤한다면 휩쓸려서 사라질 수도 있어. 그러니 우리도 그만한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방주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사해련주의 제안은 사파사세를 위시한 사파무림의 연합을 세워서 무림맹에 대응하자는 것이다.
얼마 전이었다면 고민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이상 고민할 수 없었다.
사파의 절대자 칠사 중 한 명인 살왕이 죽음을 맞이했다. 물론 십정인 신비무선 역시 죽었기에 무게의 추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검신 이현성의 등장은 모두에게 충격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고작 이립도 되지 않은 나이에 화경이라니, 어찌 경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공식적으로 성향을 정파로 천명한 것은 아니었다.
허나 제갈세가의 여식과 혼사를 맺은 이상 정파를 외면하진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파무림으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회담 준비를 철저히 해서 흠집 생기는 일은 없게 하게. 풍패.”
“물론입니다. 방주님.”
사파사세의 회담은 호남 천웅방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중립지역이라고 할 만한 곳이 없었기에 지리적으로 중심에 있는 호남 천웅방에서 회담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는 회담을 제의했던 사해련주의 요청이기도 했다.
천리풍패(千里風覇)가 물러나자 홀로 남은 천웅방주의 표정이 바뀌었다.
“왜 하필 이 시기일까. 분명 그의 노림수가 있을 터인데…….”
사해련주는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척박한 청해성을 평정해서 사파사세의 하나로 끌어올린 인물이 바로 그였다. 천사교주가 사파제일고수이고, 지옥성에 화경고수가 둘이나 있었다.
그에 반해 사해방은 머릿수가 제일 많은 것을 제외하면 그리 신경 쓸 게 없었다. 그럼에도 천웅방주는 천사교와 지옥성보다 사해련을 더 위험하게 생각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사해련주 때문이다.
그런 사해련주가 오랜 침묵을 깨고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천웅방주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금은 놀아나 주지. 허나… 나 담중이 순순히 당해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망도제(死亡刀帝).”
* * *
“정말 할거요, 형님?”
“상부에서 까라면 까야지. 안 하고 버틸 자신 있어?”
“그야… 그래도 너무한 것 아니오? 썩을! 무림맹 총단에 있는 신산을 어떻게 암살하라는 거요! 그냥 우리보고 다 죽으라는 거지!”
“맞아요. 대장. 불가능한 임무라고요.”
혈천 대군사인 문인윤걸의 밀명이 산서 비밀안가 중 한곳에 전해졌다. 그건 놀랍게도 신산 제갈윤호를 암살하라는 지시였다.
산서 비밀안가에 기거하고 있던 혈우살객 철우와 그를 따르는 반골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곳에 있는 혈살객이라고 해봤자 혈살칠객의 한명인 철우와 혈살오관을 통과한 혈살객 넷뿐이었다.
이 인원으로 무림맹의 심처 중에 심처인 신산각에 잠입해서 제갈윤호를 암살하는 것은 불가능한 임무였다.
그렇다고 해서 준비를 할 시간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다. 이는 그냥 죽으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독안, 네가 보기에 왜 이딴 임무를 내린 것 같으냐?”
“…대장, 제가 보기에는 무림맹에 갇힌 혁련세가주와 혼세교 우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처음 철우에게 반골 기질이 다분한 혈살객 네 명이 배정되었을 때, 제대로 된 조(助)가 아니었다.
철우를 포함해서 하나 같이 협동, 신뢰는 안중에도 없었다.
내 등을 맡길 수 없는데 어찌 조(組)로서 활동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협동심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반골 기질 때문에 배척당했음에도 혈살객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은 뛰어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그들은 혈살객 내에서도 상위에 속한 자들이었다.
하나 같이 혈살오관을 통과하면서 실력으로 증명한 자들이었다.
그런 실력을 갖고도 배척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주변을 믿지 못하고 협동심이 없는지를 잘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주먹으로 그들을 설득하고 굴복시켰다.
한명 한명 쓰러트리자 그들 사이에 철우는 공공의 적이 되었다.
나중에는 둘이 한 번에 덤비더니 그 후에는 넷이 달려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혈살육관의 마지막 단계인 혈천신단까지 이겨낸 철우를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모순이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겨났다. 최소한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작은 변화였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동료애라는 씨앗이 생겨났다. 덕분에 지금은 형님 혹은 대장이라고 부르며 그를 따르게 되었다.
“독안, 네 말대로라면 결국 우린 미끼겠군. 뇌옥으로부터 시선을 돌릴 미끼…….”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대장. 사실 그게 아니라면 이 시기에 신산을 암살하라는 게 말이 됩니까?”
철우를 따르게 된 혈살객 중 한 명인 독안(獨眼)은 부르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눈이 하나밖에 없었다.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혈살동에서 수련 중에 한쪽 눈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혈살오관을 통과할 정도로 뛰어난 기재였다.
게다가 눈이 하나뿐임에도 눈치가 빨랐고 감이 좋았다.
그리고 제법 머리가 좋아서 철우의 조언자 역할을 했다.
“대장, 모른 척합시다. 밀명을 못 받았다고 하면 지들이 어쩌겠어요?”
“맞습니다. 형님. 이건 개죽음입니다!”
그를 따르는 혈살객들은 이렇게 허무한 죽음은 사절이라면서 항명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항명의 대가는 너무도 참혹했다.
“그러다가 금제를 발동시키면 어쩔 건데? 나와 달리 너흰 금제를 극복하지 못했잖아?”
“그야… 에이! 그럼 어쩌우! 절대 불가능한 임무인데!”
혈살객을 살인병기이자 소모품 취급하는 혈천이었지만, 그들에 대한 관리가 소홀한 것은 아니었다.
십여 년에 걸친 세뇌를 통해서 혈천에 충성하게 만들었다.
허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혈살객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금제까지 걸려 있었다.
혈천신단의 기운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철우에게 가해진 금제가 깨졌다. 그때서야 자신에게 위험한 금제가 가해져 있었단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에 반해 나머지 넷은 반골들답게 세뇌에선 벗어난 듯싶었으나 금제는 어찌하지 못했다. 금제의 존재조차 철우를 통해서 알게 되면서 혈천에 대한 골이 더 깊어졌다.
그와 별개로 항명의 대가가 금제의 발동이 아니란 보장이 없었다.
“에이, 설마 죽이기야 하겠수? 놈들이 들인 시간이랑 돈이 아까워서라도 쉽게 버리진 않을 거요.”
“멍청아, 그런 놈들이면 이딴 임무를 줬겠냐?”
“머, 멍청이! 이 계집애가!”
그들 중에는 놀랍게도 홍일점이 있었다.
혈무곡과 생사교에서 기초를 쌓을 때만 해도 여아의 수가 전체의 3할쯤 되었다.
허나 지금은 1할 이하였다.
어린 시절에는 남녀의 신체능력 차이가 크지 않았고, 무엇보다 문인주희라는 구심점이 있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그녀가 사라진 이후 여아들 중 낙오자가 발생했다. 낙오는 곧 죽음이었다. 살아남은 여인들은 대부분 강자의 여인이 되었다.
비참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에 반해 철우의 휘하에 들어간 그녀만은 악바리처럼 버텨서 홀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어쩌면 이 중에 가장 독종은 그녀일지도 모른다.
“적묘(赤猫), 백경(白鯨) 정신 사나우니 나가서 놀아라.”
“형님! 놀다니요! 섭섭합니다!”
“맞아요. 대장! 제가 얘랑 놀 수준인가요?”
홍일점 적묘는 유연하고 은밀해 고양이 같다고 해서 적묘라 불리게 되었고, 그녀와 싸우는 사내는 철우 못지않게 거구에 어촌 출신이라서 백경이라 불리고 있었다.
“시끄럽다 이것들아! 독안, 넌 흑오에게 연락해서 아는 것이 있는지 알아봐.”
“알겠습니다. 대장.”
철우, 흑오 그리고 초운비는 예상대로 찢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서로 연락을 할 수 없게 혈천이 혈살칠객 사이의 위치를 숨겼음에도. 그럼에도 서로의 위치를 알 수 있었던 것은 수라검귀가 뒤에서 도움을 준 덕이었다.
물론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냄새가 난단 말이야. 냄새가…….’
* * *
“이건 본맹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래서 회담장을 급습이라도 하잔 말이오!”
“못할 것은 또 뭐가 있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오!”
사파사세의 회담 사실이 알려지자 무림맹은 발칵 뒤집어졌다.
정파고수들은 사파무림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스스로를 정도(正道)라고 칭하면서 저들을 사도(邪道)로 지정할 정도로. 그런 핍박 속에서 사파무림은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정파무림에 대한 적의를 키워왔다.
사파사세는 그런 사파무림의 자존심이며, 정파무림도 그들만은 무시하지 못했다. 그런 사파사세가 회담을 갖는다고 하니 무림맹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파사세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한 힘을 가졌는데, 그들이 힘이라도 합친다면 무림맹으로서도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사대전이라도 일으킬 작정이오!”
“회담을 모른 척하면 일어날 정사대전이 안 일어난답니까!”
무림맹 수뇌들의 언쟁이 점점 심해지더니, 급기야 정사대전까지 거론되었다. 정사대전(正邪大戰)은 말 그대로 정파무림과 사파무림의 전면전을 의미했다.
반드시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호사가들은 정사무림의 전력을 6 대 4 혹은 7 대 3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였다. 짓밟아도 다시 살아남는 사파무림의 저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 증거가 바로 사파사세와 육사(六死)였다.
게다가 기인은 정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함부로 속단하는 것은 위험했다.
설마 승리한다고 한들, 정파무림이 무사할 수는 없었다. 사파무림 그리고 사파사세는 결코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언쟁이 점점 심각해지자 결국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